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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51년(2021)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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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 가해자와 피해자의 콜라보, 해원상생

가해자와 피해자의 콜라보,

 
해원상생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차선근




1. 첫머리
2. 해원상생에 대해 알아야 할 것
3. 해원상생 실천의 양쪽, 가해자와 피해자
4. 정리하며



1. 첫머리


  [1] 우리의 종지(宗旨)는 ‘음양합덕(陰陽合德)·신인조화(神人調化)·해원상생(解冤相生)·도통진경(道通眞境)’입니다. 『대순회보』 사이트에 들어가 각 종지를 하나씩 넣어 검색해보면 음양합덕은 227건, 신인조화는 225건, 도통진경은 268건이 뜨는데, ‘해원상생’은 4배나 많은 1,062건이 뜹니다.01 ‘해원상생’ 하나만을 주제로 삼은 글이 천여 편인 건 물론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도 같은 조건으로 검색한 이상, 해원상생을 다룬 글이 다른 종지를 다룬 글보다 훨씬 많은 건 분명합니다.
  그 이유는 도전님 훈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우리 도는 해원상생이다. 우리의 목적이, 그 모든 것이 해원상생 안에 들어가 있다. 도를 통하는 것도, 수도의 방법도 모두 여기에 있다.”02


◦ “우리는 도통을 하려는 것이다. 도통을 하려면 해원상생을 해야 된다.”03


◦ “수도는 앉아서 주문만 읽는 게 아니라, 일동일정에 있어서 해원상생의 원리로 생활해나가는 것이다.” 04


◦ “훈회, 수칙에도 있다. 그것이 다른 게 아니라 전부 해원상생이다.”05


  도전님께서는 우리의 목적이 도통이고, 도통을 위해서는 수도를 해야만 하며, 수도는 해원상생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성경신(誠敬信)과 안심안신(安心安身), 무자기(無自欺)에 기반을 둔 공부·치성·기도·수련·포덕·교화·월성(月誠)·수강·연수·수의(隨議, 隨意)·참배 등 여러 수도 실천이 있고, 훈회와 수칙이라는 수도인 행동 요령도 있는데, 그 모든 것의 기본은 해원상생이라는 말씀이십니다. 그렇다면 해원상생이 다른 종지보다 더 자주 거론되는 이유도 해원상생이 수도 실천의 근본이자 핵심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지식은 진정한 앎이 아닙니다. 말만 잘하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진실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믿음도 받을 수 없습니다. 인망(人望)을 얻을 수 없기에 신망(神望)도 얻을 수 없습니다.06 실천이 가장 중요합니다.
  수도의 핵심이 해원상생에 있음은 주지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해원상생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 글은 해원상생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그 가운데 하나로 피해자와 가해자 문제를 조명하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해원상생의 실천을 하나로 일반화하지 않고, 피해자가 실천하는 해원상생과 가해자가 실천하는 해원상생으로 각각 구분해서 설명하겠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는 이런 구분이 뚜렷하지 못해 해원상생의 실천을 추동하는 데 한계를 지녀왔다고 봅니다. ‘상생’은 ‘서로 살린다’는 뜻입니다. ‘서로’나 ‘살린다’는 표현에서 보듯이, 상생은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입니다. 관계는 좋은 것과 안 좋은 것으로 구분됩니다. 특별히 좋다고 여겨지지 않는 평범한 관계라고 해도, 상대가 원수나 적은 아니므로 그냥 좋은 관계라고 해둡시다. 상생이 관계 개념이니 보은상생과 해원상생도 관계를 나타냅니다. 보은상생은 좋은 관계에서 출발합니다. 천지(상제님)·국가·사회·부모·스승·직장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한 마음으로 보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07 이와 달리 해원상생은 좋지 않은 관계에서 출발합니다. 해원상생은 그 출발점에 원한이란 것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한이 있다는 것은 관계가 좋지 않다는 뜻입니다. 모두는 아니지만, 원한을 낳아 좋지 않은 관계를 맺는 양쪽은 대개 가해자와 피해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해원상생의 실천을 말할 때,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에 서서 그 각각의 마음 자세와 역할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해원상생을 양자 사이의 관계 속에서 구현하려면, 손바닥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가해자와 피해자 양자의 역할을 모두 부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이 글이 가진 문제의식입니다.




2. 해원상생에 대해 알아야 할 것


  해원상생의 실천을 이야기하기 전에, 최소한 다음 두 가지의 사실 정도는 알고 가면 좋겠습니다. 제대로 모르면 제대로 실천할 수 없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형이상학적 관념까지는 모르더라도, 최소한의 기초 지식 정도는 갖고 있어야 실천을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지금 말하려는 두 가지 사실은 여기에서 처음 소개하는 게 아닙니다. 그동안 학술지를 통해 여러 차례 이야기되어 온 것입니다. 그러나 학술지의 특성상 접근이 쉽지 않아서 그다지 알려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대순회보》의 지면을 빌려 다시 말하고자 합니다.


