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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51년(2021)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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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문화와 함께 읽는 전경 : 금년에는 농작물이 잘 되게 하리라

금년에는 농작물이 잘 되게 하리라



교무부 김현진




이해 七월에 이르러 쌀값이 더욱 뛰고 거기에 농작물마저 심한 충재가 들어 인심이 더욱 사나워지기에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신축년부터 내가 일체의 천지공사를 맡았으니 금년에는 농작물이 잘 되게 하리라”고 이르시니라. 이해에 비가 적절히 내리고 햇볕이 쪼이더니 들판에서는 온통 풍년을 구가하니라. (권지 1장 7절)


  위 구절은 1903년 음력 7월 쌀값이 폭등하고 농작물에 해충이 생겨 인심이 더욱 사나워지자 상제님께서 풍년이 되게 공사를 보신 내용이다. 여기 7월에 쌀값이 더 오른 이유가 무엇일까? 이와 관련된 권지 1장 5, 6절의 내용을 보면 상제님께서는 1902년 신명 공사에 의해 보리 수확이 없을 것을 미리 아시고 농부들이 고생스럽게 일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셨다. 상제님의 말씀대로 이듬해(1903) 봄의 기후는 순조로웠지만, 음력 5월에 내린 폭우로 보리농사는 흉년이 되었고 쌀값은 뛰었다. 당시는 농업 중심 사회였기 때문에 국가에서 흉년을 대비하여 쌀을 비축하고 있었고 보리농사의 흉년만으로는 쌀값이 크게 오르지 않는 구조였다. 그렇다면 권지 1장 7절에서는 어떤 연유로 그렇게 된 것인지 시대적 상황과 관련하여 상제님께서 풍년이 되게 해주신 배경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9세기 말~20세기 초 극심한 기후변화
  농사는 현재도 그렇지만 상제님 재세 시에는 기후 영향을 더욱 많이 받았다. 권지 1장 6절에 보면 1903년 봄에는 보리농사가 풍년의 징조를 보였지만 음력 5월 5일 내린 폭우로 흉년이 되었다. 이는 보리가 익어가는 추수기 무렵에 비를 맞았기 때문이다. 보리는 줄기 속이 비어있어 추수기에 비를 맞으면 병이 들어 수확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당시의 기후변화는 어떠하였을까?
  농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강우량을 보면 1771년부터 1914년의 평균이 1,581mm인데 1875년에는 2,308mm로 평균보다 훨씬 많은 비가 왔다. 그리고 1876년은 879mm로 평균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는 양이 내렸다. 1879년에는 3,148mm가 내려 평균 강우량의 두 배가 왔고 1887~1889년은 3년 연속 758~944mm로 매우 소량의 비가 내렸다. 전반적으로 19세기 말의 강우량을 보면 기상변동이 심하여 가뭄과 홍수가 빈번하던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기간의 기후 급변은 중국에서도 나타나 1870년대에 참혹한 가뭄으로 쌀값이 급등하고 재앙이 연속으로 발생하였다. 이 현상은 같은 시기 인도에서도 발생하였는데 두 나라에서 사망한 인구가 1,400~1,8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01
  우리나라에서는 기후변화로 1894년 제주도, 영남, 호남지역에 흉년이 났고 1895년에도 황해도를 시작으로 영남지방까지 극심한 흉년이 일어났다.02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4월 울릉도를 시작으로 전국에 흉년이 들었고 1898년에는 장마나 홍수로 인한 재난과 해충피해가 발생하였다.03 이런 상황은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시작하신 1901년에도 일어났다.




