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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역사코너 : 대순진리회 창설 과정

대순진리회 창설 과정
 
 
연구원 송하명
 
  『대순진리회요람』을 보면 도전님께서 1969년 4월01에 전반적인 기구를 개편하시고 종단 대순진리회를 ‘창설(創設)’하신 것으로 나온다.02 하지만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보면 이때 창설이 갖는 의미는 대순진리회의 창설이 ‘완료된 시점’이 아닌 ‘시작된 시점’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도전님께서 1968년 6월 24일 감천도장을 나오신 후 11개월 만인 1969년 4월에 서울 성동구 중곡동에 도장(道場)을 건설하기 위한 개토(開土)03작업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1969년 5월 16일에 본전 정초식(定礎式: 기초공사 완료 시 행하는 의식)을 행하신 이후 1971년 5월 24일에 영대봉안치성을 모셨다. 1971년 말에는 종의소, 숭도문, 임원실, 정·진급실, 내정 등의 건물과 단청까지 마무리하심으로써 도장으로서의 기본 형태를 갖추게 된다. 도전님께서는 1972년 1월 1일 자시(子時)에 대순진리회 현판식을 거행하시는 한편, 도의 체계와 제도를 개편하고 대순진리회를 공식적으로 공포(公布)하셨다.04 이처럼 대순진리회의 창설 과정은 1969년 4월부터 1972년 정월까지라고 볼 수 있다. 도전님께서는 도장 창건(創建)05공사를 마무리하는 그해에 본전 뒤의 배꼽바위 터를 구입하시는 한편 본전을 보수하고 증축하셨다.
  대순진리회 창설 과정을 살펴보면서, 공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 시기에 참여했던 분들의 인터뷰를 통해 이글을 구성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도전님께서 서울 중곡동에 도장 터를 잡고 대순진리회를 공포하시기까지 있었던 일들과 공사 과정이 담긴 사진을 살펴보는 데 의의가 있을 것이다.
 
 
1. 천장길방지 중곡도장 터 매입
  도전님께서는 1968년 6월 24일 감천도장에서 이궁하신 후 수리사(修理寺)에서 49일 공부를 마치셨다. 그때가 1969년 3월 중순 이후였다. 수리사를 나오신 도전님께서는 임원들에게 도장 터를 알아보라고 하셨다. 임원들은 도전님의 명을 좇아 서울 관악산과 말죽거리, 경기도 시흥 등을 살펴보았다. 임원들이 관악산 쪽의 땅이 고르고 좋다며 도전님께 그곳을 살펴보실 것을 청했다. 도전님께서 “그럼 관악산 쪽에 계약을 한번 해봐라”고 임원들을 보내셨다. 그런데 저녁 때쯤 임원들이 풀이 죽은 채 돌아왔다. 땅이 몇만 평인데 사려고 하면 한 덩어리를 통째로 사야 하고 가격이 너무 비싸서 계약을 못했다고 말씀드리니, 도전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신 듯했다.
  1969년 3월 6일 도전님께서는 서울시 광진구 구의동 부근에 거처하시며 도주님 화천치성을 모신 후 임원들에게 “오늘은 도장 터를 찾아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10여 명의 임원을 데리고 현재 아차산역 앞의 언덕으로 가셨다. 당시 중곡동은 전부 자갈밭과 포도밭이었다. 그곳에서 도전님께서는 중곡동 아차산 밑을 바라보시면서 저기가 좋다고 말씀하셨다. 임원들을 대동하고 아차산 영화사(永華寺) 쪽으로 오르셔서 용마산 쪽으로 산을 타시면서 도장 자리를 관망하셨다. 이때 팔(八) 자처럼 된 도장 자리를 보시면서 “아! 좋다” 하시며 가지고 오신 치성 음복을 임원들과 나누어 드셨다.06
  도전님께서는 부산방면 서대원 선감,07 연천방면 안준순 교감,08 청주방면 전승천 교감09 세 사람을 용마산 아래쪽으로 보내서 도장 자리를 확인하고 오라고 하셨다. 세 사람은 중곡동 긴고랑 쪽으로 올라가서 조그마한 막대기 하나를 꽂아놓고 내려와서 도전님께 보고를 드렸다. 도전님께서는 바로 그 땅의 주인을 확인해서 구매하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그 땅을 다 사라고 하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을 많이 하셨다. 도장 터로 지정하신 땅의 주인이 젊은 대학생이었는데 다행히 천 평만 가지고 있었다. 도전님께서 빨리 사라고 하셔서 땅값을 깎지 않고 달라는 대로 주어서  어렵지 않게 계약이 성사되었다. 도장 터를 구입하고 며칠 후 토지구획정리10를 한다는 기사가 신문에 나면서 도장 주위의 땅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2. 도장 터 개토
  도장 터 구입 후 제일 먼저 임야를 밭으로 용도 변경하였다. 그리고 1969년 4월 개토작업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중곡도장 공사가 추진되었다. 당시 도장 터는 평평하지 않은 언덕이었다. 더구나 도장 건물이 들어설 곳은 험준한 골짜기였는데, 특히 숭도문 앞과 영대 자리는 골이 깊어 사람이 다니기 힘들었다. 종무원 사무실이 들어설 마당 앞쪽도 비탈진 몇 길 낭떠러지였다. 도전님께서는 도장 앞의 땅도 구입하셔서 산을 닦는다고 하시며 옆 산의 돌과 흙으로 메꾸셨다. 또한, 그 주위 전체가 개울이어서 축대를 세 번이나 쌓아 전부 메꾸셨다. 발도 못 붙이던 험한 자리들이 이렇게 닦아 놓고 보니 숭도문과 영대 자리가 되었다.11
 
