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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역사코너 : 감천도장에서 도전님께서 행하신 교육사업과 구호자선사업

감천도장에서 도전님께서 행하신 교육사업과 구호자선사업
 
- 학교와 병원을 중심으로 -
 
 
연구위원 송하명
 
 
 
 
  현재 대순진리회는 3대 중요사업인 구호자선, 사회복지, 교육사업을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의 원리로 실천하고 있다. 그런데 이 3대 중요사업의 토대는 도전님께서 태극도를 영도하시며 도주님께서 재세 시 펼치신 공익사업을 계승 발전시켜 시행한 성업(聖業)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성업(聖業) 중 중요한 내용을 우리는 여주본부도장 대순성전 3층 대순성적도(大巡聖跡圖)에서 볼 수 있다. 대순성적도는 상제님·도주님의 일대기와 도전님의 성업(聖業)을 모신 성화(聖畵)이다. 도전님의 성업이 모셔진 위치는 원위(元位) 우측 ‘상제님의 강세와 유년시절’ 성화와 도주님 성화 사이인데 총 8폭이다. 4폭은 종통계승 이후의 도전님 성업, 즉 태극도를 영도하실 때의 성업과 도전님께서 공부하신 수리사이고, 나머지 4폭은 대순진리회 역사를 도장 건립을 통해 보여주는 성화이다.
  도전님의 성업 중 첫 번째 그림은 학생들이 학교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감천고등공민학교와 아기를 업은 엄마가 의료원을 방문하는 모습이다. 이것은 도전님께서 태극도를 영도하시던 당시 교육사업으로서 학교를 운영하고 구호자선사업으로서 병원을 운영하였으며, 이 사업이 상제님의 천지공사, 도주님의 진법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려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태극도에서의 교육사업과 구호자선사업 등의 사회사업이 현재 대순진리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구호자선, 사회복지, 교육의 3대 사업으로 확대되어 종단의 중요사업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도전님께서 태극도를 영도하실 때의 성업인 여러 공익사업, 특히 교육사업으로서의 학교의 건립과 운영, 그리고 구호자선사업으로서의 병원 운영에 대해 보다 더 자세히 알아본다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순진리회의 3대 중요사업이 상제님의 유지, 도주님의 유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다시 한 번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학교의 설립과 운영
 
  도전님께서 종통을 계승하신 후인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종단은 내외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도주님 재세 시에 배도를 자행한 난동자들이 도주님의 부재를 틈타고, 4.19와 5.16 등으로 인한 급격한 사회변동과 혼란을 이용해 종단을 음해하여 도전님께서 많은 파란곡절을 겪으신 것이다. 하지만 도전님의 영도 아래 도인들이 일치단결하자 바람은 불다가 그치기 마련인 것처럼 모든 일은 잘 마무리 되었다.01
  이후 도전님께서는 종교활동을 더욱 활성화하시는 한편 도의 체계를 정비하셨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63년 6월 12일부터 시행된 사회단체등록령에 따라 태극도를 종교단체로 등록하면서 태극도 『도헌』과 규정(規定)을 제정하셨고, 그해 10월 20일에 종단을 재단법인으로 인가를 받으신 것이다.02
  그와 동시에 도전님께서는 공민학교(초등학교)를 건립하고 시장, 병원도 세우셨는데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훈시하신 바 있다.03
 
▲ 천덕공민학교 위치(출처: 다음지도)
 
 
  도주님께서 화천하신 후 파란곡절을 말할 수가 없었다. 밖에서는 태극도가 무너져 다 없어진다고 했지만, 안에서는 요동 없이 빈틈없이 공부하고 아무 일이 없었다. 포덕은 더 되고 더 잘 되었다. 감천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고등공민학교04도 짓고 시장, 병원도 세웠다.05
 
  교육사업은 1956년 4월 도주님의 명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학교에서는 정식 인가를 받지 않아서 정식 건물이 없이 각 방면의 회실을 돌면서 아이들을 나누어 가르쳤다. 이에 대해서 도전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다.
 