흉년으로 인한 피해
  1901년 극심한 가뭄으로 인한 흉년의 피해는 참혹하였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1901년 음력 8월 27일에 고종은 “이웃에 빌어먹자니 온 동리가 다 같이 굶는 판이고 관아에 호소하자니 고을에 전혀 저축이 없어서 아들이 아버지를 버리고 아버지가 아들을 버리며 늙은이와 어린 것들이 굶어 죽은 시체가 구덩이에 굴러다니고 건장한 젊은이들은 도적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미국인 저널리스트 앵거스 해밀턴(1874~1913)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1901년 흉년으로 경성의 20만도 못 되는 인구 중 2만 이상의 사람들이 빈곤해졌다고 하였다. 이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무리를 지어 다니며 공공연히 약탈을 자행하였으며 국가에서 대책을 마련하기도 전에 수천 명이 죽어 나갔다. 또한, 가뭄으로 황폐해진 지역의 사망자는 백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04
  1901년의 흉년으로 백성들이 굶주림에서 제대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1902년에 또 흉년이 들었다.05 이 시기는 권지 1장 5절에 상제님께서 농부들이 바쁘게 밭 갈고 보리를 심었으나 수확이 없을 것을 안타깝게 여기셨던 때이다. 이 당시 백성들은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 갓난아이를 업고 노인을 부축하며 먹을 것을 찾아다녔지만, 세금까지 내야 했다.06
  백성들의 사정은 1903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01년과 1902년의 흉년으로 먹을 것이 거의 없었고 사람들은 보리라도 수확해야 겨우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권지 1장 6, 7절처럼 보리가 흉작이 되고 다른 농작물에 벌레까지 생기자 쌀값은 더 올랐고 민심은 더욱 사나워졌다. 그렇다면 이때(1903년) 쌀값이 어느 정도 올랐을까? 상제님께서 주로 머무셨던 전북 정읍, 김제 지역의 쌀값에 대한 자료가 없어 정확한 가격은 알 수 없다. 그 대신 전북 남원, 전남 해남의 1903년도 상, 하반기 평균 쌀가격과 1903년 음력 7월 울산의 쌀 가격을 찾을 수 있었다. 세 지역은 전북과 같은 시기에 흉년이 들고 당시 문제가 되었던 백동화(白銅貨)07가 유통되지 않은 지역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쌀값을 비교해 볼 수 있다.08 울산은 경상도이지만 연평균 가격이 아닌 음력 7월의 가격이기 때문에 시기가 적절하여 두 지역의 쌀가격과 같이 유추해 보고자 한다.
  1903년 쌀값이 얼마나 올랐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흉년이 들지 않은 해의 쌀값과 비교를 해야 한다. 1897년부터 1902년까지는 지역마다 조금씩 흉년이 들었으므로 들지 않은 1896년의 가격과 같이 비교하였다.09 1896년의 남원, 해남의 상반기 쌀 1섬(현미 155kg)의 가격은 8냥, 9.25냥이었다. 1903년 남원과 해남의 상반기 쌀 1섬의 가격을 보면 27.4냥, 17냥이었다.10 울산은 1되(대략 1.6kg)를 기준으로 1896년에는 0.65냥11이었고 1903년에는 3.2냥12이었다. 흉년이 들지 않은 1896년과 흉년이 든 1903년을 비교하면 가격 폭등의 정도가 남원은 3.4배, 해남은 1.8배, 울산은 5배가 올랐다. 세 지역을 평균 내면 대략 3배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이를 지금의 물가 상승률 개념으로 보면 대략 300%가 오른 것이다. 현재 시세로 반영해 보면 쌀 20kg에 평균 55,000원 하던 것이 165,000원으로 폭등한 것이다. 1903년에는 연이은 흉년으로 상황도 열악하였는데 물가까지 턱없이 올랐으니 사람들의 인심이 사나워질 수밖에 없었다.




백성 구제의 한계
  1901년부터 이어지는 흉년으로 쌀값이 오르고 인심이 사나워지는 동안 대한제국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조선은 봄부터 쌀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 나라에서 쌀을 비축하였다가 빈민들에게 빌려주는 환곡제도를 운영하여 국가에서 쌀을 많이 저장하고 있었다.13 그러나 1894년 조세 금납화의 실시와 문란하던 환곡을 사환제(社還制)로 바꾸는 정책 때문에 국가에 저장된 쌀이 당시 1901년을 기준으로 대략 20만석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 양은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구비했던 쌀의 1/10 수준밖에 되지 않아 턱없이 부족하였다.14 사환제는 면·리에서 운영하며 자연재해로 흉년이 났을 때 빈민들에게 사환곡을 빌려주는 제도였다. 환곡과 달리 빌려준 쌀에 대한 손실분을 메우기 위해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고 이자율도 낮았다. 그러나 제도가 시행되고 나서 동학농민운동으로 전투가 잦아졌고 그로 인해 논과 밭이 피폐해지고 흉년이 거듭 이어져 사환곡을 모으기가 어려웠다. 조금이라도 모아놓은 사환곡은 의병에게 뺏기거나, 나라에서 재정의 필요에 따라 쌀을 소비했으므로15 백성을 구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또한, 조세 금납화로 쌀, 콩, 베, 무명 등으로 받던 세금을 화폐로 수령하였기에 나라에도 쌀이 없었다.