▲ (그림 1) 서울 광진구 중곡동의 중곡도장 (다음지도)
 

  당시 도인들은 공사할 때 먹을 것이 많지 않아 근처 큰 시장에 가서 채소 이파리 등을 주워 와서 소금과 함께 밥을 먹으면서 공사를 받들었다. 그때는 도전님을 따라온 도인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공사비도 많이 부족했다. 도장공사를 할 때 도인들이 하루 세끼는 먹었지만, 도전님께서는 국수나 빵 같은 참을 주지 못해서 많이 걱정하셨다. 이 공사에 직접 참여한 임원들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다.
  1969년 어느 날 이재근 선감은 중곡동에 도장을 짓기 위해 감천동에서 힘을 좀 쓰는 사람 7명을 뽑는다고 해서 서울로 올라왔다. 초기에는 굴착기(포크레인)가 땅을 파면 뒤처리만 하면 되기 때문에 사람이 많이 필요하지 않아 7명만 왔었다. 하지만 땅이 맷돌 같아서 굴착기 날이 들어가지 않고 불꽃만 튀기자 굴착기 기사가 못하겠다며 가버렸다. 그래서 다시 부산에 연락하여 추가로 30여 명이 더 올라왔다. 이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숙소를 정하는 것이었다. 숙소는 도장 앞의 양계장을 빌려 얇은 합판만을 서로 붙여 만들었고 난방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리고 작업에 필요한 손수레, 삽, 곡괭이를 구입하였다. 당시의 모든 작업은 도인들이 직접 손으로 해야 했다. 
  도인들이 곡괭이로 땅을 파는데 지반(地盤)이 암반이라서 쉽게 들어가지 않아 힘들어했다. 그러나 인근의 주택공사 현장은 땅을 “뻥! 뻥!” 폭파해서 파고 있었다. 이것을 아시고 도전님께서 도인들에게 “우리도 저렇게 작업을 하는 게 어떠냐?”고 물으셨다. 그러자 도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이구동성으로 “저희가 정성 들여 직접 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도전님께서는 “그래 맞아. 신명을 모시는 장소이기 때문에 폭음소리가 나면 안 되지. 사회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 숙맥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도 정성스럽게 해야 돼”라고 말씀하셨다.12
  도장공사 책임자였던 윤영준 보정에 의하면, 처음에는 손수레 10여 대와 큰 해머 10개, 그리고 몇 명 되지 않은 인원을 동원해서 그 터를 닦았다. 물론 중장비를 이용해서 하면 쉽게 끝날 일이었지만, 그때는 공사비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어서 모든 일을 일꾼들 손으로 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얼마 안 되는 공구들이 하나둘씩 부러졌고 그때마다 도인들은 대장간에서 몇 번이나 수리해가면서 터를 닦았다. 처음에는 야산에 불과해 보였던 중곡도장 터가 도전님의 명에 의하여 사람들의 정성이 들어가자 점차 천장길방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중곡도장 공사 때 일꾼들은 돈이 턱없이 부족해서 먹는 것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 지방에서는 한 푼 생기면 한 푼 가져다 드리고 두 푼 생기면 두 푼 가져다 드리는 실정이었다. 더구나 올라온 돈들은 모두 공사 물품을 구입하는 데 들어갔다. 그렇지만 그 돈을 한 가지 물품을 구입하는 데 모두 사용할 수는 없었다. 도전님께서는 “골고루 구입해라. 한 가지만 사서 한 가지만 하면 다른 것은 손을 놓지 않겠느냐”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번 돈이 들어오면 여러 물품을 똑같이 구입해서 공사를 했다. 당시 도전님께서 어떻게 공사를 진행하셨는지는 다음의 훈시 말씀에 잘 드러나 있다.
 
