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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51년(2021)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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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 중양절의 원혼 위무와 치성

중양절의 원혼 위무와 치성01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차선근




1. 중양절의 양면: 강한 활동력, 그리고 두려움
2. 동아시아의 중양절 풍습
3. 한국 중양절에서만 나타난 원혼 위무 풍습
4. 중양절 치성과 조상 해원
5. 정리하며



  음력 9월 9일은 중양절(重陽節)이다. 이날은 국화 향이 가득한 가을의 정취를 즐기는 잔칫날이었다.02 그런데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한국의 중양절은 객사했거나 기일을 모르는 조상 또는 원혼(冤魂)을 기리는 날이기도 했다.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한국에서만 이런 독특한 풍습이 있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1. 중양절의 양면: 강한 활동력, 그리고 두려움


  홀수는 1·3·5·7·9, 짝수는 2·4·6·8·10이다. 짝수는 짝이 있기에 안정을 이루었다고 여겨져 음적(陰的)인 속성을 갖는 음수(陰數)로 규정된다. 음수는 우수(偶數)로도 불리는데, 우(偶)는 짝을 지었다는 의미로서 안정된 음의 속성을 나타낸다.03 이에 비해 홀수는 짝이 없거나 부족하니 불안정하다고 여겨져 양적(陽的)인 속성을 갖는 양수(陽數)로 규정된다. 양수는 기수(奇數)로도 불리는데, 기(奇)는 기이하고 충동적이라는 의미로서 활달한 양의 속성을 나타낸다.04
  음은 정적이고, 양은 동적이다. 양이 왕성하면 차분함이 줄어들고 활동력이 증대된다.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양수가 모이는 날인 1월 1일,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 9월 9일을 명절로 취급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1월 1일은 설날[新元, 元日, 正日], 3월 3일은 삼짇날[踏靑節, 重三, 上巳], 5월 5일은 단오[天中節, 重五], 7월 7일은 칠석[七星날], 9월 9일은 중양절[重九]이다.
  양수의 크기가 크면 그 힘은 더 커진다. 그런 양수가 겹쳐지기까지 한다면 더더욱 커진다. 그런 식으로 해서 가장 커진 날이 바로 9월 9일이다. 이 때문에 1월 1일,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 9월 9일은 모두가 양이 겹친다[重陽]는 의미의 중양절이지만, 실제로 중양절이라고 불려온 날은 9월 9일 하나뿐이다.
  9월 9일은 양기가 가장 왕성하므로 편안함이나 느긋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날은 생명력과 생동감이 넘친다. 그 활발한 힘은 최고점에 이른 극강(極强)의 경지다. 그래서 그 과도함은 불안함과 불편함, 때로는 두려움까지 줄 수 있다. 산에 오르고 국화주를 마시는 9월 9일의 풍습, 나아가 한국에서 중양절에 원혼을 위무하는 것까지도 모두 이 두려움과 관련이 있다.



2. 동아시아의 중양절 풍습


  중양절은 고대 동아시아에서 9월에 천제(天帝)와 조상에게 풍년제를 지낸 것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고 하나,05 실제 그 풍습은 후한(後漢) 시대에 나온 것이다. 『형초세시기』에 실려있는 그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선에게 도술을 배운 비장방(費長房)06은 환경(桓景)이라는 자에게 9월 9일에 그대의 집에 큰 재앙이 닥칠 것이니 급히 식구들에게 붉은 주머니를 만들게 하여 그 안에 수유나무 열매를 넣고 팔에 묶은 뒤, 높은 곳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라고 방책을 일러주었다. 환경이 그의 말을 따라 식구들과 함께 산 높이 올라갔다가 저녁에 집에 돌아와 보니, 집에서 기르던 개와 닭들이 모두 죽어 있었다. 비장방은 환경에게 이 가축들이 식구들 대신 재앙을 당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로부터 9월 9일에 수유 열매 주머니를 차고 산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는 풍습이 생겼다’.07