 
학교 관계는 도주님께서 재세 시 아주 신경을 쓰셨다. 밑에 사람을 만들어 전학원(典學院)을 두셨다. 다른 것은 안 두셔도 그것은 두셨다. 감천에 있는 회실을 교실로 쓰면서06 교장을 학정(學正), 선생을 학무(學務)라 하여 두시고 사람을 가르치게 하셨다. 우리는 도주님의 뜻을 받아서 믿고 나가는데, 도주님께서 얼마나 학교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쓰셨는가07
 
도주님 재세 시, 감천에 있을 때 위에서 다른 것은 못했어도 부산 감천에 회실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을 이용해서 직접 학교를 운영하셨다. 모든 조건이 안 좋았지만 직접 지시하셨다. 총무부니, 교무부니, 수도부니, 그런 부서는 옳게 있지도 않았다. 그래도 전학원(典學院)이라는 부서는 두셨다. 그것이 학교다. 아이들 가르치는 곳이 있었다는 것, 그것을 잘 생각해야 된다. 화천하시고 총무부, 교화부, 수도부, 그런 것을 만들었다.08 전학원은 이런 부서가 있기 전에 도주님께서 최초로 두신 것이다. 각 회실을 교실로 만들고 회실에서 학교 나온 사람이 선생, 교원이 되어 학교처럼 아이들을 가르쳤고,09 명칭을 학무(學務)라고 하셨다.10
 
▲ 실시 중인 사업, 『태극도 안내서(1966년)』
 
 
  이와 같은 도주님의 뜻을 누구보다도 정확히 알고 받드셨던 도전님께서는 1963년 정식 인가를 받아 천덕공민학교라는 현판을 걸어 사용하셨다. 이후 도전님께서는 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고 중학교까지 계획하시며 학교 부지 마련을 위한 예산까지 확보하셨는데, 이는 1967년 3월, 고등공민학교 편입생을 모집하는 공고가 게시된 사실11과 태극도 재단이 1968년 1월 25일 감천고등공민학교를 정규 중학교로 승급시키려고 3백여 만 원의 예산을 확보했다는 기록으로 확인된다.12
  도전님의 교육사업은 1966년 『태극도 안내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안내서에는 태극도 사업 중에 전도사업 외 사회교육, 자선 구호 등 공익사업으로서 실시 중인 사업과 계획 중인 사업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실시 중인 사업 중 교육사업은 학비 없이 감천고등공민학교를 경영하는 것과 독서실 설립 등이 있었다. 교육사업이 상제님의 유지와 도주님의 유법을 받들고 나가는 것이었기에 어려운 상황에서도 교육사업을 꾸준히 추진 시행하신 것이다. 다음의 훈시는 이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상제님의 유지(遺志)를 받들고 도주님의 유법(遺法)을 받들고 나가야 한다. 이것이 종단의 생명이다. 학교 짓는 일은 유법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학교에 뜻을 두고 있었다. 도주님 화천하시고 나는 학교에 관해서는 잘 받들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학교를 없애지도 않았고 고등공민학교 인가를 얻었다. 그 뒤에 중학교도 만들려고 땅도 봐 두었었다. 재정도 있었는데 못하고 나왔다.13
  감천 고등공민학교는 1969년부터 정규 중학교로서 면모를 갖추게 될 전망이었다. 그런데 도전님께서 이궁하신 후, 1969년 10월 31일 재단 이사장이었던 류철규는 지물포·철물점을 매각 처리하고 미곡상회를 결산 처분하여 대여하였고 고등공민학교는 폐쇄 조치하였다.14 이는 감천도장에서 도전님의 종통을 부정하며 난동을 일으킨 일부 임원들이 상제님의 유지와 도주님의 유법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을 잘 보여주며, 이러한 무지에서 도전님의 종통을 부정하게 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다음의 도전님 훈시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옛날에 부산에서 그랬다. 부산 태극도 때 쪽지고 머리 묶고 비녀 찌르고 해야 도인이라고 했다. 그걸 내가 다 자르게 했더니 불평이 터져 나왔다. 시대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 성인(聖人)도 시속(時俗)을 따르라고 했다. 잘랐다고 운수 못 받는 거 아니다. 무학도통이라고도 했는데, 무학도통이 공부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15 
 
그 당시 도인들은 착각을 했다. 팔부지(八不知)라고 무학도통(無學道通)이라 해서 ‘배우지 않아야 도통을 한다’, ‘도인은 배울 필요없다’, ‘도통 받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무학도통이란 말은 위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다. 비결에 있는 이야기다. 부산 감천에 도인이 5,000명 남짓 모여 살고 있었기에 고등공민학교를 충분히 해나갈 수 있었다. 선생 월급도 주고 공책과 책, 모든 것을 무료로 해 주었지만, 학교를 안 보냈다. 임원들이 무학도통이라고 생각해서 애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이런 것이 진리에 대한 착각이다. … 그때 내수 도인들은 쪽을 지르고, 처녀들은 머리를 땋아서 댕기를 했는데, 그것을 안 하면 도인이 아니라고 임원들이 그랬다. 내가 한번 하루는 다 벗겨 버렸다. 머리를 다 자르게 하고 찌지고 볶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그때 임원들은 그런 것에 불평을 가졌다. 자기네는 무학도통이라 하는데 나는 아니라 하고, 자기들은 쪽 지르고 댕기 땋게 하는데 나는 머리 깎게 하니 여기부터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때부터 내가 불신당하기 시작한 것이다.16
 
  도전님께서는 학교 교육에 최선을 다하셨다. 당시 어려운 환경에서도 학생들에게 무료로 노트와 연필을 사주셨고, 교사들에게는 월급을 주면서 일을 시키셨다. 나중에 중학교를 운영하기 위하여 부지도 준비하셨지만, 도전님께서 이궁하시자 배도자들이 이를 다 처분한 것이다.
 