중곡도장 지을 때 20만 원에, 일하는 사람이 30명이고, 호수는 1,000호 정도였다. 우선 돈 되는 대로 쌀 사고, 철근 사고, 콘크리트 사고 하는데, 20만 원을 쓰고 나면 어디선가 20만 원이 또 들어왔다. 그래서 20만 원 갖고 지을 수가 있었다. 절대 무리해서 하지 않았다. 선금을 쥐고 해야지 공사를 마치면 지불하겠다고 빌려서 쓰다 보면 결국은 하지도 못하고 죄만 짓게 된다. 모아진 성금으로 지어야지, 빚내서 지어놓고 나중에 성금 모아서 해결하면 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형편대로 해도 된다. 안 되지 않는다. 많으나 적으나 그것이 어떤 돈이고 얼마만큼 어려운가를 깨달아야 한다.13
 
▲ (그림 2) 1969년 말 중곡도장터와 본전 3층 건물
 
 
  일꾼들은 현장에 건축 재료가 부족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껴서 사용하였다. 일꾼들은 시멘트를 많은 양의 흙과 백회에 섞어서 블록을 직접 찍었다. 꼭 사야 할 것은 샀지만 모든 것을 손수 만들어 쓰다시피 하였다. 당시 공사는 블록을 찍어서 벽까지 옮겨 놓을 동안 부서지지만 않으면 되었다. 시멘트의 함량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흙으로 쌓은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건물의 무게를 버틸 힘이 부족했다. 그래서 1972년 중순쯤 본전건물을 다시 수리하였다.14
  당시의 모든 도장공사는 도전님의 직접적인 명에 의해서 행해졌다. 도전님께서 지시하신 공사가 아닌 것은 모두 헐렸다. 도전님께서는 “도장에 들어와서 내가 시키지 않는 일은 놀아도 하지 마라. 할 일이 없으면 방에 들어가서 놀아라. 자기 맘대로 하는 건 필요 없다”고 항상 분부하셨다. 목수들에게도 “먹줄을 놓아서 벽돌을 쌓아라” 명하시고 벽돌이 굳고 나면 나와서 보신 후 잘못 쌓았으면 헐라고 하셨다. 일꾼들은 시멘트가 굳기 전에 미리 말씀하지 않고 왜 나중에 말씀하셔서 아까운 재료를 버리게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일을 서너 번 겪고 나니, 도장공사는 물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이 도전님의 분부대로 이루어져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 뒤로는 열 번이면 열 번, 스무 번이면 스무 번 도전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셔도 “네!”라고 대답하며 모든 일을 처리하게 되었다.15
  이 공사를 할 때 부산 감천의 일부 도인들이 중곡동에 올라와서 보고 갔지만 많은 이들이 올라오지 않았다. 부산에서 성(誠)을 모시던 사람들이 중곡동 공부16가 시행되자 공부를 위해 오고 갔었지만 나중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으니, 성심(誠心)이 부족하면 따라갈 수 없는 길임을 알 수 있다.
 
 
3. 영대 봉안
  도전님께서는 1969년 4월에 도장 터를 마련하시고 5월 16일에 본전 정초식을 올리셨다. 약 3개월 후인 8월 24일에 본전 상량식(上梁式)17을 하여 1970년 1월에 본전 3층을 준공하고 도주님 탄강치성을 모셨다. 본전 건물은 3층 영대, 2층 봉강전, 1층 대순성전의 구조로 되어 있다.(그림 2) 이때의 본전은  열악한 환경과 재정으로 공사 재료를 제대로 쓰지 못한 채 건물만 올라간 상태였다. 2년 후인 1972년에 본전 건물의 벽을 허물고 새롭게 쌓아 1층을 더 넓히고 2층은 중간기와(그림 5)를 놓아 전혀 다른 형태가 되었다.
 