▲ 『형초세시기』에 실린 중양절 기사





  이처럼 산에 오른다거나[登高] 수유 주머니를 찬다거나 국화주를 마신다거나 하는 중양절의 풍습은 비장방이 재앙을 피하라고 일러준 방책들에서 비롯되었다. 등산·수유·국화는 재앙과 공포, 두려움을 면하게 하는 제액(除厄)과 벽사(辟邪)의 기능을 가졌다는 것이고, 중양절도 여기에서 출발한 명절이었다는 뜻이다.
  시간이 흐르자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책이었던 중양절 풍습의 의미는 점차 퇴색했다. 대신 산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고 국화 향을 즐기는 잔칫날이 중양절이라고 여겨졌다. 여기에 재물신 혹은 술을 빚는 항아리 신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조상에게 성묘하는 관습까지도 추가되었다. 9가 한 자리의 숫자 가운데 가장 높은 수이다 보니 장수(長壽)를 의미하는 것으로도 받아들여져, 9월 9일은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날로 인식되기도 했다.08 지난 2012년에 중국 정부가 중양절을 ‘노인의 날[老年节]’로 지정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중양절 풍습은 한국 삼국시대에 유입되었다. 한국에서도 중양절은 중국과 같이 산을 오르고 수유 주머니를 차며, 국화주를 마시고 국화떡을 먹으며, 조상 성묘를 하고, 성주단지에 햇곡식을 갈아주며 성주 차례를 지내는 날이었다.09 일본에도 중양절 풍습이 들어갔다. 그 시기는 대략 9∼11세기 헤이안 시대로 추정되며, 중국의 경우처럼 국화주를 즐기곤 했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중양절은 중국 중양절과 완전히 같은 게 아니다. 한국과 일본은 중국 중양절 풍습에 각자의 고유한 색채를 덧씌워 중국과는 다른 문화를 더 발명하고 즐겼다.
  일본에서는 중양절에 ‘쿤치(くんち)’, ‘히나(雛, ひな)’와 같은 마츠리[축제, 祭り]를 개최한다는 데에서 구별점이 있다.10 쿤치는 9일이라는 뜻의 일본어 ‘쿠니치[九日, くにち]’에서 나온 말이다. 쿤치 마츠리는 9월 9일 또는 그 전후의 날짜에 맞춰 나가사키·후쿠오카·가라쓰 등지에서 벌어진다. 이때 일본인들은 신사에 참배하고 동물이나 배를 장식한 수레들을 끌고 다니며 춤을 춘다. 히나는 인형 또는 어린 병아리를 의미하는 일본어다. 히나 마츠리는 여자아이의 안녕을 기원하고 미래를 축복하기 위해 붉은 천으로 덮은 5단 또는 7단의 제단[히나단(ひな壇)이라고 부름]에 여러 인형과 음식을 올려 장식하는 축제다. 원래 이 행사는 봄인 3월 3일에 하는 것이 원칙이나 중양절에도 한다. 그래서 중양절의 히나 마츠리는 ‘가을의 히나(秋の雛)’라고 불린다. 이런 마츠리들은 중국에서 볼 수 없는 일본만의 고유한 중양절 풍습이다.




  한국에서는 중양절이 잔칫날임에도 불구하고, 조선 시대에는 이날 구일제(九日製)라는 과거를 치렀다. 남들은 국화주를 마시고 놀 때, 성균관을 비롯한 전국 서원의 유생들은 일생을 건 진지한 시험을 봐야 했던 것이니, 유학을 숭상했던 조선의 통치가 중양절 풍습에도 영향을 준 것이다. 또한 한국의 중양절은 기일을 모르는 조상, 객사 했거나 또는 연고자 없이 떠돌다 죽었거나 전염병으로 죽었던 망자의 제사를 지낸다는 점에서 중국 또는 일본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이러한 제향 대상들은 모두 원혼이다. 따라서 유독 한국에서만큼은 원혼을 위무하는 풍습이 중양절에 있었다. 이런 인식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백성의 안위를 위하여 천년 사직을 접고 나라를 고려에 바친 신라 마지막 국왕 경순왕(敬順王, ?∼978)을 위무하는 원주 경천묘(敬天廟) 제향, 해양 사고로 목숨을 잃은 선원들을 추모하는 부산 영도의 순직 선원 합동 위령제11를 중양절에 지내는 것이 그 사례다.




