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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51년(2021)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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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문예 : 우리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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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대순문예공모전 산문부문 최우수


우리 엄마



금릉1-6 방면 평도인 신현경




  2021년 8월 2일, 나는 생모의 첫 기일을 지내려 울산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큰외삼촌께서 연락을 주셨다. 엄마 첫 제사이니 일정을 비우고 내려와 달라고.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여 서울역에서 기차를 탔다. 울산에 있는 절에서 외삼촌들과 낮에 제사를 지내고 봉안당에 가서 엄마를 뵈었다.



  나를 낳아준 엄마는 작년 8월 2일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그분의 얼굴을 모른다. 내가 2살, 그러니까 돌 지나고 한 달 후 언니는 4살이었을 때 부모님은 이혼하셨고 그 후 할머니가 우리를 키워주셨다. 고부갈등으로 헤어졌기에 할머니는 엄마에 대해 자식을 버리고 간 사람이라며 부정적으로 말씀하셨다. 언니는 엄마를 그리워했지만 나는 그런 언니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한 번도 엄마가 보고 싶지 않았다. 이란성 쌍둥이인 남동생과 나는 애초에 엄마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중학생 때인가? 이혼하고 혼자 사는 아주머니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어쩌다 집을 나오게 되었지만, 자식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어 항상 죄책감으로 살아간다고… 혹시라도 비슷한 환경의 청소년이 글을 읽고 있다면 나 같은 엄마를 꼭 용서해주었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살면서 한번은 엄마를 만나 말해주고 싶었다. 엄마가 안 계셨지만, 할머니와 아빠가 옆에 있었으니 죄책감에 시달리지 말고 편안하게 사셨으면 좋겠다고. 엄마에게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도 없이 요양원에서 홀로 눈을 감으셨다. 엄마는 오랜 시간 우울증을 앓다가 병이 깊어져 호스로 음식을 흡입하는 중이었다. 의사는 1~2년 정도는 더 살 것이라고 했는데 주무시다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서 처음으로 외가 친척을 만났다. 이모, 이모부, 큰외삼촌, 큰외숙모, 둘째 외삼촌, 둘째 외숙모, 한국에 있는 사촌 몇 명. 사촌들과는 어색했으나 어른들은 따뜻하게 맞아 주셨다. 이모부는 눈물을 글썽이며 너희 엄마가 쫓겨난 거라고, 혼자된 할머니가 아빠만 보고 살아서 엄마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거라고 하셨다. 큰외숙모는 “현진이는 첫 동생이라 오빠들이 참 예뻐했고 현경이 아기 때 동글동글 얼마나 귀여웠는지 몰라” 하셨다. 사촌들은 다 유학을 다녀왔고 사회에서 잘 나가고 있었다. 막내 외삼촌에게 외국에 있는 사촌들 이야기를 들었는데 막상 대면하니 주눅이 들었다. 우리 집도 부모님이 이혼하지 않았다면….
  외할아버지는 울산에서 공무원이셨고 5남매를 모두 공부시켜 서울에 있는 대학에 보냈다. 셋째였던 엄마는 굉장히 똑똑했고 야무졌다. 시험을 쳐서 부산에 있는 고등학교에 합격했고 열심히 공부하여 고려대 영문과를 나와 서울에 있는 명문 사립고등학교에서 선생님을 했다. 그때는 공립보다 사립학교 교사들이 더 대우받고 급여도 높았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는 만족하지 못하고 공부를 더 하려고 좋은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러던 차에 선을 봐서 아빠와 결혼했다. 아빠도 직급 있는 공무원이었지만 더 공부해서 성공하고 싶어 하셨다.





