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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 둘러보기 : 해태(獬豸)

해태(獬豸)
 
 
연구원 조광희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궁전이나 왕릉 앞에 석수(石獸)를 세워두는 전통이 있었다. 석수의 기원은 중국의 후한(後漢)대로 추정되며 주로 액운을 막는 수호석의 의미로 세워졌다. 대체로 짐승의 모습으로 조각했는데, 사람들이 길하다고 여기는 사자, 낙타, 코끼리와 함께 십이지신이 주로 조성되었다. 중국 고대의 상상의 동물인 해태도 신수(神獸)로 받들어져 중요한 석수로 취급되었다.
  해태를 비롯한 많은 석수들은 각 동물이 가지는 의미에 따라 건물에 배치되는 위치나 기능이 달랐다. 예를 들어 인도에서 유래한 사자상은 8, 9세기 중국의 사찰에서 불법 수호의 의미로 배치되었으며, 산신숭배 사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호랑이는 능묘뿐만 아니라 산신당에도 세워졌다. 그렇다면 영대·본전(靈臺·本殿)건물 앞의 해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 채 놓여있는 것일까?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정의와 법의 상징 
  해태는 다른 말로 ‘해치(貕豸)’라고도 불렸다. ‘치’는 ‘태’라고도 발음되기 때문에 두 단어 모두 같은 의미로 쓰였다, 해치는 순우리말 고어로서 ‘해님이 파견한 벼슬아치’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해는 해님의 ‘해’, 치는 벼슬아치의 ‘치’에서 왔다고 본다, 태양숭배 사상에 따르면 해는 사람에게 복덕을 주고 만물을 생성시키는 근원이다. 또한, 해가 뜨면 귀신이 사라지고 흉악한 짐승은 도망가니 재앙과 액운을 물리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이 밖에도 해태는 신양(神羊), 식죄(識罪)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01
  해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전설상의 짐승으로 정의를 상징하는 신수(神獸)로 여겨져 왔다. 요임금 시대에 세상에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해태는 대단히 영물스럽고, 시비곡직을 판단하는 신령스러운 재주가 있어 성군을 도와 현명한 일을 많이 하였다고 전해진다.02 중국 고대 문헌인 『신이경(神異經; 각종 신비로운 일을 기록한 소설류)』과 『이물지(異物志; 신비로운 상상의 동물 사전)』에 따르면 해태는 동북황(東北荒)에 살며 뿔이 하나로, 성질이 충직하여 사람이 싸울 때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뿔로 받고, 다투는 소리를 들으면 사론(邪論)을 펴는 사람을 문다고 기록되어 있다.03 이처럼 해태는 중국 고대인에게 ‘정의의 동물’로 알려져 왔다.
  고대 중국은 해태의 정의로움을 중시하여 사법기관과 사법관리의 상징으로 해태를 사용해왔다. 특히 사법기관의 수장이 쓰는 관을 ‘해태관(獬豸冠)’이라고 불렀을 정도다. 지금까지도 중국의 법원이나 여러 종합대학교의 법대 앞에는 해태상이 놓여있다. 우리나라도 중국의 영향을 받아 조선 시대 사헌부(司憲府)의 수장인 대사헌(大司憲) 관복(官服)에 해태 흉배(胸背)를 달았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정신이 계승되어 현재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사법연수원에도 해태상이 놓여있다.04
  또 정의를 상징하는 동물답게 ‘정법의 수호자’라는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다. 그 예로써 ‘법(法)’이란 한자를 살펴보면 ‘법(灋)’05을 간략히 쓴 것이다. 여기서 ‘氵’과 ‘去’을 뺀 ‘태 또는 치(廌)’06란 글자는 원래 해치를 의미하는 ‘치(豸)’와 통용되는 글자라고 한다. 다시 말해 ‘법(法)’이란 옛 글자 법(灋)을 간략히 쓴 것이며, 법의 고자(古字) 자체에 원래 ‘해태’(獬豸)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방화신수의 상징
  해태는 ‘정의를 상징하는 동물’이라는 의미 외에도 화재(火災)를 막는 물의 신수(神獸), 재앙을 막는 벽사의 상징으로 궁중에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전해 내려오는 설화에 따르면 해태가 물에 사는 짐승이기에 오행설에 맞추어서 불을 막아주는 영수로 믿어졌다.07 조선 건국 초기 우리 역사에는 해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태조가 지금의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경복궁을 지었는데 궁궐에 화재가 자주 발생했다. 이에 사람들은 관악산이 화기가 있는 화산인 까닭이라고 여겼다. 관악산은 풍수지리상 능선이 타오르는 형상을 한 불기운의 산이다. 조정에서는 화기를 막고자 관악산에다 우물을 파고 구리로 만든 용을 그 속에 집어넣는 한편 궁궐을 출입하는 좌우편 앞에 불을 먹는 영물로 알려진 해치 한 쌍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08
  조선 시대 민간에서는 새해 초에 판화로 찍는 세화(歲畵) 중 해태 그림을 불을 다루는 부엌문에 붙였는데, 이를 문배도(門排圖)라고도 칭한다. 이같이 해태가 불을 다룰 수 있어서 화재를 예방할 수 있다는 믿음은 해방 이후까지도 지속되었다. 단적인 예로, 국회의사당 앞에 있는 해태 석상을 들 수 있다. 국회의사당이 1975년에 준공되자, 월탄(月灘) 박종화 선생이 국회의사당 앞에 해태상을 세워 화재를 예방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마침 해태를 회사 마크로 삼고 있던 해태제과에서 자사의 이미지 홍보를 목적으로 서울대 미대 조소과 교수이자 유명한 조각가인 이석순 선생에게 암수 한 쌍의 해태상을 만들게 해서 기증했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은 70년대까지도 해태가 화재를 막을 수 있다는 믿음이나 속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음을 확인시켜 준다. 이러한 사항들을 종합해보면, 화재를 예방하고자 해태상을 두었다는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09
 
