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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8년(2018)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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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지명 답사기 : 덕두마을과 최덕겸 종도

덕두마을과 최덕겸 종도
 
 
연구원 정나연
 
▲ 새울에서 본 덕두마을
 
상제께서 원일과 덕겸에게 “너희 두 사람이 덕겸의 작은 방에서 이레를 한 도수로 삼고 문밖에 나오지 말고 중국 일을 가장 공평하게 재판하라. 너희의 처결로써 중국 일을 결정하리라” 이르시니 두 사람이 명하신 곳에서 성심 성의를 다하여 생각하였도다. 이렛날에 원일이 불려가서 상제께 “청국은 정치를 그릇되게 하므로 열국의 침략을 면치 못하며 백성이 의지할 곳을 잃었나이다. 고서(古書)에 천여불취 반수기앙(天與不取反受其殃)이라 하였으니 상제의 무소불능하신 권능으로 중국의 제위에 오르셔서 백성을 건지소서. 지금이 기회인 줄 아나이다”고 여쭈어도 상제께서 대답이 없으셨도다. 덕겸은 이레 동안 아무런 요령조차 얻지 못하였도다. 상제께서 “너는 어떠하뇨” 하고 물으시는 말씀에 별안간 생각이 떠올라 여쭈는지라. “세계에 비할 수 없는 물중지대(物衆地大)와 예악문물(禮樂文物)의 대중화(大中華)의 산하(山河)와 백성이 이적(夷狄…오랑캐)의 칭호를 받는 청(淸)에게 정복되었으니 대중화에 어찌 원한이 없겠나이까. 이제 그 국토를 회복하게 하심이 옳으리라 생각하나이다.” 상제께서 무릎을 치시며 칭찬하시기를 “네가 재판을 올바르게 하였도다. 이 처결로써 중국이 회복하리라” 하시니라. 원일은 중국의 해원 공사에만 치중하시는가 하여 불평을 품기에 상제께서 가라사대 “순망즉치한(脣亡則齒寒)이라 하듯이 중국이 편안함으로써 우리는 부흥하리라.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의 조공을 받아 왔으므로 이제 보은신은 우리에게 쫓아와서 영원한 복록을 주리니 소중화(小中華)가 곧 대중화(大中華)가 되리라” 일러 주셨도다. (공사 3장 18절)
 
  위의 구절에 나온 최덕겸 종도는 본명이 병한(炳瀚)으로 삭령(朔寧) 최씨 남강공파 21대손이며, 덕겸(德謙)은 그의 자(字)이다. 『전경』에는 덕겸(德兼)으로 기록되어 있어 ‘겸’의 한자가 서로 차이가 있다. 최덕겸은 갑신(甲申: 1884)년에 태어나 신묘(辛卯: 1951)년 5월 14일에 작고하였다. 부친 최홍구(崔洪九)와 모친 김씨(金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큰아버지 댁에 양자로 갔다.
  족보에 따르면 부인은 밀양 박씨(密陽朴氏)와 장수 황씨(長水黃氏) 두 명이었다. 자녀는 4남 2녀였으나 셋째 아들은 어릴 때 사망하여 족보에는 아들 3형제만 기록되어 있다. 넷째 아들은 최덕겸의 동생인 병관(炳琯)에게 양자로 갔다.
  그가 언제부터 상제님을 따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신원일 종도와 함께 중국 해원공사에 참여했다. 두 사람은 중국일을 공평하게 재판하라는 상제님의 명에 따라 이레 동안 성심성의껏 생각하였다. 이레가 지난 후 상제님께서는 중국 일에 대한 신원일의 대답에 말씀이 없으시다가 “너는 어떠하뇨”라고 최덕겸에게 물으셨다. 이에 별안간 생각이 떠오른 그는 중국이 청나라에 빼앗긴 국권를 회복하게 하심이 옳을 것 같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상제님께서는 중국 일을 공평하게 재판한 최덕겸을 칭찬하셨다.
  이 외에도 그는 천자국에만 오는 대신명(大神明)인 시두손님을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하는 공사, 잠드신 상제님의 몸에 파리가 앉지 못하게 쫓고 상제님께서 그리신 태극을 세되 열 번째마다 동도지(東桃枝)를 입에 물고 세었던 공사, 상제님께서 화천하시기 4일 전인 1909년 6월 20일에 동곡에서 이루어진 공사 등에 참여하였다.01
  이러한 공사에 참여한 최덕겸이 살았던 마을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가 살았던 곳은 현재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남리 덕두마을이다. 최창조 종도가 살았던 새울과 김경학 종도가 살았던 백암리와도 가까운 덕두마을은 여주에서 3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이른 아침 6시에 출발한 우리 일행은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다 태인나들목으로 나갔다.
  태인나들목을 나와 태인교차로 방향으로 약 1.7km를 가면 태인의 중심 마을인 태성리가 나온다. 태성리는 태인의 역사와 동학농민군의 이야기가 살아있는 곳이다. 태인사거리에서 보니 왼쪽으로 태성리를 품에 안듯 두르고 있는 성황산이 있다. 성황산은 동학농민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한 뒤 태인으로 내려와 관군과 마지막 싸움을 벌였던 곳이다. 여기에서 패한 동학농민군은 결국 모두 해산되었다.
  태인사거리를 지나 태인면의 중심으로 들어가면 태인터미널이 나온다. 대한민국 시골 마을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작고 아담한 모습이다. 그곳에서 130m 정도를 더 가면 오른쪽에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인 피향정이 나온다. 보물 제289호로 지정된 피향정은 신라 시대 때 최치원 선생이 태산군수로 재임 중에 피향정 앞뒤로 있었던 연못가를 소요(逍遙)하며 풍월을 읊었다는 전설이 있지만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무더운 여름날 아름답게 핀 연꽃의 진한 향기에 취해보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최고의 선물이 될 만한 곳이다.
 