3. 한국 중양절에서만 나타난 원혼 위무 풍습


  동아시아에서 중양절은 노는 날 성격의 유쾌한 날로 내려왔지만, 한국에서만큼은 원혼이나 원한 같은 음산한 이미지까지 더 가진 날이었다. 이 사실은 중양절 풍습이 두려움에서 발원한 것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원혼이 해를 끼치는 존재라고 믿었고, 그들의 원한을 풀어 저승으로 보내려고 했다. 그러니까 원혼을 위무하는 중양절 풍습은 원혼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한 노력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문제는 전해오는 문헌 기록이 없어 상고(詳考)할 수 없다. 부득불 이 글에서는 조상 제사 그리고 원혼이 구천에 하소연하는 두 가지의 측면으로 우회하여 이 문제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1) 중양절과 조상 제사

  한국 중양절은 8월의 주요 명절인 추석과 10월의 주요 풍속인 묘사(墓祀, 또는 時祭나 時祀라고도 한다) 사이에 낀 날이다. 주지하듯이 8월 추석에는 4대까지의 조상에게 차례를 올린다. 10월 묘사 때는 5대 이상 조상의 묘소를 직접 방문하여 제사를 지낸다. 8월과 10월의 제사 대상에는 사고로 죽은 망자, 기일을 모르거나 객사한 망자, 후사가 없이 죽은 망자 등의 원혼들이 대개 제외된다. 일반적으로 이 원혼들은 정상적인 제사를 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제사를 받지 못하던 소외된 원혼을 위한 제사가 8월의 추석 제사와 10월의 묘제 사이인 9월에 열리게 되었던 게 아닌가 하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런 추정을 확인하기 위해 중양절에 원혼을 위무하지 않는 중국과 일본이 조상 제사를 언제 지내는지 살펴보자.
  중국에서 음력 1월 1일 설날은 조상에게 차례를 올리는 날이 아니다. 대신 이날을 춘절(春节)이라 하고, 한 해의 시작을 기념하며 가족과 이웃의 화합과 친목 도모를 위주로 한다. 음력 8월 15일 추석 중추절(中秋节)도 명절이기는 하나 보름달에 제사를 지내고 월병을 먹으며 가족의 화합을 도모하는 데 치중할 뿐 조상을 기념하고 공양하지는 않는다. 중국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날은 구절(鬼节)이라고 불리는데 봄의 청명절(清明节), 음력 7월 15일의 중원절(中元节), 음력 10월 1일의 한의절(寒衣节)이 대표적이다. 청명절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성묘를 하는 날이며, 중원절은 조상이 내려온다고 믿고 그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날이고, 한의절은 다가오는 겨울에 조상들이 추위에 떨지 않도록 두툼한 겨울옷을 태워 올리는 날이다.
  일본에서 조상을 모시는 날은 정월인 오쇼가츠(お正月), 오봉(お盆), 춘분, 추분이다. 오쇼가츠에 조상을 직접 모시지 않지만, 일부 지방에서는 그 시기에 모셔지는 토시가미(年神, としがみ: 오곡을 지키는 풍작의 신)를 조상으로 믿고 공양한다. 오봉은 백중(한국에서는 음력 7월 15일)으로서, 이날 조상의 영혼이 자손을 찾아온다고 하여 추모한다. 일본에서는 모든 행사를 양력으로 진행하기에 오봉은 대개 양력 8월 15일 전후에 열린다.12 춘분과 추분을 전후한 7일은 히간(彼岸, ひがん)으로 불리는데,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은 이 기간에 저승의 문이 열린다고 생각하여 조상의 혼령을 공양하고 위로한다.
  중양절을 중심으로 한중일 삼국이 조상과 망자를 추모하는 시기를 나타내보면 <표 1>과 같다.


▲ <표 1> 중양절을 전후로 한 한중일 삼국의 조상 공양 풍습



  한국에서 중양절은 추석과 묘사 사이에 위치하기에, 조상과 망자를 받들고 위무하는 시간이 ‘8월-9월-10월’이라는 연속성을 보여준다. 8월에는 4대 조상 이하, 10월에는 5대 조상 이상을 그 제향 대상으로 삼고, 그 중간인 9월에는 8월과 10월의 제사에서 모셔지지 못하는 조상과 망자(원혼)를 모아 위무함으로써, 제향에서 빠지는 존재가 없게 하는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중국에서 중양절은 중원절과 한의절 사이에 위치하나, 조상을 받드는 시간이 ‘7월-9월-10월’로서 한국보다는 연속성이 떨어진다. 일본도 오봉과 추분 히간인 양력 8월(음7월)과 양력 9월(음8월)에 조상을 모시지만, 그 시간은 한국만큼의 연속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처럼 한국 중양절은 중국이나 일본의 중양절과 달리 시간적인 연속성, 제향 대상의 구분과 완결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만약 한국 중양절이 제향을 받지 못하는 망자와 원혼을 기리는 날이 아니었다면 이런 완결된 구조를 보여주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맥락을 고려한다면, 한국인들은 8월에 4대까지 조상을 모시고, 10월에 5대 이상의 조상을 모시며, 여기에서 소외되는 망자와 원혼을 모아 8월과 10월의 사이인 9월에 모시려고 했던 게 아닌가 추정할 수 있다.



