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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문화와 함께 읽는 전경 : 중국 해원 공사에 대한 이해

중국 해원 공사에 대한 이해



교무부 이호열



상제께서 원일과 덕겸에게 “너희 두 사람이 덕겸의 작은 방에서 이레를 한 도수로 삼고 문밖에 나오지 말고 중국 일을 가장 공평하게 재판하라. 너희의 처결로써 중국 일을 결정하리라” 이르시니 … 덕겸이 “세계에 비할 수 없는 물중지대(物衆地大)01와 예악문물(禮樂文物)의 대중화(大中華)의 산하(山河)와 백성이 이적(夷狄…오랑캐)의 칭호를 받는 청(淸)에게 정복되었으니 대중화에 어찌 원한이 없겠나이까. 이제 그 국토를 회복하게 하심이 옳으리라 생각하나이다.”라고 하니, 상제께서 무릎을 치시며 칭찬하시기를 “네가 재판을 올바르게 하였도다. 이 처결로써 중국이 회복하리라” 하시니라 …                   (공사 3장 18절)


  19세기 서양 세력의 침략에 무기력하게 패배하며 ‘종이호랑이’로 불리는 수모를 겪었던 중국은 대내외적인 격동의 세월을 지나 오늘날 미국과 함께 세계 양강 구도를 형성하며 강대국의 위상을 회복하였다. 이러한 이면에는 중국을 회복시키고자 하신 상제님의 중국 해원 공사가 존재하였다. 이러한 중국 공사를 이해하기 위해 중화사상의 유래와 전개를 살펴보고, 중국이 대중화로서 원한을 가지게 된 역사ㆍ문화적 배경, 그리고 중국 해원 공사 이후 중국의 변화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이 글을 통해 중국의 역사ㆍ문화적 이해를 바탕으로 현대 중국이 지향하는 위상과 그 방향에 대해 적절한 이해와 관점을 제공하는 데도 도움이 되리라 본다.



대중화(大中華)의 유래와 전개

우선 중화의 의미에 대해 알아보면, 중화(中華)에서 중(中)은 ‘중앙’의 뜻으로 중국을 의미하고, 화(華)는 ‘빛남’의 뜻으로 문화가 번창함을 의미하여 중화는 곧, 번창하고 융성한 중국의 문화를 가리킨다.02 대중화(大中華)는 이러한 중화의 의미를 높여 부르는 말이며, 이러한 중국의 대중화 의식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문명을 유지하고 그것을 주변에 확장시켜 온 문화의 중심지라는 데서 비롯한 것이기도 했다.03 이와 함께 형성된 중화주의는 산물(産物)이 많고 땅이 넓으며 예악문물(禮樂文物)을 비롯하여 중국인[漢族]들이 가장 발달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을 바탕으로 형성된 중국 중심 사상을 말한다.
  중화주의에는 모든 것이 중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자문화 중심주의와 선민(選民)의식이 배어 있고, 동시에 한족(漢族)을 일컫는 중화(中華)민족 이외의 민족을 이적(夷狄)이라 천시하고 배척하는 관념이 있어 이를 화이사상(華夷思想)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중화주의는 주왕(周王)을 보필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정신이 일어났던 춘추시대(BC.770~BC.403)부터 생겨나 유가(儒家) 사상이 국가 통치 철학으로 자리 잡은 한(漢)대에 체계화되면서 오랫동안 중국인의 의식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중화주의에는 정치적 의미로 ‘하늘 아래 온 세상’을 의미하는 중국인의 천하 관념이 내재해 있는데, 이 천하 관념의 중심은 천자(天子)이며, 천자는 하늘의 대리자로서 천명(天命)을 받아 중국뿐만 아니라 주변 민족들까지 교화시켜 다스릴 의무가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이러한 천자가 덕(德)을 펼쳐 중원을 다스림과 동시에 주변국인 남만(南蠻)ㆍ북적(北狄)ㆍ동이(東夷)ㆍ서융(西戎)의 모든 이민족을 교화(敎化)하며 세상의 질서를 유지한다는 내용의 ‘천하 국가관’이 중화주의의 토대를 이룬다.04 중국은 이러한 유교적 국가관을 바탕으로 “중국이 세계질서의 구심점이므로, 중국은 주변 국가를 돌보아야 하고 주변 국가는 중국의 힘에 복종하여야 한다”05라는 중화적 질서에 대한 믿음 아래 오랫동안 주변국과 군신(君臣) 관계를 맺으며 사대(事大)의 예를 요구하였고, 문화를 전파하고 조공을 받으며 국제적 질서를 유지해 왔다.
  이렇게 중국과 주변국이 유지해 오던 질서의 근간이었던 중화주의는 1644년 한족이 세운 왕조였던 명(明)나라가 무너지고, 만주족인 청(淸)나라가 대륙을 지배하게 되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충격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06 그것은 이전에 여진족(만주족의 옛 이름)이 세운 금나라의 침입으로 송나라가 남쪽으로 밀려 내려가거나, 몽고족의 원나라로부터 느슨한 지배를 받던 시기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실제 원나라는 몽고인-색목인-한인-남인의 4계층을 두고 한인을 차별하였으나, 이러한 정책은 행정력의 부족으로 일부 지역에서만 시행되었고, 남송(南宋) 지역은 한인 호족의 자치가 실시되는 지역이 많았다. 몽고 지상주의 속에서도 한족의 문화를 탄압하지 않았고, 오히려 후대로 갈수록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는 현상을 보였으며, 변발과 호복도 일부 지역에서 강제되었다고 하나 명목상에 불과했다.