▲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위성사진(출처: 다음지도)
 

  피향정의 담을 따라 관찰사 이서구(1754~1825) 영세불망비, 군수 홍범수(1871~1910) 애민선정비 등을 비롯하여 20여 개의 비석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이 중에는 동학농민혁명의 원인이 된 조병갑이 고부 군수로 부임했을 때 태인현감을 지낸 부친 조규순의 선정(善政)을 기리기 위해 세운 송덕비도 있다. 백성들의 고혈을 거둬 만들어진 이 비석은 당시 농민들 아픔의 역사이기도 하다.
  역사를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에겐 태인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도주님께서 창도하신 무극도의 도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피향정에서 사거리를 지나 태인로를 따라 600m 정도 올라가면 오른쪽에 무극도장터가 있다. 도주님께서는 돌챙이고개라고 불리는 이곳에 처음으로 도장을 지어 포덕활동을 왕성하게 하셨다. 지금 우리가 다니는 이곳을 도주님께서도 왕래하셨을 것이다.
  덕두리로 가야 하는 우리는 피향정 사거리에서 태산로를 따라 내려갔다. 국도를 따라 조금 더 내려가 매정리 앞 사거리에서 우회전한 후 동진강을 가로지르는 매정교를 건넜다. 칠보면 시산리에 있는 섬진강 수력발전소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이곳을 지난다. 상제님께서 전북(全北) 칠읍(七邑)의 흉년을 없애는 공사를 보셨던 그 운암강(雲岩江)의 물이 지금 내 발밑을 지나고 있다. 상제님께서 100년도 더 전에 행하신 천지공사의 은혜가 펼쳐지는 현장에 서 있다.
 
▲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덕두마을 주변 위성사진(출처: 다음지도)
 

  저멀리 논 한가운데 오늘의 목적지인 덕두마을이 보인다. 가지런히 정렬된 논들 위로 올라앉은 마을이 꼭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섬처럼 보인다. 마을까지 곧게 뻗어 있는 길이 찾아오는 객들을 곱게 맞이한다. 마을 바깥 길을 따라 걸어도 20분이 걸리지 않는 아담한 마을이다.
  덕두마을은 본래 태인군 남촌이변면 지역이었다. 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덕두리, 장재동, 서촌면 과학치 및 고현내면의 이리, 삼리 각 일부를 병합하였다. 그리고 이 지역이 태인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 태남리라 하고 정읍군 보림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다가 1935년에 보림면이 없어지면서 다시 태인면에 편입되어02 지금에 이르고 있다.
  태남리의 으뜸가는 마을인 덕두마을은 삭녕(朔寧) 최씨의 집성촌이다. 주민들 대부분 벼농사를 경작하고 있다.03 옛말에 문전옥답(門前沃畓)이라고 하는데 이곳이 딱 그렇다. 동진강과 축현천, 백암천으로 둘러싸인 곳이어서 물 하나는 풍부해 농사짓기에는 참 좋을 것 같다.
 