  이에 정부는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부자나 상인이 가진 곡식에 의탁하려 했으나 강제 개항 이후 상인이 가지고 있던 쌀은 일본, 중국, 러시아 등으로 수출되어 나갔다.16 당시 국외로 나가는 쌀은 국내 소비량보다 많았고 그나마 남아있던 쌀은 부패한 관리들이 세금을 명목으로 약탈하는 경우가 많았다. 향읍(鄕邑)의 유지들도 100섬 넘게 축적한 경우는 많지 않아17 민간이 가진 쌀도 여유가 없었다. 고종은 국외로 유출되는 쌀을 막기 위해 일본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1901년 8월에 방곡령(防穀令)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계속된 압박과 원활한 국제무역을 위해 1901년 음력 10월에 방곡령을 해제하였다. 이로써 그나마 남아있는 쌀마저 빈민들에게 돌아가지 않았고, 백성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서 추운 겨울을 나야 했다.18
  백성들의 피해가 심각해지자 고종은 국가재정을 관할한 내정원을 통하여 프랑스 상인과 교역하여 안남미(베트남쌀)를 수입하였다.19 내정원은 상인에게 국내산 쌀보다 싼 값으로 시장에 풀게 하였고 나머지는 관할 군(郡)에서 안남미를 신청하면 빌려주는 방식으로 하였다. 하지만 국내산 쌀보다 싸게 팔아도 돈이 없는 빈민들은 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관할 군을 통해서 쌀을 빌리는 방법은 담보인을 설정해야만 가능하였고, 쌀을 제때 갚지 못하면 해당 군의 수서기(首書記: 지방관아에 속한 서기들의 우두머리)를 잡아 독촉하였기 때문에 안남미를 취소하는 군도 있었다.20




  국가에서는 여러 정책을 취하였으나 백성을 구휼하기에 한계가 있었고, 1901년부터 이어진 흉년과 함께 보리마저 수확이 없게 되자 인심이 극도로 사나워졌다. 이러한 때에 상제님께서 금년에는 농작물이 잘 되게 하리라고 하셨다. 이후 1903년의 벼 수확량에 대한 정확한 통계 자료는 찾을 수 없지만 『승정원일기』에 풍년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종이 금년 농사가 풍년이니 인심이 쾌활하겠다고 하자,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는 비서원 유진필이 이르기를 “벼는 대풍이라고 할 만하여 민심이 매우 즐거워합니다.”21라고 하였다. 이처럼 연이은 흉년으로 백성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나라에 곡식과 제대로 된 대책이 없어 고통이 극에 달하였을 때 상제님께서 공사를 보심으로써 백성들은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01 전송호, 「18-19세기 조선의 기후, 작황, 가격의 변동에 관한 연구」, 『농촌경제』 제25권 제2호(2002), pp.4-5.
02 『고종실록』 고종 31(1894) 9. 17; 고종 32(1895). 2. 10.
03 남슬기, 「대한제국기 혜민원의 설치와 운영」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12), p.8.
04 앵거스 해밀턴, 『러일전쟁 당시 조선에 대한 보고서』, 이형석 옮김 (경기: 살림, 2010), pp.291-292.
05 『승정원일기』 고종 39(1902) 음력 12. 6.
06 『승정원일기』 고종 39(1902) 음력 2. 26.
07 백동화는 1892년부터 1904년까지 만들어서 유통한 화폐이다. 백동화는 만드는데 5푼이 든다면 화폐로써 유통되는 것은 2전 5푼으로 주조 이득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국가뿐만 아니라 개인이 불법으로 만들거나 밀수입까지 성행하여 많은 백동화가 시장에 쏟아져 나왔다. 백동화의 가치는 떨어지고 물가는 올라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였고 물가가 7배가량 올라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졌다. 박선희, 「일제의 화폐 정리 후 금융기관의 공간적 분포와 변화」, 『한국도시지리학회지』 제6권 2호 (2003), pp.90-91. 
08 『승정원일기』 고종 40(1903) 음력 6. 27, 『승정원일기』 고종 40년(1903) 음력 6. 30, 국사편찬위원회, 『화폐와 경제활동의 이중주』 (서울: 두산동아, 2006), pp.143-145.
09 『승정원일기』 고종 33(1896) 음력 9. 22.
10 이영훈, 전성호, 「미가사 자료의 현황과 해설」, 『고문서연구』 18 (2000), p.144.
11 전성호, 『장서각 수집 물가사 자료 해제 및 통계』(서울: 민속원, 2008), p.252.
12 전성호, 같은 책, p.243.
13 전송호, 앞의 글, p.14.
14 박성준, 「대한제국기 진휼 정책과 내장원의 곡물 공급」, 『역사학보』 218 (2013), p.272.
15 송찬섭, 「한말 사환제의 성립과 운영」, 『한국사론』 42권 0호 (1999), p.805, pp.825-826, pp.832-833 참조.
16 김기성, 「개항기 미곡 시장과 관리 방식의 변화」, (고려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20), pp.273-274.
17 『승정원일기』, 고종 38(1901) 음력 8. 28.
18 김기성, 「대한제국기 흉년과 미곡 수급」, 『사학연구』 128 (2017), p.361.
19 박성준, 앞의 글, p.278, p.285.
20 박성준, 같은 글, pp.289-295.
21 『승정원일기』 고종 40(1903) 음력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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