도주님 화천하신 이듬해부터 경찰서 불려 다니면서도 할 일은 다 했다. 위의 뜻을 받들어 내가 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여 인가를 받았다. 그 동네 도인들이 5,000호였는데 5,000호면 충분했다. 무료로 노트와 연필까지 사주어도 안 다녔다. 한편에서는 무학도통이라고 해서다. 그 당시 성금이 다해야 한 달에 20만 원이었다.17 임원들이 지방에 다녀오면 오는 날 한때 밥을 먹였지만, 어디 나갈 때는 조석 한번 먹이기 어려웠다. 그래도 교사들을 대학교 나온 사람들로 숫자 맞추어 다 들이고 월급도 주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다 할 수 있다. 병원도 지었다. 약값하고 실비만 내면 되게 했다. 도인의 편리를 위해서 할 것은 다 해보았다. 5,000호가 서로 합심만 되면 다 됐다. 시장도 만들고 종사원들에게 쌀을 주어18 가족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했다. 그러면서 중학교도 해 보려고 부지도 사 놓았었다. 지금은 태극도에서 다 팔아 썼다. 그때는 부동산이 있어도 자본이 있어야 허가를 낼 수 있었다.

2. 병원 설립과 운영
 
  1966년 『태극도 안내서』에는 당시 실시 중인 사업으로 준(準) 구호의원인 감천의원을 운영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1967년 《태극도월보》에는 태극도 재단의 사업 계획과 예산이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에 사회교육사업, 구호자선사업이 있고 구호자선사업 안에는 병원주택 신축, 경로당 증축, 위생시설, 도로확장, 주택보조 등이 보인다.
 
▲ 특수사업계획서 (《태극도월보》 2호, 1967.2)
 