  1) 해원상생은 생존의 필수 조건이다


  [1] 도전님께서는 “해원상생을 해야 한다. 그 원(冤)을 풀면 산다. 원을 가지면 죽는다. 명심해라. 해원상생, 그것을 못 하면 죽는다.”라고 타이르셨습니다.08 따라서,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 첫째는 해원상생이 ‘평화를 지향하는 훌륭한 도덕이나 윤리’라는 사실을 넘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가 달린 인간 생존의 필수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이 가르치심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가르치심에 대한 배경 설명은 생각보다 덜 알려진 것 같습니다. 해원상생이 인간 생존의 필수 조건인 까닭은 여럿이겠으나, 그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2] 천지신명의 하소연을 들으신 상제님께서는 세상이 참혹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직접 살피셨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우주의 지배 법칙이었던 상극과 그로 인해 생기는 원(冤, 원한)으로 진단하시고, 천지대도를 여시며 천지공사로써 원한이 풀리고 상생의 후천이 열리도록 만드셨습니다.09
  후천이 열리기 전까지는 세상이 해원하는 시대입니다. 그것을 해원시대(解冤時代)라고 부릅니다. 만물은 각자의 자유 의지에 따라 ‘바라는 대로’ 해원을 할 수 있는 시대라는 뜻입니다.10 원한의 내용과 푸는 방법에 따라 다양한 해원이 가능합니다. 명예·인기·재물·권력·섬김을 좇으면서 해원을 할 수도 있고, 복수 또는 저주하면서 해원을 할 수도 있고, 덕을 베풀거나 인격 도야에 힘씀으로써 해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상제님께서는 “좋은 꽃은 좋은 열매를, 흉한 꽃은 흉한 열매를 맺는다.”라고 하셨으니,11 부정적 방향의 해원은 부정적인 결과를 얻을 것이요, 긍정적 방향의 해원은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것입니다. 긍정적 방향의 해원이란 상생을 목표와 방법으로 삼는 해원을 말합니다. 부정적 방향의 해원이란 그렇지 않은 해원, 그러니까 상생을 도외시하고 타인을 해치거나 자기 자신만을 위하거나 하는 해원을 말합니다.
  어떤 방향의 해원을 추구하든 그것은 각자의 마음 씀씀이에 달려 있습니다. 만물은 각자 원하는 해원을 향해 달려갑니다. 부정적 방향의 해원은 더 쉽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것이 극에 달하면 세상은 혼란 그 자체가 됩니다. 아마 지금의 세상이 그런 듯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순식간에 상생의 시대가 활짝 열립니다. 그것이 개벽입니다. 그때는 긍정적 방향의 해원을 도모해왔던 존재들이 빛을 볼 것입니다.12 세상은 해원과 상생의 시대로 귀결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주가 해원상생으로 걸어가는 도수(度數)를 짜놓으신 상제님의 천지공사입니다.13
  인간은 자연법칙에 따라 살아왔습니다. 봄에 씨앗을 뿌리고 가을에 추수하는 것도 춘하추동 사계절이라는 법칙에 순응했기 때문입니다. 상제님의 천지공사에 의해 지금의 우주가, 세상이, 자연이, 만물이 결국에는 상생으로 귀결되고야 마는 해원상생의 시대가 되었다면, 인간 역시 생존을 위해 그렇게 짜여진 자연의 순리에 따라야 합니다.14 자연에 순응하지 않으면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사실관계가 이러하다면, 인간의 해원상생이란 ‘실천하면 나도 좋고 너도 좋은’ 도덕이나 윤리에 그치는 수준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여 사느냐, 그렇지 않고 죽느냐 하는 생존이 달린 문제입니다. 우주가 해원상생하므로 그 안에 존재하는 인간도 죽지 않고 살아가려면 해원상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니, 인간 생존의 필수 조건은 곧 해원상생이 되는 것입니다.