(2) 중양절과 원혼의 하소연

  중양절은 9월 9일이다. 9가 2개다. 이 2개의 9로부터, 중양절에 원혼을 위무하는 상징을 하나의 이미지로 표현할 수 있다고 본다.
  숫자 9는 한 자리의 자연수 가운데 가장 큰 숫자이니만큼 하늘의 숫자[天數]이자 성스러운 숫자[聖數]로 인식되었으며, 그에 따라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게 되었다. 그것은 9가 건곤(乾坤)인 일건천(一乾天: ☰)과 팔곤지(八坤地: ☷)가 합쳐진(1+8=9) 우주 완성의 숫자라는 것, 그러하기에 천명(天命)을 전하는 숫자라는 것, 하늘의 도움을 받아 재앙을 물리치는 숫자라는 것, 양의 극치이므로 강력한 힘을 가졌으며 그 힘으로써 답답하게 막혀있던 형국을 깨고 만사형통시키는 숫자라는 것, 우주와 도(道)의 완성을 상징하는 숫자라는 것, 자연과 인간을 조화시키는 숫자라는 것 등으로 정리된다.13 9월 9일은 이러한 9의 숫자가 갖는 힘과 상징이 가장 강하게 표출되는 날이라고 할 수 있고, 원혼의 원한은 그 강력한 에너지에 편승하여 풀리도록 유도될 수 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9월의 9일이라는 2개의 ‘9’ 상징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여겨지는데, 구천(九泉)의 ‘9’와 구천(九天)의 ‘9’가 바로 그것이다.
  구천(九泉)이란 불행하게 죽은 원혼이 안착하지 못하고 떠돈다는 관념을 내포한 용어인데, 이것은 세종 시절에도 이미 보인다.


세종이 하교하기를 “… 이제부터 나의 법을 맡은 내외 관리들은 옛일을 거울로 삼아 지금 일을 경계하여 정밀하고 명백하며 마음을 공평하게 하되, … 죄수가 쉽게 자복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옥사(獄辭)가 빨리 이루어지기를 요구하지 말며, 여러 방면으로 힐문하고 되풀이해 찾아서, 죽는 자로 하여금 구천(九泉)에서 원한을 품지 않게 하고[使死者不含怨於九泉], 산 자로 하여금 마음속에 한탄을 품음이 없게 하라. …”14


  구천(九泉)은 죽은 뒤에 넋이 돌아가는 저승인 황천(黃泉)으로서 지하의 아주 깊은 곳인 구지(九地)와 같다.15 구지(九地)의 반대는 하늘의 가장 높은 곳으로서 구천(九天)이다.16 한국에서 구천(九天)은 하늘님이 거주한다고 믿어졌던 곳이다.17 동아시아에는 오래전부터 하늘을 아홉 개의 겹[九重天]으로 보는 믿음이 전해지고 있었고18 한국에서도 하늘의 가장 높은 곳을 구천(九天)으로 부르고 있었는데, 그곳은 하늘님이 거주하는 곳이므로 무언가 큰 원망이 있을 때 호소하는 대상이 되기도 했다.19 예를 들면 효종이 승하하자 그의 죽음을 애도한 「애책문(哀冊文)」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임금이 상을 치를 때[居喪]는 다섯 달 동안 여묘(廬墓=侍墓)를 살아야 하는데, 효성스러운 생각이 끝이 없어 예법을 남김없이 갖추었다. 깊은 슬픔에 젖은 수척한 얼굴을 우러르니 몸을 얽고 있는 베로 만든 상복[麻絰]이 참담하기만 하다. 구천(九天)을 향하여 목놓아 외쳐도 들리지 않으니 하루에 세 번 문안드릴 날이 이제 없는데 어찌할거나. 아! 슬프다.20