  병원은 도주님 재세 시 정식 병원이 아닌, 작은 규모의 의료원으로 시작되었다. 도전님께서는 종통을 계승하시고 1963년쯤 감천의원을 신설하시고 도인들의 위생과 건강을 돌보셨다. 이 당시부터 감천의원은 준 구호의원으로 운영되고 있었다고 추측된다.19 1966년의 진료비 미수금이 십만여 원이며 환자들의 90% 이상이 병원으로 오기 전 근처의 약방이나 무허가 의원을 찾아 몸에 해로운 치료나 투약을 하여 많은 환자가 치료 시기를 놓치거나 중태에 빠지는 등 큰 고충이 있으니 감천의원을 무료 종합병원으로 만들어 보자는 홍보문은20 이를 잘 보여준다. 감천의원은 도전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약값하고 실비만 내면 되도록 구호자선사업의 일환으로 운영되었던 것이다. 결국, 병원 운영은 도주님께서 무극도 시기에 안면도와 원산도에서 간척지, 염전을 만들어 구세제민하셨던 일과 같은 맥락에서 양위 상제님의 유지와 유법을 도전님께서 계승하신 것이다.
  도전님께서는 1967년 병원 주택을 신축하고 수술실을 설치하여 수도인과 동민의 보다 안전한 위생관리의 예방과 치료에 손색이 없도록 하셨고21 1968년 2월에는 서울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던 의사 김원섭22을 감천으로 내려오게 하셔서 제대로 된 병원으로 기능 하도록 만드셨다.23
  그러나 그 후 감천의원에 대한 아무런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1968년 2월 이후 일부 임원들의 소요로 병원 운영이 큰 관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도전님께서 이궁하시자 의료사업도 더는 확대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처럼 도전님께서는 태극도를 영도하시면서 사회교육사업과 구호자선사업, 특히 학교와 병원의 설립과 운영에 중점을 두셨다. 천덕공민학교와 감천고등공민학교를 세워 빈곤한 청소년들이 교육의 기회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하셨고, 감천의원을 운영하시어 당시의 열악한 환경에서 빈곤층의 위생과 건강을 챙기신 것이다.
대순진리회 창설 이후 도전님께서는 이러한 사업을 더욱 규모 있게 구호자선사업, 사회복지사업, 교육사업으로 확대하셨다. 도전님께서 사회복지의 개념이 일반화되지 않은 1970년 초반에 사회복지사업을 제시한 것은 시대를 앞서는 혜안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현재 사회복지사업으로는 대진의료재단의 제생병원과 대순진리회복지재단의 대진요양병원과 대진요양시설, 교육사업으로는 대진대학교와 6개의 고등학교 그리고 구호자선사업으로는 청년회와 부인회를 중심으로 한 대진국제자원봉사단의 여러 구호, 봉사, 자선 활동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대순진리회의 3대 중요사업의 근간에 태극도 영도 시(時) 도전님께서 상제님의 유지와 도주님의 유법을 계승하여 전개한 사회교육사업과 구호자선사업이 있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으며 3대 중요사업이 상제님의 천지공사와 도주님의 진법에 해당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01 1960년 4·19와 계엄의 혼란기를 틈타 김용화가 7월에 도전님께 사기·횡령·폭력 등 10가지 혐의로 누명을 씌어 도전님께서 11월까지 옥에 갇히신 적이 있었다. (11월 무죄판결) 또 1961년 5·16혁명 직후 6월 김용화가 다시 포고령 위반(무허가 집회), 용공단체 조직 등으로 도전님을 모함하여 도전님께서는 부산 육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시다가 12월에 무죄로 석방되셨다. 김용화는 도주님 재세시에 미곡상회의 쌀을 횡령하여 출도된 자이다.
02 이하 이 글에서의 날짜는 대부분 양력을 기준으로 기록하였다.
03 1991년 9월 28일 훈시.
04 고등공민학교(高等公民學校)는 초등학교(또는 공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사람에게 중학교 교육을 실시하는 학교였다. 수업 연한은 1∼3년이다. 1948년에 실시되었다가 중학교 교육의 보편화로 점차 축소되었다. 한편 공민학교(公民學校)는 초등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초등교육을 시키기 위해 설립된 교육기관이었다. 1946년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국민들의 문맹 퇴치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초등학교가 널리 보급되면서 점차 사라졌다.
05 도장 바로 뒤쪽인 오감에 생선가게, 야채가게, 고무신가게 등이 있었다. 규모는 지금 여주본부도장의 A동 규모 정도로 크지 않았다. 병원도 작은 규모로 하나 있었는데 병원의 이름은 없었고, 병원장은 김재복이었다.
06 당시 회실에서 야간에 포정(선사)·포령(교정)들이 도인 자녀들을 모아 가르쳤다고 한다. 일종의 야학 같은 것으로서 자기 방면의 자녀들만 가르쳤다.
07 1992년 1월 11일 훈시.
08 도주님 화천 후 도전님께서 부서를 설치하셨으니, 총무부, 수도부, 교화부, 전도부 등이었다.
09 도주님 재세 시에는 회관이 없었고 회실만 있었다. 그 회실에서 야간에 칠판을 걸어두고 한글 등을 가르쳤다. 도주님 화천 후 2∼3년 뒤에 도전님께서는 감천의 오감에 회실을 따로 만들게 하시고(6간 규모) 그곳을 학교처럼 사용하셨다. 그 회실은 각 방면에서 각자 만들었다고 한다.
10 1992년 2월 8일 훈시.
11 응모자격은 1학년은 초등학교 졸업자 또는 공민학교 졸업자이며, 2·3학년은 이에 상당한 자격 또는 실력이 있는 자로 공고했는데, 특전으로 실력이 우수한 이에 대한 장학제도가 있었다. 《태극도월보(1967)》 3월호, ‘감천고등공민학교 각 학년 편입생 모집’, p.16.
12 《태극도월보》 7호, ‘감천고등공민학교 정규 중학교로 승급기로’, p.13.
13 1992년 2월 8일 훈시.
14 《태극도월보》 27·28 합본 호, ‘학교 폐쇄와 사업체 정리’, p.15.
15 1992년 1월 11일 훈시.
16 1992년 2월 8일 훈시.
17 2015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730만 원 정도가 된다. (http://ecos.bok.or.kr, 한국은행 경제통제시스템 활용)
18 월급으로 쌀과 담배를 주셨다고 한다.
19 『태극도 안내서』 (1966), p.12.
20 《태극도월보》 2호 (1967), p.16.
21 《태극도월보》 4호 (1967), p.16.
22 김원섭은 당시 서울 방면 김영진 선감의 수반으로 서울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다가 도문에 들어왔다. 입도 후에 그는 부암동 집을 팔지 않고 1968년 3월에 부산으로 내려와 감천도장에서 운영하는 감천의료원의 전문 양의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감천의료원은 개설 이래 전문 의사가 없어 매우 어렵게 운영하던 중 김원섭이 감천동으로 내려오게 됨으로써 그제야 병원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종단역사연구, 「지명답사기: 서울 부암동」, 《대순회보》 194호, 참조)
23 《태극도월보》 8호 (1968),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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