  할머니는 한국전쟁 때 아빠를 임신한 상태에서 초등학교 교사인 남편을 강원도에 남겨두고 (당시 공무원들은 그 지역을 지켰다고 한다) 시어머니와 시아버지, 어린 시숙과 시누이와 함께 충주로 피난 왔다.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나에게 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는 손주인 아빠를 장손이라는 이유로 애지중지하셨다. 하지만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이 급급했기에 아빠를 가르칠 여력은 없었다. 먹을 것이 너무 없어 시아버지가 쥐를 잡아 구워서 아빠에게만 먹였는데 고기 굽던 고소한 냄새가 지금도 기억이 난다고 할머니는 가끔 말씀하셨다.
  할머니는 아빠를 공부시켜야겠다고 마음먹고 4살 된 아들을 시어머니와 시아버지께 맡겨두고 연고도 없는 서울에 가셨다. 할머니는 식당에서 숙식하며 일해서 번 돈을 집으로 부치셨다. 1년에 1번, 충주에 내려와서 아빠를 보고 다시 올라가셨다. 말이 충주와 서울이지 지금으로 보면 한국과 미국만큼 멀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그 외롭고 고된 생활을 아빠가 대학에 갈 때까지 계속하셨다.
  아빠는 충주에서 손에 꼽힐 만큼 우등생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 삼수 끝에 예비고사에서 충청북도 수석을 했고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그 당시 라디오 인터뷰도 했다. 아빠는 범죄를 다루고 재판을 하는 일에는 흥미를 못 느꼈고 시험도 까다롭고 경쟁이 치열해서 진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셨다. 대학 졸업 후 회사에 다니다 적성에 안 맞아 그만두고 다시 공부하여 행정고시를 쳐서 사무관으로 일하셨다. 할머니는 부모로서 못 해준 것에 미안함이 컸던 건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항상 아빠가 선택한 길을 말없이 지켜보셨다.
  아빠는 공부만 하는 착한 샌님이라 세상 물정을 잘 몰랐던 것 같다. 친구 사이에서 눈치 없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아버지 없는 장손이라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채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또래보다 늦게 자리를 잡아서 서둘러 결혼을 했다. 연애 한번 안 해보고 동반자로서 괜찮겠다 싶은 엄마를 소개받아 살아보니 아빠는 엄마에게 정이 안 갔다고 한다. 너무 급하게 결혼했나 후회하셨다고 한다.
  엄마도 결혼 후 대학원에 다녔고 언니를 임신한 상태로 도서관에 다니며 공부를 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때는 할머니가 엄마의 도시락을 싸주었고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언니와 우리 쌍둥이를 낳고 기르느라 엄마는 박사 공부를 시작할 시기를 놓쳤다. 집에서 우리만 키우기 시작하면서 할머니와 엄마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 신여성이었던 엄마는 고생스럽게 살아 온 시어머니, 공부와 일 외에는 관심이 없었던 남편 사이에서 굉장히 힘들었을 것 같다.
  4년 전에 막내 외삼촌과 연락이 되어 몇 번 만났는데 옛날이야기를 해주셨다. 엄마 말이 아빠가 강의하러 갈 때 버스 타도 되는데 굳이 택시를 타면서 생활비는 빠듯하게 준다고, 책사고 음악 듣는 것에는 아끼지 않지만 다른 곳에는 마음을 안 둔다고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엄마는 참고 살라는 외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결심했고 외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 갔다.





  엄마는 뉴욕에서 영문학이 아닌 교육학을 공부했다. 막내 외삼촌도 그때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미국에 가 있었을 때라 가끔 엄마를 만났는데 자꾸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마음 한편에는 우리가 남아있었나 보다. 그 외로움을 견디며 독하게 공부해서 학위를 받았다. 한국에 돌아와 학원에서 강사 일을 했는데 많이 힘들었다고 했다. 당시 엄마, 막내 외삼촌, 외할머니 세 분이 같이 사셨는데 엄마에게 너무 힘들면 삼촌이 벌 테니 쉬라고 했다. 학원을 그만두고 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를 하기도 하고 다시 학원에서 일했지만 뜻하던 만큼 일이 풀리지 않았다. 외삼촌이 어느 날 엄마가 찬물에 커피를 타서 숟가락으로 젓는 것을 보았는데 그때부터 정신을 놓았던 것 같다고 했다. 엄마는 점차 심해져서 우울증이 왔고 혼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외할머니께서 요양원에 가실 때 엄마도 같이 입원하셨다.
  아빠는 늘 엄마는 재혼해서 자식 낳고 잘살고 있을 거라고 아마도 먼 발치에서 너희들을 보고 있을 거라고 말했다. 엄마가 힘든 시간을 보내왔고 지금도 그렇다는 것이 같은 여자로서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워 가끔 눈물이 났다. 아빠도 엄마의 소식을 듣고 많이 놀라고 미안해하셨다. 본인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해서.