  2) 해원상생은 대순진리회만의 고유한 가르침이다


  [1] 다음으로 알아야 할 사실은 해원상생이 대순진리회만의 고유한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 제주4.3평화공원 입구에 서있는 2개의 방사탑



  제주4.3평화공원에 가면 입구에 커다랗게 ‘해원’과 ‘상생’이라고 각각 적은 2개의 돌탑(방사탑)이 양쪽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치인의 발언이나 방송, 신문에서도 ‘해원상생’이라는 말을 종종 접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흔한 말이 되었다는 것인데, 정작 사람들은 이 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잘 모릅니다. 학자들조차도 이 단어가 증산계 종교들에서 나왔다는 것만 알 뿐이고, 대순진리회만의 고유한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상제님께서는 해원과 상생을 누누이 말씀하셨으나, ‘해원상생’이라는 단 하나의 종교용어를 사용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해원상생’이라는 종교용어를 만드신 분은 도주님이십니다. 도주님께서는 1925년에 무극도를 창도하시면서 종지 가운데 하나를 ‘해원상생’이라고 하셨는데,15 이로써 ‘해원상생’이라는 고유한 말이 비로소 세상에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16



  [2] 대순진리회를 제외하고 증산계 교단들을 두루 살펴보면, ‘해원’이나 ‘상생’을 교리로 채택한 곳은 절반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나마 ‘해원’과 ‘상생’을 교리로 삼은 증산계 교단들도 ‘해원상생’이라는 단어를 교리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해원상생’을 ‘해원상생’이 아니라, ‘해원’과 ‘상생’으로 분리해서 교리로 채택하고 있습니다.17
  이것은 중대하게 지적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상제님께서는 만물이 해원하는 시대를 여셨고, 그 해원을 각자의 자유 의지에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해원은 각자 원하는 대로 상생으로든 상극으로든 다 진행될 수 있습니다. 물론, 상제님께서 가르치신 해원의 진정한 요체는 상생에 있습니다. 상생을 목표로 한 해원, 상생을 방법으로 한 해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밝힌 고유한 종교용어가 ‘해원상생’입니다.18 해원은 각자의 자유로운 의지로써 긍정적 방향 또는 부정적 방향으로 시도되는 시대이므로, ‘해원’이 ‘상생’과 결합을 하지 못하면 그 ‘해원’은 언제든 ‘상극’을 표방하는 ‘해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해원’이라고만 적으면 그 의미가 ‘해원상극’인지 ‘해원상생’인지 구분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해원’이 긍정적 방향, 즉 ‘상생’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적시하려면, ‘해원’과 ‘상생’을 분리하지 않고 합쳐서 ‘해원상생’으로 표현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상제님의 본뜻입니다. 이것을 밝히고 교리로 체계화하신 분은 오직 도주님뿐이셨습니다.



  [3] ‘해원상생’은 해원과 상생이 서로의 전제이자 결과이자 방법이자 목표로서, 짝패를 이루어 같이 나아가야 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해원’과 ‘상생’을 분리하지 않고 ‘해원상생’으로 하나로 표현해야만 그 뜻이 분명해진다는 점, ‘해원상생’은 하나의 고유한 종교용어라는 점, 그 종교용어는 도주님에 의해 만들어져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다는 점, ‘해원상생’을 교리로 채택하고 지금 나아가고 있는 유일한 종단이 대순진리회뿐이라는 점을 종합하면, ‘해원상생’은 증산계 교단 전체가 공유하는 가르침이 아니라 대순진리회만의 고유한 가르침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3. 해원상생 실천의 양쪽, 가해자와 피해자


  해원상생은 도덕과 윤리라는 행동 요령을 넘어 인간 생존의 필수 조건이라는 사실, 그리고 오직 대순진리회만의 고유한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작동하는 해원상생을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해원상생의 실천을 가해자-피해자 문제에서만 논의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분수에 맞지 않는 허영과 야망 때문에 원한이 생겼다면, 이때의 해원상생은 피해자-가해자 문제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 헛된 꿈을 버리는 데 있습니다.19 이 글은 그런 경우들을 제외하고, 가해자와 피해자 문제에 한정해서 해원상생 실천 문제를 살피려고 합니다.
  굳이 가해자-피해자 문제를 상정하려는 이유는 첫째, 지금까지 가해자의 해원상생이 비교적 덜 강조되어왔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둘째, 해원상생의 진리와 실천을 상대에게 이야기할 때, 그저 실천하면 좋다는 ‘막연한’ 도덕 관념론에 그칠 것이 아니라, 실제 사건에 처한 당사자들의 입장을 ‘현실에 맞게’ 풀이하여 전할 수 있어야 진정한 실천을 이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가해자 윤리[無慼倫理], 해원상생


  [1] 해원상생은 해원상생이나, 가해자에게 적용되는 해원상생과 피해자에게 적용되는 해원상생은 같지 않습니다. 먼저 가해자의 해원상생부터 정리해보겠습니다.
  가해자 입장의 해원상생은 ‘상생을 목표로, 상생하는 방법으로써 피해자의 원한을 풀어준다’는 뜻입니다. 풀어주는 방법은 원한이 발생한 원인을 찾아 제거하는 것입니다.20 상제님께서 원한 품은 어린아이 신명을 해원시켜 주시기 위하여 그 신명이 바라는 대로 일본인의 옷을 입으셨던 것이 하나의 사례입니다.21