굴종(屈從)과 차별 그리고 사상통제

  청나라에 의해 명나라가 망하게 되자 그로부터 한족은 단지 대중화로서의 자부심에 상처를 입는 정도를 넘어 만주족의 오랑캐 문화를 따라야만 하는 모멸감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을 맞이하였다. 왜냐하면 중국을 정복하고 수도를 북경으로 정한 청나라가 즉각적으로 체두변발령(剃頭辮髮令, 1644)을 내리고, “머리를 남기려면 머리털을 남기지 말고(留頭不留髮), 머리털을 남기면 머리를 남겨 두지 않겠다(留髮不留頭)”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한족의 머리를 삭발하고 만주족 두발형인 변발(辮髮)07을 강요했기 때문이다.08 청나라 정부의 한족(漢族)에 대한 변발 정책은 이를 따르지 않는 성(城) 하나를 도륙 내고 수십만 명을 학살할 정도로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끝까지 변발을 거부하던 한인(漢人) 중에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거나 승려가 되는 사람도 있었다. 중국 안에서 이를 거부할 방법이 없게 되자 해외로 도피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중원(中原)을 점령한 만주족의 통치자들은 한인들로 하여금 두발 뿐만 아니라 의복에 있어도 청나라의 문화를 따르게 했다. 한족의 ‘한복(漢服)’ 착용을 금지하며 남성에게는 무조건적으로 만주족의 복식을 따르게 하여 창파오(長袍)에 검은색 마고자를 걸치도록 했고, 여성에게는 만주족의 원피스형 치마인 치파오(旗袍)를 입도록 하였다.09


▲ 청 나라 이발소, 1870년 촬영, 위키백과.



  이렇게 변발과 호복(胡服)을 따르는 것이 수치스러웠던 이유는 공자가 관중(管仲)10을 평가하면서 “관중이 환공(桓公)을 도와 제후의 패자가 되게 하여 한 번 천하를 바로잡아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고 있으니, 관중이 없었다면 나(우리)는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편으로 하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11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머리모양과 의복은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을 식별하는 외적 기준이었다.12 그토록 무시하던 오랑캐의 두발과 복장을 힘에 굴복하여 따라야만 했으니 중화민족으로서 그러한 치욕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또한, 청 왕조는 만주족과 한족의 결혼을 금지하는 만한불통혼(萬漢不通婚)의 법률을 만들어 엄격하게 집행하였다. 독일 나치가 ‘유대인은 독일인과 결혼할 수 없다’라고 규정한 반유대 인종차별 법률13을 만든 것과도 비교되는 이 법률은 만주족과 한족이 혈연을 맺지 못하도록 하여 한인에 대한 민족 차별적 통치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1902년 광서제가 폐지 시킬 때까지 지속되었다.
  한인에 대한 차별은 관직 등용에서도 나타났는데, 청나라가 민심 회유를 위해 표면적으로는 중앙 정부의 관직에 한족들도 함께 임용하여 조화를 꾀하는 듯하였으나, 정작 한족 관리들은 국정을 운영하는 데 있어 만주족 관리들을 돕는 역할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6대 건륭제(재위: 1735~1795) 시기에는 민족차별 정책으로 인한 한인 관리들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관직 등용에 나타난 이러한 차별은 청 말기까지도 계속되어 한인들의 불만과 저항의 원인이 되었다.14
  이뿐 아니라 청조는 회유책으로 한족의 유가(儒家) 문화를 수용하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중화주의를 표방하는 ‘존왕양이(尊王攘夷)’나 ‘화이지변(華夷之辨)’ 등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을 구분하는 용어의 사용을 엄금하였고, 청나라에 불온한 내용을 언급하는 학자나 서적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청의 전성기인 강희ㆍ옹정ㆍ건륭 시기에 반청적인 중국 지식인들에 대한 대규모 탄압으로 나타났는데, 특히 건륭제 때에는 금서총목(禁書總目)이 공포되어 청 왕조에 대해 불순한 내용이 있는 서적의 출판과 소장 및 구독을 엄금하였으며, 반청 성향의 학자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과 제자까지도 함께 처형하였다.15