▲ (그림 3) 1971년 말에서 1972년 초의 담장을 두른 중곡도장과 배꼽바위
 
 
▲ (그림 4) 1971년 초, 숭도문 정초식 전(前)의 중곡도장
 

  그림 3의 도장 사진은 1971년 말 도장 밖의 땅을 더 구입하고 담장을 만든 모습이다. 도장 위로 배꼽바위가 보이는데 공사 당시에는 배바위, 혹은 복바위라고 하였다. 옥녀봉 아래의 배꼽바위는 풍수적으로 선녀가 누워있는 형상에서 배꼽에 해당한다. 도전님께서는 1972년 6~8월쯤 그 배꼽바위 터를 구입하셨는데, 바위 밑에서 샘물이 쫄쫄 흐르고 있었다. 물맛을 보니 차갑지 않고 약간 미지근해서 마치 엄마 젖 같았다. 도전님께서는 “이게 젖줄이기 때문에 물이 차가우면 죽은 젖이다. 물맛이 미지근해야 한다”라고 하셨다. 샘물이 흐르는 곳을 판 다음 물탱크를 만들어서 파이프를 묻고 내정으로 수도를 들여 보냈다. 그다음 날 아침 도전님께서 내정에서 나오셔서 “이제 태아가 젖꼭지를 물었다”고 하셨다. 10달 뒤인 1973년 양력 5월에 당시 도장 앞에 있던 골프장이 어린이대공원으로 바뀌었다.18 당시 임원들은 도전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어린아이가 엄마 젖을 먹고 크듯이 대순진리회도 이제 크게 성장한다는 의미로 이해하게 되었다.19
  1970년부터 계속 진행된 공사는 1971년에 내정, 종의소, 숭도문, 임원실, 정·진급실 등을 완비하면서 도장의 기본적인 형태를 모두 갖추게 되었다. 1971년 4월 19일 중곡도장 3층 영대에 상제님 진영(眞影)을 모시고 용안의 점안(點眼)을 마쳤을 때, 마른하늘에 우박이 쏟아지고 뇌성벽력이 약 30분간 계속되는 이적이 일어났다. 도전님의 영도하에 도인들이 지극한 정성을 들인 결과 1971년 5월 24일 드디어 중곡도장 영대 봉안치성을 모실 수 있었다.20
  

4. 대순진리회 공포(公布)
  1971년 7월 30일 용문사에 들어가신 도전님께서는 열흘간의 공부를 마치고 8월 10일 중곡도장으로 환어하셨다.21 이때 수리사 주지 청운 스님이 계속 도장을 방문하여 법당공사를 부탁하였으므로 도전님께서는 윤목수와 두 명의 목수를 더 보내 9월 26일 수리사 법당 상량식을 올리고, 10월 중순쯤에 공사를 마무리하게 하셨다. 당시 도전님께서는 수리사에 자주 납시어 법당공사를 살펴 보셨다.22
  도전님께서는 1971년에 그 밖의 모든 것을 완비하시고 다음 해인 1972년 정월 초하루 자시(子時)에 대순진리회 본부 현판식을 거행하고 도의 체계를 정비하셨다. 그리고 태극도 임명체계에서 대순진리회의 임명체계로 전환하는 대대적인 임원개편이 이루어졌다. 선감 임명은 기존의 임원 김기태, 김영진과 더불어 새로운 임원으로 이종식, 정수오, 정선덕, 유경문 등 총 6명이 대순진리회 첫 상급임원 임명을 모셨다. 그다음 날 중앙종의회를 개최하여 기획부장에 김영진, 총무부장에 이순범, 교무부장에 김하정, 수도부장에 정수오, 감사원장에 김기태를 임명하셨다. 며칠 후에는 중앙 내·외수 도인들과 임원들을 합석시켜 대순진리회 창설 취지서와 회칙을 낭독하시고 1972년을 포덕(布德)의 해로 공포하셨다.
 