  [2] 가해자가 피해자의 원한을 풀어주는 것, 상제님께서는 그것을 ‘척
(慼)’이라고 하는 독특한 종교용어로 강조하셨습니다. 척이란 남이 나에게 갖는 원한을 말합니다.22 상제님께서는 척을 풀어야 무척(無慼)이 되고, 무척이라야 잘 살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23 척을 푼다는 것은 상대가 가진 원한을 풀어준다는 뜻이므로, 상제님의 이 말씀을 피해자 -가해자 사이에 놓고 보면 가해자는 피해자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척(慼)을 없앤다[無]는 것, 즉 무척(無慼)의 윤리는 가해자 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상제님께서는 무척윤리(無慼倫理)를 통해 가해자가 지켜야 할 해원상생 윤리를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맞은 놈은 발 뻗고 자고, 때린 놈은 발 뻗고 못 잔다’는 속담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존재하는 원한은, 피해자가 바라볼 때와 가해자가 바라볼 때 그 느끼는 정도가 다른 게 솔직한 현실입니다. 피해자는 고통스럽겠지만, 피해자만큼의 고통을 느끼는 가해자는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더구나 가해자에게는 자신이 가진 힘이 크면 클수록 상대적으로 약자인 피해자의 원한을 쉽게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해자는 자신으로 인해 생긴 피해자의 원한을 쉽게 잊어버리지만 그래서는 결코 안 됩니다. 이 때문에 상제님께서는 가해자 입장으로 바라본 피해자 원한을 특별히 ‘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하시고 ‘무척’을 강조하신 게 아닌가 합니다.



  [3] 남을 잘 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공부입니다.24 하지만 그 이전에 먼저 남에게 조금의 피해라도 주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척을 짓지 말라’는 상제님의 가르치심입니다.25
  도전님께서도 훈시를 통해 척을 만들지 말고, 척을 푸는 ‘무척’으로써 해원상생하라는 말씀을 누차 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만 추려 옮겨보겠습니다.

 

◦ 남을 미워하거나 남에게 해독을 끼치거나 언덕을 베풀지 않는 것 등이 모두 척을 짓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속담에 ‘무척 잘 산다’ 이르나니 척이 없어야 잘산다는 말이니라”, “남에게 원억(冤抑)을 짓지 말라, 척이 되어 갚나니라, 또 남을 미워하지 말라, 그의 신명이 먼저 알고 척이 되어 갚나니라”, 등등의 상제님 말씀은 해원상생의 일상윤리를 생활화하여 실천토록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실천 윤리가 바로 상생의 화평 세계를 건설해나가는 윤리인 것입니다.26
  
◦ 제일 중요한 것이 해원상생이다. 해원상생은 다른 게 아니라 척을 푸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척신(慼神)이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 제일 먼저 척을 풀어야 한다. 척이 없어야 된다. ‘무척 잘 산다’는 말은 척을 풀어야 잘 산다는 말이다. 그 척신이 발동을 해서 보복을 한다. 나에게 원한이 있는 신이 다른 사람에게 응해가지고 그 사람을 이용해서 나를 때리게 만드는 것이다. 척신이 사람을 이용해서 보복하는 것이다. 수도 과정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척신이다. 우리 수도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척을 푸는 것이다.
27   
  
◦ 우리 도는 해원상생이다. 우리의 목적이, 그 모든 것이 해원상생 안에 들어가 있다. 도를 통하는 것도, 수도의 방법도 모두 여기에 있다.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이고 간에 푸는 것, 즉 척을 푸는 것이 수도의 과정이고 목적이다. 모든 것을 푼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28


  이처럼 도전님께서는 척을 푸는 것, 즉 내가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원한을 산 일이 있다면 반드시 그것을 갚아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것이 해원상생을 실천하는 우리의 도라고 하셨습니다.
  ‘척을 없애라’는 것은 상대가 나 때문에 가진 원한을 풀어서 없애라는 상제님의 ‘무척윤리’입니다. 이렇게 보면, 척을 짓지 말라는 상제님의 말씀은 내가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항시 경계하라는 가르치심이요, 척을 풀고 없애주라는 말씀은 가해자인 내가 해원상생을 실천하라는 가르치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척을 풀어주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가해자가 피해자의 원한과 원통함을 풀어주지 않는다면, 그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무척’이 아니므로 잘 살지 못하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필수 조건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도통은 고사하고 후천의 복된 운수는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2) 피해자 윤리, 해원상생