 
국가개혁과 왕의 위엄을 상징
  광화문 해태는 조선 후기 경복궁이 중건될 때 같이 세워졌다. 해태가 처음 세워졌던 곳은 광화문에서 80m 정도 떨어진 육조거리 조선의 관공서들이 있었던 곳이다. 즉 지금의 정부 청사가 있는 곳이 원래 해태가 있던 자리이다. 그런데 해태는 왜 궁궐 바로 앞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졌을까? 임진왜란 후 불타버린 경복궁을 중건하고 그 앞에 해태상을 세운 것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었다. 고종이 즉위할 당시 조선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오랜 세도 정치로 왕권은 추락했고 사회적 혼란은 극에 달했다. 흥선대원군은 이를 타개하고자 경복궁 중건을 천명(闡明)했다. 법궁을 재건하여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했었다.10
 
 

  그리고 그 상징으로 광화문 앞에 해태를 세웠다. 해태가 서 있는 곳부터는 왕의 경계였으며 권위를 나타냈다. 신하들은 궁궐의 정문인 광화문 앞쪽에서부터 예를 갖춰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정의를 지키는 해태를 지나오면서 관리들 스스로 탐욕스러운 마음을 버리고 왕권에 대한 경외심을 갖도록 유도한 것이다. 『고종실록』을 통해서도 그 속뜻은 드러난다.11

전교하기를 “대궐 문에 해태를 세워 한계를 정하니, 이것은 곧 상혼(象魂)이다. 조정 신하들은 그 안에서는 말을 탈 수가 없는데, 이것은 공경을 표하는 뜻에서이다. 조금 전에 출궁할 때 보니, 종승인(從陞人)이 그 안에서 말을 타던데 이것이 어찌 사체(事體)와 도리에 맞겠는가? 전후에 걸쳐 신칙한 하교가 얼마나 엄중했는데도 한갓 형식이 되어버렸으니 이와 같이 하고서 어떻게 기강이 서겠는가? 지금부터 사헌부에서는 규찰하여 계문하라.”12
 
  이후 조선은 일본에 국권을 침탈당하게 되고 해태는 일본의 민족문화 말살 정책의 피해자가 된다. 일본은 전차선로를 놓는다는 명목으로 해태를 해체해 궁궐 한쪽에 버려뒀다. 해태가 다시 궁궐 수문장으로 서게 된 것은 지난 1968년이다. 하지만 산업화의 물결 속에 오랜 세월 다시 잊혀지게 된다. 그러던 중 2008년 서울을 대표하는 동물캐릭터로 선정되면서 오늘날 대한민국 수도를 상징하게 되었다.
 