▲ (그림 5) 1972년 대순진리회 현판과 1972년 중순 본전 증축 후의 중곡도장
 
 
  이상에서 대순진리회 창설 과정을 살펴보았다. 먼저 도전님께서는 1968년 6월 24일 감천도장을 나오신 후, 1969년 4월 서울 중곡동에 대순진리회를 창설하셨다. 그리고 1969년 4월 5일 도장터 개토 작업을 시작으로 1972년 정월 자시(子時)에 대순진리회 현판식과 도의 체계 및 제도를 정비하고 대순진리회를 공포하셨다. 물론 그 뒤에도 중곡도장 공사는 계속 진행되었다. 대순진리회가 오늘날과 같은 종단의 위상과 규모를 갖추게 된 데에는 창설 초기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만수 도인들을 올바르게 영도하셨던 도전님의 덕화(德化)가 있었기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01 이하 종단의 중요 행사일 날짜 표기는 모두 음력으로 한다.
02 “도전(都典)의 종통계승(宗統繼承) 一九六九년[기유년(己酉年)] 四월에 도전(都典)께서는 전반적(全般的)인 기구(機構)를 개편(改編)하시고 종단(宗團)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를 창설(創設)하시다.” (『대순진리회요람』, p.13)
03 집을 짓기 위하여 땅을 파기 시작하는 것.
04 「대순연혁」, 재단법인 대순진리회 기획부, “1969년 5월부터 1988년 7월까지”.
05 건물이나 조직체 따위를 처음으로 세우거나 만듦.
06 인터뷰, 도전님 첫째 자제분 박봉근(2016. 08. 09)
07 교무부, 「도인탐방: 부산방면 선감 서대원」, 《대순회보》 25호, p.3 참조.
08 교무부, 「도인탐방: 연천방면 안준순 교감」, 《대순회보》 28호, p.3 참조.
09 전승천 교감은 전노인이라고도 불렸다. 원래 전노인은 수덕사에서 처사로 있다가 1963년쯤 청주방면에 입도하였다. 도전님께서 감천도장을 이궁하여 서울로 올라오시자 따라 올라와서 도전님을 보필하였다. 그의 아들 전흥수 교령은 한옥 건축 전문가로서 도전님 분부를 모시고 1981년 중곡도장 공사부터 모든 도장공사를 맡아 마무리하였다. [인터뷰, 성OO 교감 (2017. 7. 23)]
10 토지구획정리사업은 1966년에 시행된 대지로서의 효용증진과 공공시설의 정비를 위한 정부 차원의 사업이었다. 국가기록물, 관보 제5241호(1969년 5월 7일)에 서울 중곡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 신청 기간 변경지정(건설부공고 제44호)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중곡동의 토지구획정리사업은 도전님께서 중곡도장 터를 구입하시고 며칠 후 시행되었다.
11 인터뷰, 조영철 선감 (2005, 1. 25) 참조.
12 교무부, 「도인탐방: 사정위원장 이재근 선감」, 《대순회보》 78호, p.39 참조.
13 「도전님 훈시」 (1991.10.27).
14 인터뷰, 조영철 선감 (2003. 6. 6).
15 교무부, 「도인탐방: 한성방면 조영철 선감」, 《대순회보》 80호, p.34 참조.
16 중곡동 공부는 1974년 4월 5일에 18명으로 시법공부(기도공부)가 시작되었고, 1975년 2월 7일에는 24명이 시법공부 실시, 1975년 11월 20일에는 36명이 시법공부를 실시하였다.
17 목조건물의 지붕틀을 짜 세울 때 최종적으로 마룻대를 올리는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내는 의식.
18 현재 아차산역에 있는 어린이대공원은 1930년대부터 최초의 골프장으로 개발되어 1960년대까지 이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위치가 도심에서 너무 가까울 뿐만 아니라, 당시만 해도 골프에 대한 인식이 보편적이지 않아 너무 사치스러운 운동이라는 비난도 있어서 옮기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정부는 1973년 봄부터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가서 100일 만인 1973년 5월 5일(제51회 어린이날)에 준공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울 어린이대공원 [Seoul Children"s Grand Park, ─大公園]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 인터뷰, 조영철 선감 (2005. 01. 25) , 이재근 선감 (2016. 07. 28) 참조.
20 인터뷰, 신OO 선감 (2016. 08. 04).
21 종단역사연구팀, 「지명 답사기: 도전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 양평 용문산 용문사」, 《대순회보》 193호, p.23 참조.
22 《대순회보》 182호, 「전경 지명답사기: 도전님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군포 수리사」에서는 수리사 법당공사를 1972년 대순진리회 현판식 이후로 잘못 기재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수리사 법당공사를 도전님께서 1971년 용문사 열흘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셔서 그해 가을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정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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