  [1] 피해자 입장의 해원상생은 ‘상생을 목표로, 상생하는 방법으로써 나의 원한을 푼다’는 뜻입니다. 그 푸는 방법은 받은 대로 되돌려주는 복수 또는 저주가 아니라 상생이어야 합니다.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덕을 베풂으로써 원한을 풀어야 한다는 것이니, 그 방법은 피해자가 자신을 반성하고 가해자를 오히려 은인으로 여김에 있습니다.
  당연히, 이 방법은 매우 어렵습니다. 가해자가 척을 푸는 해원상생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피해자를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그 원하는 바(보상 포함)를 들어주면 됩니다. 그 실천에도 양심과 정직, 용기가 필요하기는 합니다. 그래도 피해자가 자신을 스스로 탓하고 가해자를 은인으로 여기는 것보다는 쉬운 편입니다.
  피해자는 가해자로부터 안 좋은 일을 겪어 고통스럽습니다. 그 고통을 치유하려고 해원상생을 실천하려는데, 그 방법이 가해자의 해원상생 실천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 하니, 뭔가 억울합니다. 다 같은 해원상생인데, 당한 자가 더 힘들어야 한다니 2차 가해에 휘말린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피해자 입장으로선, 해원상생 실천이 더욱 엄두가 안 납니다.
  이럴 때는, 피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먼저 반성하고, 가해자를 은인으로 여기라고 가르치신 상제님의 말씀을 되풀이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상제께서 천원 장에서 예수교 사람과 다투다가 큰 돌에 맞아 가슴뼈가 상하여 수십 일 동안 치료를 받으며 크게 고통하는 공우를 보시고 가라사대 “너도 전에 남의 가슴을 쳐서 사경에 이르게 한 일이 있으니 그 일을 생각하여 뉘우치라. 또 네가 완쾌된 후에 가해자를 찾아가 죽이려고 생각하나 네가 전에 상해한 자가 이제 너에게 상해를 입힌 측에 붙어 갚는 것이니 오히려 그만하기 다행이라. 내 마음을 스스로 잘 풀어 가해자를 은인과 같이 생각하라. 그러면 곧 나으리라.” 29 
  
김형렬이 출타하였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예수교 신자 김중구(金重九)가 술이 만취되어 김형렬을 붙들고 혹독하게 능욕하는지라. 형렬이 심한 곤욕을 겪고 돌아와서 상제께 사실을 아뢰니 상제께서 형렬에게 “청수를 떠 놓고 네 허물을 살펴 뉘우치라.” 하시니 형렬이 명하신 대로 시행하였도다. 그후 김중구는 한때 병으로 인해서 사경을 헤매었다고 하느니라. 이 소식을 형렬로부터 들으시고 상제께서 다시 그에게 충고하시기를 “금후에 그런 일이 있거든 상대방을 원망하기에 앞서 먼저 네 몸을 살피는 것을 잊지 말지어다. 만일 허물이 네게 있을 때에는 그 허물이 다 풀릴 것이요 허물이 네게 없을 때에는 그 독기가 본처로 돌아가리라.” 하셨도다.
30

 

  『전경』의 이 두 구절은 해원상생의 실천을 언급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됩니다. 《대순회보》에도 이 구절들에 대한 설명이 많습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피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먼저 반성하고 가해자를 은인으로 여김으로써 해원상생을 실천하라는 가르치심은 도전님의 훈시에도 많이 나타납니다.


◦  ‘원수의 원을 풀어 은인을 대하듯 하라’ 하셨으니 내 몸을 내가 닦기를 힘써 나가려면 반성으로써 날에 날마다 내 몸이 새로워지도록 게을리하지 말아야 곧 수기(修己)가 되는 것이다.31
  
◦  우리 도는 정성을 들여 병 낫고, 집 잘 되고, 덕을 보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주 작은 것이다. 우리는 도통을 하려는 것이다. 도통을 하려면 해원상생을 해야 된다. 생활화해야 한다. 해원상생이란 사랑인데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이 아니다. 쉽게 말해 아무 원망이 없고 미운 게 없는 그것이 해원상생이다. 해원상생을 생활해나가려면 이해를 해야 한다. 이해 없이는 안 된다. 이해가 해원상생의 원리이다. 말로만 말고 해원상생을 몸으로 실천해 생활해나가는 것, 그것이 수도다. 미운 게 없고 원망이 없으면 그저 감사하고 고마울 뿐이다. … 이해 없이는 안 된다. 이해를 해야 한다.
32
  
◦  도를 같이 믿고 나가는 도인들끼리라도 괜히 상대방이 나를 헐뜯고 못마땅하게 생각하면 그것을 그대로 갚을 것이 아니라 ‘내가 무슨 잘못이 있는가 보다. 전생에라도 그럴 만한 게 있나 보다’하고 이해해 나가면서 포용하면 다 풀어진다. 이것이 해원상생이다. … 나는 저 사람에게 잘해주는데, 저 사람은 내 감정을 자꾸 건드려 좋은 사람을 괜히 나쁜 사람 만들어 놓는다고 하는데, 그럴수록 잘 이해해야 한다. 저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다. 전생의 나의 척신이 저 사람을 이용해서 그런 것이라고 뉘우치고 도리어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 그게 도를 믿는 것이다. 도를 믿는다고 한다면 그것을 지켜야지, 그렇지 않으면 밖의 사람하고 같다.
33