 
 
도장에서 해태의 의미
  지금까지 동양문화와 우리 문화의 역사적 전통에서 해태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상상속의 동물 해태는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복합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하나의 의미로 규정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특히 해태와 같은 석수들은 애초에 무엇인가를 수호하고 보좌하는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독립적이고 단독적인 의미로 파악할 수 없다. 수호하는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변하고 한 가지가 아닌 여러 가지의 중첩된 의미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광화문 앞의 해태는 경복궁을 빼놓고 그 의미를 논하기 힘들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순진리회 수도인에게서 본부도장을 제외하고 해태의 의미를 얘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영대·본전과 시학원, 시법원, 정심원에서 공부가 24시간 끊임없이 돌아갈 때 해태는 수도인들에게 정의를 상징하고 정법을 수호하는 영물로 인식될 수 있다. 또 영대에 구천상제님과 천지신명이 모셔져 있기에 해태가 상제님이 계신 경계를 수호하는 파수꾼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치로 도장의 모든 석상과 물건들은 저마다의 역할과 의미를 부여받는다. 수도인 역시 마찬가지다. 해태는 영대가 있어서 그 의미가 생기듯이 우리 수도인들도 상제님으로부터 도주님 그리고 도전님으로 이어지는 종통과 법이 있어서 도를 닦을 수 있다. 이러한 이치를 깨달아 성지우성하고 면이수지하는 자세로 도장 수호와 수도 생활에 소홀함이 없어야 하겠다. 
 

 
참고문헌
박영순, 김은정, 박재인, 「서울상징 해치가 가지는 의미와 특성」, 『한국디자인트렌드학회』 25, 2009.
이성준, 「조선 후기 獬豸像의 도상 변천 : 광화문 해치상을 중심으로」, 『한국미술사연구소』 39, 2012.
이영섭, 「한국 해태의 形象考 : 中國으로부터의 변천 과정을 중심으로」, 『중국어문학논집』 95, 2015.
정성권, 「해치상(獬豸像)의 변천에 관한 연구 : 광화문 앞 해치상의 탄생과 조성배경을 중심으로」, 『서울학연구』 51, 2013.
한국문화상징사전편찬위원회, 『한국문화상징사전 2』, 서울: 동아 출판사, 1995.     
한국 문화재단 공식 블로그 https://blog.naver.com/fpcp2010
문화유산채널 K-HERITAGE TV
 
 
 

01 한국 문화재단 공식 블로그 (https://blog.naver.com/fpcp2010)
02 박영순, 김은정 박재인, 「서울상징 해치가 가지는 의미와 특성」, 『한국디자인트렌드학회』 25 (2009), p.86.
03 한국문화상징사전편찬위원회, 『한국문화상징사전 2』, (서울: 동아 출판사, 1995), p.734. 
04 이영섭, 「한국 해태의 形象考 : 中國으로부터의 변천 과정을 중심으로」, 『중국어문학논집』 95 (2015), p.273.
05 법의 옛 글자
06 네이버 한자 사전 1. 해태(獬豸: 시비와 선악을 판단하여 안다고 하는 상상의 동물) 2. 외뿔 양
07 한국 문화재단 공식 블로그 https://blog.naver.com/fpcp2010
08 문화유산채널 K-HERITAGE TV
09 이영섭, 앞의 글, p.274.
10 정성권, 「해치상(獬豸像)의 변천에 관한 연구 : 광화문 앞 해치상의 탄생과 조성배경을 중심으로」, 『서울학연구』 51 (2013), pp.206-208.
11 이성준, 「조선 후기 獬豸像의 도상 변천 : 광화문 해치상을 중심으로」, 『한국미술사연구소』 39 (2012), pp.108-109.
12 『高宗實錄』 卷七 十月 七日(己亥)條. 敎曰 “闕門立獬豸爲限 卽象魏也 朝臣不得騎馬於其內 此爲式路馬之意 俄於出宮時見之 則從陞人之乘馬於其內 是豈事體道理乎 前後飭敎 何等截嚴 而徒歸文具 如此 而何以立紀綱乎 從今以後 憲府糾察啓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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