▲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남리 덕두마을
 

  증손자의 말에 따르면 최덕겸은 키가 180cm가 될 정도로 상당히 컸다고 한다. 책 읽기를 좋아했으며 필력이 좋았다. 또한, 죽을 날짜도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한다. 꽤 부유했던 그의 집 행랑에는 많은 사람이 머물렀다. 그가 살았던 집은 커다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북쪽에 6칸으로 된 2층짜리 행랑채가 있었다. 본채로는 5칸 접집이 있었다. 그리고 행랑 끝의 ㄱ자로 된 곳에서 사람들과 함께 치성을 모셨다. 울 안에 건물이 5채가 있었고 독서당도 크게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넓은 집이 6·25 때 증손자의 당숙이 군대 입대를 피하려고 치안대 대장에게 주고 이전을 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 게다가 지금은 그 옛집들이 모두 헐려서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집이 있었던 위치를 확인해 본다면 현재 비닐하우스가 있는 쪽으로 안채가 있었고, 집이 있는 곳에 행랑채가 있었다고 한다.04
  덕두마을 일대는 와우형(臥牛形)을 이루고 있다. 그중에서 덕두마을은 소의 꼬리 부분에 자리하고 있다.05 그래서 그런지 주변 마을에서 뚝 떨어져 위치한 모양새가 꼭 소 꼬리 끝에 달린 털뭉치 같기도 하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파리나 모기를 쫓는 소의 모습이 떠오른다.
 
▲ 옛 최덕겸 종도의 집 터
 

  와우형의 혈자리는 주변 지명에도 남아 있다. 먼저 덕두마을 동쪽에 둑이 있는데 그 모양이 멍에같이 굽어서 멍에뜽이라고 한다. 그리고 멍에뜽 옆에 있는 들이 통처럼 생겨서 통머리들이라고 불렸다고 한다.06 지금도 위성지도를 살펴보면 통머리들이나 멍에앞들이라는 지명들이 있어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소는 『전경』을 통해서도 찾을 수 있다. 상제님께서는 박공우 종도와 태인 보림면 장재동을 지나시다가 길가에 있는 묘(墓)를 보시고 그 혈(穴)이 와우형이나 금혈형(琴穴形)으로 잘못 불리고 있다고 하셨다. 혈명을 잘못 지어서 발음(發蔭)이 잘못되었다고 하시며 어디든지 혈명을 모르거든 용미(龍尾) 없이 조분(造墳)하였다가 명사에게 혈명을 지은 뒤에 용미를 달면 발음이 된다는 말씀을 해주셨다.07 상제님께서는 사람들이 금혈형으로 잘못 알고 있던 혈을 ‘와우형’08이라고 바로잡아 주셨던 것이다.
  장재동은 덕두마을에서 남쪽 직선거리로 1km도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덕두마을과 함께 태남리에 속한 장재동은 백암초등학교 방향으로 나오다가 태남교를 지나 장재울들을 지나면 마을을 바로 찾을 수 있다. 상제님께서 말씀하실 당시에는 덕두마을처럼 태인군 남촌이변면 지역이었으며 ‘장재울’ 혹은 ‘장자울’이라고도 불렸다.09 거대한 소가 여기에서 쉬고 있었다.
  여물을 먹고 여유롭게 쉬고 있는 소처럼 덕두리는 아주 편안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이곳에서 살았던 최덕겸은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이후에도 많은 사람과 함께 치성을 모시며 상제님을 믿고 따랐다. 상제님에 대한 변함없는 그의 성심은 우직한 소의 곧은 성품을 닮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01 행록 4장 8절, 공사 3장 12절, 행록 5장 21절 참조.
02 임남곤, 『정읍향리지』, (전북: 정읍문화원, 2002), p.650.
03 태인지편찬위원회, 『태인지』, (전북: 신아출판사, 2015), p.927.
04 최덕겸 종도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증손자(2012년, 당시 70세)의 인터뷰 내용을 참고하였다.
05 태인지편찬위원회, 앞의 책.
06 한글학회, 『한국지명총람』 권 12, (서울: 한글학회, 2003), p.458.
07 행록 4장 9절 참조.
08 태인지편찬위원회, 앞의 책, p.929.
09 임남곤, 앞의 책, p.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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