  [2] 상제님의 말씀과 도전님의 훈시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원망하지 말고 자신을 반성하며, 가해자를 오히려 은인으로 여기라는 가르치심입니다. 이 가르치심을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피해자의 머리와 마음에 여러 갈등이 오갑니다. 이 갈등을 정리하는 핵심은 결국 모든 원인을 나 자신에게서 찾는 데 있습니다. 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가해자에게 괴롭힘을 당해 억울하게 된 이유가 나에게 있다고 믿도록 노력합니다. 지금 겪는 억울함과 직접적 관련은 없다고 하더라도, 예전에 어떤 잘못을 범한 게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잘못을 범하지 않는 인간이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 나도 인간이니 분명히 나에게는 어떤 잘못이 있다는 사실, 기억 못 하는 잘못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 나의 과거 잘못이 가해자 ‘그놈’을 통해 나에게 되돌아온 것으로 믿습니다. 직접 처벌이 아니라 간접 처벌이며, ‘그놈’ 덕분에 처벌이 이 정도로 감해진 것으로 여기고 ‘그놈’을 ‘그놈’이 아니라 ‘그분(은인)’으로 여기도록 노력합니다.
  셋째, 가해자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하는 문제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가해자가 나의 잘못을 대신 갚아주고 없애주는 대리자 역할을 충실히 한 것이었다고 해도, 그가 상극의 가해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상극의 부정적 해원은 좋지 않은 결과로 귀결된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습니다. 더구나 나의 잘못을 대신 갚아주는 것도 아니었다면, 가해자의 앞날은 더욱 참담할 것입니다. 상제님께서는 큰 죄를 지으면 천벌을 받고, 작은 죄를 지으면 신벌(神罰) 혹은 인벌(人罰)을 받는다고 이미 경고하셨습니다.34 그러므로 피해자는 가해자의 앞날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절대 생각하지 말고, 문제의 초점을 오로지 피해자인 나 자신에게만 놓아두도록 노력합니다.
  넷째, 아무런 잘못이 없었는데도 괜스레 가해자에게 험한 꼴을 당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은 오히려 나를 더 힘들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이런 억울함과 고통에 시달린다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한다면, 그 고통은 점점 깊어지고, 그 고통은 가해자에 대한 저주로 이어집니다. 그 고통스러운 감정은 하늘에 대한 원망, 신에 대한 원망, 나를 보호해주지 못하는 국가·사회·조직·이웃·가족에 대한 원망으로까지 나아가고, 인간과 세상에 대해 깊어진 환멸은 결국 나 자신을 더 암울한 감옥 속에 스스로 가두게 됩니다. 지금 겪는 고통의 원인을 가해자 상대에게 찾으려고 하면, 오히려 그것이 더 큰 고통으로 되돌아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직 도통을 받지 않았으므로, 피해자가 겪는 괴로움의 원인을 정확히 짚어낼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알 수 없는 그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런 시도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맴돌기만 하면서 혼란으로 더 증폭된 고통을 되돌려줄 뿐입니다. 결국 피해자인 내가 피해자인 나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단 하나의 길은 상제님 말씀대로 나의 잘못을 먼저 반성하고 가해자를 ‘그놈’이 아니라 ‘그분’인 것으로 그냥 믿어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각하고 진정으로 실천한다면, 피해자인 나의 억울함은 ‘빨리’ 풀리고 고통도 ‘빨리’ 사라질 것이라는 게 상제님과 도전님의 가르치심입니다.



  3) 해원상생을 나에게 적용할 때와 피해자에게 적용할 때는 달라야 한다


  [1] 가해자는 언제든지 또 다른 누군가로부터 해를 입는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피해자는 언제든지 또 다른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서로서로 가해자이면서 피해자,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일 수도 있습니다. 피해자와 가해자는 고정된 캐릭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복잡한 상황이라면, 내가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그 정체를 확인하고 그에 걸맞게 행동하려고 하는 것은 힘듭니다. 그러므로 나는 항상 내가 가해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해원상생의 현실적인 실천에 도움이 됩니다.