  이처럼 하소연할 곳은 하늘님이 기거하는 가장 높은 하늘인 구천(九天)이었다. 구천(九天)은 구천(九泉)과 발음이 같다. 구천(九泉)은 원혼이 떠도는 곳이고 구천(九天)의 정반대 위치로서 땅의 가장 낮은 곳이기도 하다.
  ‘’천(九泉)을 헤매는 원혼이 ‘’천(九天)의 지고한 하늘님에게 자신의 원한을 하소연하는 모습, 바로 이 이미지를 9월과 9일이라는 2개의 9로부터 연상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전통 시대 한국의 백성들이 9월 9일의 숫자 9가 2개인 것을 깨닫고, 바로 거기에 구천의 원혼이 구천에 하소연한다는 상징을 부여한 후, 하늘님에게 하소연하는 원혼을 조금이라도 위무하기 위해 어떤 풍습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그것은 지나친 억측이다. 다만 이 글은 9월 9일의 숫자 9로부터 그런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는 것만 말하려고 한다. 이것만으로도 9월 9일의 중양절에 원혼을 위무하는 풍습이 존재하는 배경을 이해하는 데 조금의 도움은 되리라 본다.



4. 중양절 치성과 조상 해원


(1) 중양절 치성

  현대 한국에는 많은 풍습이 사라졌다. 삼짇날이나 단오절, 칠석날 행사도 대개 지자체 중심으로 할 뿐이고, 백성(지금은 국민)의 삶에서 이들 풍습은 멀어진 지 오래다. 중양절 풍습도 현대에는 거의 남은 게 없다. 중양절을 기념하여 국화주를 마시거나 수유 주머니를 차는 일도 없고, 이날 특별히 산에 오르지도 않는다. 중양절에 원혼을 위무하던 풍습도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
  그런데 도전님께서는 중양절에 치성을 모시라고 명하셨다. 이 치성은 도전님 명에 의해 제주도에 도장이 건립된 이후21 그곳에서 실시되어왔다. 도전님께서는 “제주도가 전 세계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고 한 맺힌 곳이다. 바람이 들어오는, 모든 것의 관문이다.”,22 “제주도에 비바람 많은 것도 역시 귀양 가서 한 맺힌 신들의 눈물 때문이다.23 제주도도 예로부터 귀양지였다. 한 맺힌 신들이 많다.”24라고 훈시하셨는데, 이 말씀들은 원혼을 위무하는 치성이 제주도에서 실시된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양절 치성은 비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한 망자를 위무해 온 한국의 전통적인 중양절 풍습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의할 점은 치성이 원혼을 불러 모아 그들을 위무하기 위해 음식을 베풀어 먹게 하는 행사가 아니라, 구천의 상제님께 올리는 제사라는 사실에 있다.25 그렇다면 중양절 치성은 앞서 말한 대로 구천을 떠도는 망자와 원혼이 그들의 해원을 위해 구천의 하늘님께 하소연하는 이미지를 보여준다는 것, 도인들도 상제님께 치성을 드리며 그런 원혼들을 위로하는 행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중양절 치성은 구천을 떠도는 원혼을 위무하기 위해 제물을 차려놓고 그들을 위해 의례를 열어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의 최고신이신 상제님께서 원혼을 직접 위로하고 그들의 원한을 풀어주시니 그로써 세상에 원한이 사라지고 재앙과 탈이 없는 평화가 도래하므로, 그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여는 의례다.