  코로나19가 터지기 전에 외삼촌을 만날 때면 엄마 보러 요양원 갈 때 전해 달라고 카네이션 디퓨저나 작은 선물을 준비해갔다. 언니가 엄마를 보고 싶어 했는데 외삼촌은 엄마가 충격을 받을까 봐 안 된다고 하셨다. 외삼촌은 엄마가 사회에서 일이 뜻대로 풀렸다면 우리를 찾아왔을 거라고 하셨다.
  예전에 선각에게 우리 가족 이야기를 했을 때 부모는 낳아준 것으로 부모의 도리를 다한 거라 하셨다. 그때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는데 엄마가 아프다는 것을 안 뒤에야 무슨 뜻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예쁜 분홍색 종이에 ‘감사합니다’라고 쓰고 색칠해서 액자에 넣었다. 건강하게 낳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 만나지는 못해도 액자가 병실 벽에 걸리면 내 마음이 전해지겠지 생각했다. 외삼촌을 만날 때 엄마에게 전해드리려고 했는데 코로나로 면회가 불가했고 엄마는 돌아가셨다. 나는 그 액자를 엄마 영전 옆에 두었다.
  장례식은 가족들만 왔고 간단하게 치렀다. 염하고 입관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연한 노란색 수의를 곱게 입고 조용히 누워있는 조그만 몸집의 엄마를 보았다. 장의사가 망자 앞에서 한마디씩 하라고 했다. 언니는 잘 가라고, 외삼촌들은 편히 쉬라며 불쌍하다고 우는데 나는 눈물이 나오지 않아 곤혹스러웠다. 엄마와 정이 없었으니….
  큰외삼촌은 엄마의 젊은 시절의 사진과 우리 사진을 가져오셨다. 아가씨 때의 날씬하고 깍쟁이 같은 모습, 언니와 나와 동생을 안고 행복해하는 모습 등 여러 장의 사진이 있었다. 화장하고 작은 납골함에 담겨 온기가 남아있는 엄마를 안고 울산으로 향했다. 큰외삼촌은 엄마가 어제, 오늘 ‘엄마’ 소리를 많이 들어서 행복할 거라 하셨다.
  큰외삼촌과 헤어지기 전에 치성에 대해 말씀드렸다. 엄마를 위해 다 같이 상제님 전에 치성을 모시자고 했다. 삼촌은 엄마가 독실한 불교 신자여서 불교식으로 하려고 했는데 고민해보겠다고 하셨다. 그 후에 통화하니 큰외삼촌께서 외가 친척이랑 상의해보았는데 치성은 안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 섭섭한 마음을 선각들에게 말하니 큰외삼촌 입장은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하셨다. 자주 만나지도 않았고 치성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지 않냐고, 이제부터 꾸준히 정성 들이면 된다고 하셨다. 그래도 속상했다.
  도장에서 뜨거운 여름에 영농 작업을 하고 수호를 서며 상제님께 내 작은 공덕으로 엄마가 명부에서 삶을 심판받을 때 죄가 감면되게 해달라 심고 드렸다. 대순회관 앞에서 수호를 서는데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홀로 살아오신 할머니, 이혼과 재혼을 반복한 아빠, 자식이 그리워서 우울증에 걸린 생모, 도를 몰랐다면 이런 업보가 있는 집안에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었을까? 이렇게 건강하고 자유롭게 수호서고 수도할 수 있는 덕화에 너무 감사했다.
  도장에서 같이 수호서는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눴다. 외람된 표현이지만 웃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지난번에는 딸과 같이 수호를 왔는데 이번에 같이 못 와서 아쉽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일찍 결혼해서 딸 하나를 낳았는데 남편이 일을 안 하니 자기가 가장 노릇을 했다. 젊고 자격증도 있었지만 이런 나를 어디서 받아줄까 싶어서 식당 일을 했다. 종일 일했기에 어린 딸을 친정과 시댁에 번갈아 맡기며 키워서 딸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어느 휴일 아침, 딸을 데리러 시댁에 갔는데 딸이 멀리서 먼저 발견하고 “엄마” 하며 반갑게 뛰어오더란다. 그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서 울었다고 한다. ‘이렇게 부족한 엄마라도 좋아서 뛰어오는구나’ 생각이 들었다고.
  그 아주머니는 딸 때문에 수도를 더 힘내서 한다고 했다. 업보는 100% 대물림 될 텐데 내가 수도를 잘못하면 딸도 같이 힘들지 않겠냐며. 수호가 없는 날엔 쉬어도 되는데 연세도 있고 몸이 고단한데도 힘이 닿는 한 작업하려 하고 정성을 놓지 않으려는 마음이 느껴졌다. 입도하기 전에는 행복이 뭔지도 모르고 인상 쓰고 살았는데 이제는 정말 감사하다고 했다. 방면으로 복귀하기 전날 “앞으로 다가올 더 좋은 날들을 위해 화이팅이에요” 하며 아기같이 방긋방긋 웃는 그분을 그냥 만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마음 한구석에 묻어놓고 살았던 생모가 나름 그리웠나 보다. 내가 엄마와 보낸 시간이 금방 잊혀질 만큼 짧은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신의 세계에서 엄마는 어디쯤 계실까? 나는 엄마가 도장을 수호하는 신명이 되셨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려면 내가 수도를 열심히 해야겠지. 엄마의 첫 제사를 지내고 오니 내가 대순진리회에서 수도하는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에 감사했다. 엄마가 우리를 그리워한 마음을 가지고 돌아가셨다면 엄마의 영혼은 계속 번뇌 속에 있었을 테니까. 부족하지만 이렇게 정성 들이고 있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계시리라 확신한다.