  [2] 해원상생 실천의 출발은 ‘나를 가해자로 생각해보기’에 있으나, 이 사실을 피해자에게 전할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피해자에게 ‘잘 몰랐겠지만 사실 너는 가해자였어!’라는 말을 직설적으로 내뱉는다면, 피해자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고 오히려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론적 설명이 아무리 타당하다고 해도 머리[이성]로 전해야 하는 게 있고, 가슴[감성]으로 전해야 하는 게 있습니다. 피해자를 앉혀놓고 그에게 옳은 소리를 또박또박 읊어준다고 해서, 피해자의 실천을 유도할 수는 없습니다.
  상제님께서 “어떤 일을 묻는 자에게 그 사람이 듣고 실행하느냐에 상관하지 말고 바른 대로 일러주라.”35고 하셨음을 근거로 들면서, 옳은 말을 하는 게 뭐가 문제냐고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제님의 이 말씀은 ‘팩트’를 감추지 말고 곧이곧대로 전하라는 가르치심인 것이지, ‘팩트 폭력’을 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팩트를 전하더라도 상대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감정만 상한다면, 오히려 그 행위는 폭력으로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팩트를 전할 때 그 행위가 폭력이 되지 않으려면, 상대가 그 팩트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방법까지 더 고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가 팩트를 받아들이고 잘 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면, 팩트 폭탄(fact bomb)을 함부로 던져서 상대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게 하지 말고, 상대를 진지하게 설득할 방법까지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피해자의 고통과 원한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다큐멘터리나 스포츠 중계 스타일처럼 직설적으로 돌진하지 말고, 스토리와 희노애락 중심의 드라마 감성으로 피해자를 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고통과 원한을 섣불리 설명하고 위로하려 든다면, 해원상생 실천을 공감과 배려심 없이 일방적으로 전달하려 든다면, 그때 피해자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괜히 고통과 원한에 휩싸여있었을 뿐이었다는 감정을 강요받게 됩니다. 또한 자신이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였다는 당혹감까지 느끼게 만듭니다. 이를 감당할 수 없는 피해자는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게 당연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피해자에게 해원상생의 실천을 유도할 때는 배려와 공감을 바탕으로 하면서, 충분한 시간을 두고 ‘살살’, ‘조심스럽게’, ‘드라마처럼’ 접근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피해자는 먼저 말해야 합니다! 전하는 자는 피해자의 입장에 서서 듣고 공감하면서 그에 대한 배려를 바탕으로 해원상생을 ‘짧고 굵게’ 말해야 합니다!” 소통을 강조하는 이 간단한 요령은 피해자가 해원상생의 실천에 가깝게 다가가도록 만듭니다.



4. 정리하며


  [1] 지금까지 가해자가 실천할 해원상생과, 피해자가 실천할 해원상생을 각각 정리하였습니다. 이렇게 ‘굳이’ 구분하여 말하는 까닭은, 가해자가 해원상생을 잘 실천하지 않으려 할 뿐 아니라 심지어 해원상생의 실천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며, 이때까지는 피해자에게만 해원상생을 강조해왔던 관행 때문입니다.
  해원상생의 설명을 상생으로써 원한을 ‘푸는’ 것이라고만 해설해왔던 것도 이런 현실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봅니다. 흔히 해원상생의 ‘해원’ 글자 풀이를 원을 ‘푼다’라고만 하지, 원을 ‘풀어준다’라고는 잘 하지 않습니다. 원을 풀어주는 것은 해원신(解冤神)이신 상제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으로 여겨져 그랬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해원을 ‘원을 풂’으로만 이해하면, 해원상생은 피해자의 실천 윤리로 한정될 우려가 큽니다. ‘원을 푼다’는 해석은, 원을 ‘풀’ 필요가 없는 가해자에게 해원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여기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가해자도 자기에게는 원한이 없으므로 원한을 ‘풀’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니 해원상생도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윤리라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당연히 이런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본문에서 살핀 것처럼 상제님께서도, 도전님께서도 가해자가 원한[척]을 풀어주어야 해원상생이 된다고 말씀하셨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따라서 수도인이 실천하는 해원상생의 ‘해원’을 ‘원을 풂’이라고만 하지 말고, ‘원을 풀어줌’이라는 해석까지 더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해원상생은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적용되는 윤리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발표된 대다수의 해원상생 글들은 해원을 ‘원을 풂’으로만 설명했으므로, 가해자의 의무와 책임은 외면한 채 피해자의 인내만 요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던 경향이 있습니다. 해원상생은 가해자에게도 적용되는, 오히려 더 적용되어야 하는 윤리입니다. 그것이 바로 상제님의 ‘척을 풀라’는 가르치심입니다. 척을 푸는 것은 남이 나에게 가진 원한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 일은 해원신이신 상제님이 아니라 나 자신이 직접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상제님께서는 나 대신 척을 풀어주지 않으십니다. 상제님께서는 내가 척을 없애야, 그래서 척이 없는 ‘무척(無慼)’이라야 잘 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만든 나의 척을 내가 푸는 것, 나로 인해 남이 가지게 된 원한을 내가 직접 나서서 풀어주는 것은 나의 의무이자 생존 필수 조건입니다. 이것이 가해자의 해원상생입니다.