▲ 제주도 성산일출봉



(2) 중양절과 조상 해원

  원혼을 위무하는 중양절과 관련하여 반드시 짚어둘 게 하나 있다. 그것은 한국 중양절이 집을 떠나 죽은 날짜를 모르는 조상의 제사나, 연고 없이 떠돌다 죽었거나 전염병으로 죽은 망자의 영혼을 위무하기 위한 제사를 지내는 날이었고, 대순진리회도 도전님 명에 의해 중양절 치성을 올리지만, 그러나 그날은 도인들 각자가 별도로 원혼을 불러내 위무하는 날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순진리회는 중양절에 오직 상제님께 치성을 올리기만 한다. 중양절은 구천을 떠도는 원혼들이 구천의 상제님께 하소연하여 해원하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러한 중양절에 상제님께 올리는 도장의 치성을 떠나서, 각자의 원한 맺힌 조상이나 원혼을 ‘따로’ 불러내 위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나아가 도인들은 조상 해원식이나 조상 천도식 같은 것도 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해원을 주관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해원신(解冤神)이신 상제님뿐이시기 때문이다. 상제님이시라야 만고의 모든 원한을 풀어주실 수 있다.26 따라서 중양절에 원혼을 위무하기 위해서는 오직 도장에서 상제님께 치성을 올려야만 한다.
  상제님께서는 1901년부터 1909년까지 9년 동안 천지의 도수(度數)를 정리하고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의 원한을 풀고 상생의 도로써 후천의 선경을 세워 세계 민생을 건지시고자 개벽공사를 이미 마무리하셨다.27 이로써 상제님께서 짜놓으신 도수에 따라 만고의 원한은 풀려나가게 되어 있다. 이것이 대순진리회의 믿음이다. 그러므로 조상이나 원혼의 해원과 천도(薦度)는 상제님의 도수에 따라야만 하고, 그것을 펼치시는 분은 오직 상제님으로부터 종통을 세우시고 계승하신 도주님과 도전님뿐이시다. 도인들은 도전님께서 정해주신 기도(예를 들어 1984년의 6·25 민간인 호국영령 해원 대기도회28)나 중양절 치성 외에 임의로 조상이나 원혼을 해원하기 위한 특별한 의례를 행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순진리회에서 도장 치성을 떠나 조상을 해원하는 사적 의례는 금지되어 있음에도, 과거 어떤 사람이 조상을 해원할 목적으로 별도의 의례를 행한 적이 있었다. 도전님께서는 그에게 큰 벌을 내리셨다. 이것은 주지된 사실이다.29
  상제님을 신앙하는 다른 어느 교단은 ‘조상 해원 천도식’을 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순진리회의 신앙과 의례가 아니다. 도전님께서는 “여러분이 도에 들어온 것은 조상 덕이다. 조상들이 적선적덕(積善積德)을 한 덕으로 자손들이 도에 들어온 것이다. 그런 조상들을 어디 가서 해원시키느냐? 그런다는 사람은 도에 운이 없고, 도에 못 들어올 사람이 들어온 것이다.”라고 훈시하셨다.30 그러니까 조상들이 천상계에서 60년 동안 공에 공을 쌓은 덕분에 그 자손들이 입도하여 수도하는 것이고,31 그 수도는 조상과 함께 하는 것이니, ‘입문과 수도는 조상의 공덕 때문에 가능한 것이요, 곧 조상의 해원인 것’이다. 상제님의 도문에 들어와 상제님의 도를 닦고 있는 대순진리회 도인의 현재 모습 그 자체가 바로 조상 해원이라는 말이다. 물론, 수도를 잘해서 도통까지 받아야 완전한 조상 해원이 될 것임은 당연하다.



5. 정리하며


  지금까지 다가오는 9월 9일 중양절에 주목하여 관련되는 몇 가지의 이야기를 풀어보았다. 그것을 요약하자면, 한국에서는 중양절에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는 잔치를 즐기면서도 원혼을 위무하기도 했었다는 것, 오늘날 도전님께서는 중양절에 치성을 올리라고 명하셨는데 그 치성은 원혼을 위무하는 성격을 가진다는 것, 그러나 그 치성은 근본적으로 상제님께 올리는 제사라는 것, 그것은 9월 9일 중양절에 9천을 떠도는 원혼들이 9천의 상제님께 하소연하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 도인 각자의 조상 천도나 원혼 해원은 상제님의 도를 잘 닦는 데 달렸을 뿐이며 도장 치성에서 벗어난 별도의 사적인 의례를 통해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중양절은 해마다 오는 날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저런 이유로 중양절 치성에 참여하기는 어렵더라도, 그날의 풍습과 치성의 의미만큼은 되새기는 날이 되었으면 한다.