  우리 집이 평범하고 행복하진 않았다고 생각한 나는 항상 피해의식에 쌓여 살아왔다. 이제 곧 불혹이 되는데도 아직 나는 애어른이다. 모든 것이 업보이고 나로부터 비롯된다는 교화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진정한 반성을 했을 때 성숙하려나. 내 아픔은 우주보다 크다며 핑계를 대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면 한심하지만, 차근차근 마음으로 정성 들여나가야겠다.
  수도한 지 15년이 되도록 수반 하나 없어 항상 막막하고 어두웠는데 내가 왜 이리 더딘 건지 알게 되어 다행이다. 내가 가진 환경에 감사한 마음을 가졌을 때 도인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거겠지, 선각은 내가 수반이 없는 것이 감사한 거라고, 만약에 그랬다면 깨달음 없이 교만해졌을 거라 해서 이해가 안 되었는데 이제는 그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래도 나는 한 번만 전생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살아온 모습을 돌아보면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알겠는데 기억이 안 나니 진심 어린 반성이 참 힘들다. 나 때문에 힘들었던 사람들의 고통을 본다면 나도 슬퍼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새벽같이 일어나서 몸을 움직이라면 부지런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남을 잘되게 하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이렇게 겁액과 업보가 많은 나를 수도인으로 살게 해주셔서 감사하다. 내가 도와 인연이 있어서겠지만 그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어릴 때 할머니는 이사하거나 아빠가 승진하고 차를 사면 고사를 지냈는데 좁은 부엌에서 솥 위에 시루를 얹고 그 벌어진 틈에 밀가루 반죽을 채워 넣고 종일 불 앞에 계셨다. 그렇게 직접 만든 떡을 큰방, 작은 방, 화장실, 현관, 거실 등등 곳곳에 나누어 놓고 초를 켜고 정성을 들이셨다. 그 떡이 달지 않아 잘 안 먹으니 할머니께 혼났는데 할머니의 그런 정성 덕분에 내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거겠지. 어디 그뿐이랴? 우리 조상님의 말 못 할 절실함과 선각들의 간절한 정성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사실 나는 글을 쓸지 말지 고민했다. 엄마의 첫 제사를 지내고 나에게 내적으로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고 무의식중에 잊고 살아왔던 엄마를 향한 미안함에 그분에 대한 글을 남기고 싶었다. 그러려면 나의 가정환경을 써야 하는데 좋지도 않은 어린 시절을 들추어낸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대순회보》에 실린 도인들의 수기를 보면서 위안이 되었고 수도에 힘을 냈던 것을 새기고 용기를 냈다.
  법수로 가족을 지키신 분의 글을 읽고 법수를 소중히 마시고 인연이 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3년 동안 포덕이 되지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은 도인의 이야기를 보고 나도 지인들을 만나고 꾸준히 교화하려 했다. 결혼 후 남편이 집을 나가서 혼자서 아이를 키우고 돈을 벌며 모든 것이 업보임을 마음으로 깨달았을 때 남편이 돌아와서 감사했다고 하시던 분, 어느 조그만 엽서 실린 짧은 글에 길가에 핀 꽃을 보아도 우리의 마음이 힐링이 되듯이 우리 조상님들도 우리를 보며 후천에 함께 갈 자손이라며 희망을 품지 않겠냐고, 힘들고 어렵더라도 좌절하지 말라고 한 도인의 글이 나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욕심만 부리는 나와는 다르게 도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상제님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나는 언제 그런 경지에 갈 수 있을까? 이제 지나온 날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다가올 더 좋은 날을 위해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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