  [2] 거듭 강조하지만, 해원상생의 글자 풀이는 ‘상생을 목표로, 상생하는 방법으로써, 원한을 풀거나, 원한을 풀어주는 것’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이것이 가해자와 피해자 양자의 실천을 동시에 끌어내는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가해자는 자신의 정체를 자각하게 하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 피해자에게 다가가는 용기를 내어 ‘무척’을 이루어야 해원상생이 됩니다. 피해자는 자기반성과 더불어 가해자를 은인으로 여기기까지 해야 해원상생이 됩니다. 이렇게 해원상생은 피해자에게만 강조해야 하는 실천 윤리가 아니라,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강조해야 할 실천 윤리입니다. 해원상생의 진정한 완성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콜라보[collaboration, 공동작업]에 있다는 뜻입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콜라보가 해원상생을 완성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해자와 피해자 양쪽 모두의 실천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럴 때는 어느 한쪽이라도 먼저 앞장서서 해원상생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한쪽이 해원상생을 하지 않겠다고 버틴다면, 다른 어느 한쪽이라도 자기가 감당해야 할 몫의 해원상생을 끝까지 실천해야 합니다. 평화를 구현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개벽시대에 살아남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 글의 요지입니다.



  [3] 이 글만으로 해원상생 실천의 추동력이 생겼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능력 부족으로 다루지 못한 해원상생의 심오한 의미가 많을 뿐 아니라, 종이 위에 인쇄된 글자 나열만으로 실천 따위를 운운하는 것은 철저한 자기 진단을 통해서 마음먹기와 행동 옮기기에 나서야 하는 ‘진정한 실천’을 가볍게 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왜곡된 기억과 삐뚤어진 자기 합리화에 빠져 반성과 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가해자, 그런 뻔뻔한 가해자를 보면서 억울함의 고통과 절망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삶의 의욕을 잃어가는 피해자를 생각해보면, 글 하나로 실천을 권한다고 말하는 것은 건방진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하나의 작은 글이 각자의 삶을 되돌아보고 해원상생 실천의 추동력을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세상천지에 나의 고통을 알고 위로해주는 ‘이웃’이 없다고 할지라도, ‘신명’은 항시 옆에서 그 고통을 위로하고 응원하는 중이라는 사실도 느낄 수 있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01 《대순회보》 홈페이지(http://webzine.idaesoon.or.kr/index.asp?), 접근일 2021.3.25.
02 「도전님 훈시」 (1990.6.17).
03 「도전님 훈시」 (1991.4.20).
04 「도전님 훈시」 (1992.11.17).
05 「도전님 훈시」 (1993.5.28).
06 교법 1장 25절 참고.
07 『포덕교화기본원리(其二)』 (1983), p.10.
08 「도전님 훈시」 (1992.1.11).
09 공사 1장 1·3절, 예시 10절.
10 공사 1장 32절, 교운 1장 20절·32절, 교법 1장 9·67절, 교법 2장 14·20절 등.
11 행록 5장 38절.
12 교법 3장 24절 참고.
13 차선근, 「대순진리회의 개벽과 지상선경」, 『신종교연구』 29 (2013), pp.229-233.
14 차선근, 「증산계 일괄 기술에 나타난 문제점과 개선방향」, 『신종교연구』 30 (2014), p.86.
15 교운 2장 32절.
16 차선근, 「증산계 일괄 기술에 나타난 문제점과 개선방향」, p.76.
17 같은 글, pp.73-74.
18 같은 글, pp.72-77 참조.
19 “무엇보다 자기 분수에 맞지 않는 허욕이 발동하는 것을 반성하고 조정하여 수심연성으로 허영과 야망을 경계하고 자기 분수에 합당케 하여 후회 없이 하는 것이 해원의 요체입니다. 인간 생활에 있어서 서로가 분수를 망각하고 허영과 야망으로만 일관하게 되면, 급기야는 피해를 입게 되어 원망이란 척이 생겨 풀지 못할 원한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훈시」, 《대순회보》 2 (1984), p.2.
20 차선근, 「한국 종교의 해원사상 연구」(2021), p.120.
21 행록 4장 54절.
22 『대순진리회 요람』, p.19.
23 교법 2장 44절.
24 교법 1장 2절.
25 교법 3장 4절, 예시 17절.
26 「도전님 훈시」, 《대순회보》 2호, p.2.
27 「도전님 훈시」 (1990.3.4).
28 「도전님 훈시」 (1990.6.17).
29 교법 3장 12절.
30 교법 2장 28절.
31 「도전님 훈시」 (1985.8.7).
32 「도전님 훈시」 (1991.4.20).
33 「도전님 훈시」 (1992.1.11).
34 교법 1장 32절.
35 교법 1장 5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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