▲ 청 나라 변발의 변화, 위키백과.



  이처럼 변발과 호복의 강요와 민족차별 그리고 억압적 사상통제는 260여 년간 오랑캐에 정복당한 한족의 불만과 원한을 쌓이게 한 요인이 되었다. 대중화라는 자부심과 문화적 우월의식을 가졌던 중화민족이 교화의 대상이라 여겼던 오랑캐의 힘에 굴복하여 지배받게 되고, 오히려 그들의 문화를 강요받게 되어 한족은 큰 모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변발은 한족의 청나라 오랑캐에 대한 단순한 정치적ㆍ군사적 굴복을 넘어 대중화의 문화적 굴종(屈從)을 의미하는 치욕스러운 것이었다. 이에 대한 반발심은 청나라 말, 멸만흥한(滅萬興漢, 만주족을 멸하고 한족을 부흥시키자)을 내세우며 홍수전(洪秀全, 1814~1864)을 중심으로 태평천국 운동을 일으켰던 무리들 모두가 변발을 풀고 장발(長髮)을 했던 것에서 저항의 상징으로 표출되기도 하였다.




중국 해원공사 이후 신해혁명(辛亥革命) 발생

  청나라의 한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은 오랫동안 한인들의 불만과 갈등을 유발하였는데, 그것은 청 말기에 청나라 정부가 서양 세력의 침공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자 청 왕조에 대한 저항 세력의 결집과 함께 분출되었다. 먼저 청나라 말기의 상황에 대해 살펴보자.
  중국의 청일전쟁(1894) 패배 이후 열강에 의한 중국 분할의 위기가 고조되고 급기야 반외세를 외치며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자,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8개국 연합군16이 북경을 점령(1900)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 베이징 의정서(1901)가 체결되고 중국은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만 했고, 청나라 왕조는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해 국권이 위협받는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제국주의 열강에 대한 반대운동이 계속되었고, 중국의 부활을 위해 청조(淸朝)를 타도해야 한다는 각성과 함께 무능력한 청 왕조에 대한 혁명운동이 싹트게 되었다.
  이때 손문은 자신이 이끌던 흥중회(興中會)를 포함한 여러 혁명조직을 통합하고 1905년 일본에서 단일 혁명조직인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를 결성하였다. 그는 반청혁명을 목표로 만주족 축출과 중화(中華)의 회복, 공화국 수립, 토지소유권 평등을 제시하며 삼민(三民)주의를 체계화하였다.17 이후 중국동맹회는 중국 내 비밀결사 조직과 결탁하여 청 왕조 타도를 위한 무장봉기를 1905년과 1907년에 계획했으나 번번이 무산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제님께서 1908년 중국 해원공사를 실행하셨다. 상제님께서는 “대중화에 어찌 원한이 없겠나이까. 이제 그 국토를 회복하게 하심이 옳으리라 생각하나이다.”라고 한 덕겸의 대답에 무릎을 치시며 칭찬하시기를 “네가 재판을 올바르게 하였도다. 이 처결로써 중국이 회복하리라” 하시며 중국 공사를 처결하셨다.