01 이 원고는 차선근, 「한국 종교의 해원사상연구」(2021) pp.46-49, pp.127-129를 기반으로 삼아 내용을 수정·보강한 것이다.
02 중양절의 유래와 풍습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할 수 있다. 교무부, 「아름다운 세시풍속: 중양절(重陽節)」, 《대순회보》 76 (2007), pp.97-99.
03 『漢韓大辭典』 1 (서울: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2000), pp.1247.
04 『漢韓大辭典』 3 (서울: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2000), pp.1026-1027.
05 https://baike.baidu.com. “重阳节” 참고.
06 비장방은 후한시대 하남성 여남현(汝南縣)의 관리였는데, 어느 날 우연히 시장에서 어떤 신비한 노인[壺公]을 만나 도술을 배웠다. 그는 신선이 되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어느 정도의 술법을 구사할 수 있어서, 속세에 돌아와 병을 치료하고 재난을 막는 등 많은 이들을 구제해주었다고 한다. 마노 다카야, 『도교의 신들』 (서울: 들녘, 2001), pp.398-402; 쫑자오펑, 『도교사전』, 이봉호 외 옮김 (서울: 파라아카데미, 2018), p.149.
07 宗懍(撰)/杜公瞻(注), 『荊楚歲時記』, ‘九月九日 四民並籍野飲宴’條.
08 최은정, 「고려시기 중양절 관련 한시의 중국 고전시 수용 양상 연구」, 『중국학보』 82 (2017), p.272.
09 최광식, 「문헌상으로 본 신라의 세시풍속」, 『신라사학보』 46 (2019), p.175.
10 https://ja.wikipedia.org. “重陽” 참고.
11 중양절 오전 11시가 되면 부산 영도 순직 선원 위령탑에서 위령제가 시작된다. 이때 부산항에 정박한 배들이 추모의 뜻으로 30초간 일제히 뱃고동을 울린다.
12 지방에 따라 양력 7월 15일에 열리기도 한다.
13 배영희, 「무가에 나타난 ‘九’의 상징성」, 『한국민속학보』 5 (1995), pp.70-71, pp.74-76, pp.79-84; 배영희, 「구층탑 설화의 상징성에 대한 역학적 분석」, 『한국민속학보』 7 (2004), p.447, pp.451-459.
14 『世宗實錄』 13년(1431) 6월 2일.
15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편), 『동양고전번역 용어용례사전 2』 (서울: 한국학자료원, 2016), p.1144, p.1154.
16 같은 책, p.1156.
17 김승혜, 「한국인의 하느님 관념」, 『종교신학연구』 8 (1995), p.120.
18 李叔還, 『道敎大辭典』 (臺北: 巨流圖書公司, 1986), p.43; 하신, 『신의 기원』, 홍희 옮김 (서울: 동문선, 1990), p.158.
19 전통적으로 한국에서는 최고신이 구천(九天)의 천상에 거주하면서 하위의 신들에게 명령을 전달하면 그 신들이 집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최고신은 인간과 거리가 있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하위의 신들을 통해 관계를 맺는 만큼 인간의 호소를 들어준다고 믿어졌다. 김승혜, 「한국인의 하느님 관념-개념 정의와 삼교 교섭의 관점에서」, 『종교신학연구』 8 (1995), pp.120-121.
20 『孝宗實錄』 1년(1650) 「哀冊文」.
21 제주수련도장의 기공식은 1989년 1월 25일(양력 3. 2), 상량식은 1989년 5월 27일(양력 6. 30), 개관식은 1989년 6월 24일(양력 7. 26)이었다.
22 「도전님 훈시」(1989. 2. 8).
23 조선 시대에 유배객이 가장 많았던 곳이 제주도이다. 대략 200명 정도가 유배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는 129명 정도가 유배를 갔던 전남 지역이라고 한다. 이영권, 『새로 쓰는 제주사』 (서울: 휴머니스트, 2005), p.174.
24 「도전님 훈시」(1992. 5. 26).
25 “상제님, 도주님의 화천일 치성이 다른 게 아니다. 음식 장만하고 절하고 그러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제사다. 제사를 우리는 치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도전님 훈시」(1990. 12. 28).
26 차선근, 「대순진리회 상제관 연구 서설(Ⅰ)」, 『대순사상논총』 21 (2013), pp.142-144.
27 『전경』, 공사 1장 3절, 공사 3장 38절.
28 《대순회보》 2 (1984), p.3, p.12 참고.
29 「도전님 훈시」(1992. 5. 26).
30 「도전님 훈시」(1992. 5. 26).
31 “… 모든 사람의 선령신들은 六十년 동안 공에 공을 쌓아 쓸 만한 자손 하나를 타내되 ….” 『전경』, 공사 교법 2장 3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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