  그동안 중국동맹회가 준비했던 무장봉기 계획은 번번이 실패하였으나, 혁명의 불길은 의외의 곳으로부터 치솟게 되었다. 중국 해원공사 이후인 1911년 철도 국유화를 반대하던 무창(茂昌)봉기가 발생하였는데, 이것이 묘하게도 청조(淸朝) 타도 운동으로 확산되었고, 결국 손문이 주도하는 신해혁명(1911)으로 이어지면서 청 왕조는 붕괴되고 말았다. 그리고 중화민국(中華民國)이 수립(1912)되며, 한족이 주도하는 국민당 정부가 들어섰다. 한족이 만주족의 풍속인 변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신해혁명으로 청조(淸朝)가 무너지고 나서였다.18 이후 국민당 정부는 지역의 군벌(軍閥)을 토벌하며 북벌을 완성(1928)하여 대부분의 중국 영토를 회복하였다.


▲ 호북 군정부가 수립되었던 자리에 세운 손문 동상과 신해혁명 기념박물관, 위키백과



나가는 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청나라 왕조가 변발과 호복 등 외형상 만주족의 풍습을 강요하는 한편 한족의 관리 등용에서의 차별과 ‘문자의 옥’이라 불리는 한족 문인에 대한 엄격한 사상통제를 통해 한족들의 내면까지 억압하였으니19 이로 인해 대중화의 자부심이 강한 한족은 청나라에 지배받는 동안 내면적으로 불만과 원한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오랑캐로 여기던 청나라에 정복되어 중화의 문화적 전통과 자존심이 훼손되고 짓밟혀 원한이 사무치던 상황에서,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통해 한인(漢人)들이 중국의 주권과 영토를 회복케 하시어 대중화의 원한을 풀어내고, 서양 세력의 침략에 무너져 가던 동양의 위기를 벗어나도록 하며, 이로써 중국을 안정화하여 우리나라가 부흥하는데 일조(一助)하도록 하신 것이 중국 해원공사의 요지라 하겠다.






01 “나는 물건(物件)이 많고 지역(地域)이 또한 넓음”, 『디지털 한자사전』.
02 『두산백과』, 「중화사상」 참고.
03 장현근, 「대중화주의와 신중화주의」, 『동북아역사논총』 56 (2017), p.299 참고.
04 『두산백과』, 앞의 글 참고.
05 조삼상, 「중화세계질서의 부활: 신화와 현실」, 『한국연구재단 연구보고서』 (2011), p.12.
06 『두산백과』, 「소중화주의」 참고.
07 “몽골인이나 만주인의 풍습으로, 남자의 머리를 뒷부분만 남기고 나머지 부분을 깎아 뒤로 길게 땋아 늘임, 또는 그런 머리”, 『표준국어대사전』.
08 장미숙, 「중국 청대 변발에 대한 한족의 저항 이데올로기」, 『대한미용학회지』 8-3 (2012), p.214 재인용.
09 장미숙, 같은 글, p.212 참고.
10 춘추시대 제나라의 재상으로 군사력을 강화하고 상업ㆍ수공업 육성을 통한 부국강병을 꾀하여 환공의 패업 달성을 도운 일등 공신(BC.716~BC.645)이다.
11 『논어』, 「헌문」, “子曰, 管仲相桓公, 霸諸侯, 一匡天下, 民到于今受其賜. 微管仲, 吾其被髮左衽矣.” 성백효, 『논어집주』, p.406 ; 피발좌임(被髮左袵): 머리를 풀고 섶을 왼쪽으로 하는 오랑캐 풍습.
12 이춘복, 「청대 만주본위의 민족정책과 문화충돌」, 『다문화콘텐츠연구』 12 (2012), pp.238~239 참고.
13 “뉘른베르크법(1935)은 독일 내 유대인의 독일 국적 및 공무 담임권 박탈에 관한 법으로 유대인과 독일인의 결혼 금지 등을 명시하며 훗날 유대인 학살의 법적 근거가 되었다.” 『시사상식사전』
14 이춘복, 앞의 글, p.233 참고.
15 『Basic 고교생을 위한 세계사 용어사전』 「문자의 옥」.
16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독일, 일본 등 8개국 연합군 2,000여 명이 자국의 공사관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북경에 진격하였다.
17 김기승, 『동아시아의 역사 3』, (서울: 동북아역사재단, 2011), p.140. 
18 장미숙, 앞의 글, p.212 재인용.
19 이춘복, 앞의 글, p.315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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