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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7년(2017)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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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 : 이미지와 상징

이미지와 상징
 
 
연구원 송하명
 
 
 
 『이미지와 상징』의 작가 송태현01은 상징체계의 역사와 주술적 종교적 상징체계에 관해 쓴 종교사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1907년~1986년)의 『이미지와 상징』을 참고로 하여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 책을 쓴 것 같다. 그는 현대를 이미지의 시대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이미지 문명시대에는 대부분 시각적인 요소가 지배적이다. 그래서 작가는 이미지 문명이 재앙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고대의 상징적 깊이가 있는 이미지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고대로부터 현대의 ‘이미지와 상징’에 대한 해석과 변천 과정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어떠한 이미지와 상징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이미지 파트와 상징 파트로 나누어서 각각 서술하였다.
  첫 장인 ‘이미지’ 파트에 작자는 중국 황제의 일화02를 소개하면서 ‘이미지 파워’가 우리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다. ‘어느 중국 황제가 궁정 화가에게 궁궐에 그 화가가 그린 벽화를 지우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그 벽화 속의 물소리로 인해 자신이 잠을 설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처럼 고대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상상력을 불러일으켰고 우리들의 마음을 아주 깊이 사로잡았다.
  이미지의 기원을 추적해온 학자들도 이미지가 마술 혹은 종교와 관련을 맺고 있으며, ‘죽음’에 대한 관념과 긴밀히 결부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이미지의 삶과 죽음』03의 저자인 레지스 드브레는 기원전 3만 년경의 오리냐크기(Aurignacien 期)04의 유물과 이집트 고왕국의 지하분묘들과 멤피스의 석실분묘를 비롯하여 그리스-로마를 거쳐 중세와 르네상스의 유물을 관찰한 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예술이 장례에서 태어나며, 죽음의 재촉에 따라, 죽음 직후에 재탄생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무덤에 대한 경의는 여기저기에서 조형적 상상력에 활기를 주고, 거물들의 묘소는 최초의 박물관들이었으며, 또 고인들 자신이 최초의 수집가들이었다.” 인류의 초창기를 장식했던 숱한 이미지들은 결국 죽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작가는 모든 예술의 본질이 죽음과의 투쟁이라고 말한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 1901~1976)05를 떠올리면서 고대인의 삶을 얘기한다. 고대인들은 현실의 인간은 늙고 병들어 죽고 시신은 점차 썩어간다는 것을 직시했다. 그들은 죽음과 썩음, 변화와 생성이라는 부정적인 현실에 맞서 불변과 존재를 추구했다. 인간은 인생이 덧없음을 잘 안다. 그 덧없음을 깨닫고서 괴로워하는 자는 흘러가는 것을 어디엔가 남겨두려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과 관련된 부분을 그림으로, 조각상으로 담았다. 후일 ‘문명화’된 인간은 사진으로, 영화로 담았다. 이러한 의식은 특히 서구인에게 강했다고 한다. 고대인은 이미 헤라클레이토스적인 ‘변화’를 넘어 파르메니데스적인 ‘불변’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육신의 죽음에 대해 예술화된 이미지에 의한 불멸로 맞선 것이다.
  그런데 이미지는 서구에서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변방을 배회하며 수모를 당해 왔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역설적이게도 오늘날까지 서구 정신의 두 기둥이었던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두 문화가 이미지를 박해해 왔다는 사실이다. 헬레니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플라톤이 이미지를 평가 절하하였음은 잘 알려져 있다. 헤브라이즘에서도 이미지는 금기시되었다. 유대인들은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을 이미지 제작을 금하는 명령으로 판단하였고, 적잖은 비잔틴의 황제들과 신학자들 그리고 개신교 신자들이 이미지파괴(성상파괴) 대열에 동참하였다.
 
 

  그리고 이 기독교적인 성상파괴주의에다 서구에서는 ‘참이냐 거짓이냐’만을 따지는 이원적 진리 방법만이 통용되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확립된 이 진리 방법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이성주의를 적극 수용한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중세 스콜라 학파에 의해 이어졌다. 이성만이 진리에 접근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19세기에 와서 발전한 실증주의, 과학주의, 역사주의 등 이들 모두가 그 방법의 계승자들이다. 이들이 정통의 지위를 굳혀 온 서양의 사상계에서 이미지가 차지할 수 있는 지위란 하찮은 것에 불과했다고 작가는 주장한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서면서 이미지를 경시하고 경험적 사실과 이성적 관념을 중시해 온 서구에서는 과학과 기술이 타 문화권보다 비대하게 발전하였다. 발전된 기술에는 사진, 영화, 텔레비전, 비디오 등이 있다. 그 결과 서구는 역설적으로 ‘이미지의 문명’을 이룩하였다. 이제는 이성보다 감성이 중요한 시대로 바뀐 것이다.
  이제 이미지는 자신의 권리 회복을 넘어 이 시대의 지배적인 매체로 등장하면서 그 부작용이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작가는 이미지가 복귀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우리 사회가 온통 이미지 일색의 문화로 치닫는 것은 분명 위험하다고 말하고 세 가지 위험요소를 지적한다. 그 첫째는 ‘수동적인 소비자’의 창조적 상상력을 마비시키고, 두 번째는 영상매체에 대한 권력과 자본의 침투가 우려되고, 셋째는 과도한 이미지로 인하여 도리어 이미지 파괴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영상매체의 부작용을 미셸 마페졸리(1944년~현재)06의 말을 통해 ‘억압된 것의 회귀’ 과정에서 드러나는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말한다. 마페졸리는 “모든 과도기는 소란스럽고 새로운 구조가 도입되어 타협과 균형을 찾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처럼 이미지가 소생과 억압된 것의 회귀로 무질서하게 그리고 지나친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인문학적 토대와 만나면 잃어버린 균형을 회복하리라고 작가는 전망한다.
  다음 ‘상징’ 파트에서 작가는 고대의 상징적 사고가 서구의 과학적 사고로 인해 박해받아왔으며 잊혀져 왔다고 비판하면서 시작한다. 고래로 인간은 자신이 우주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자연을 신성한 존재로 보아 경외감을 느끼며 살아왔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서양에서는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근본적으로 변했다. 이 세계를 몰인격한 물질로, 혹은 수학과 기하학의 대상으로 파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작가는 『이미지의 삶과 죽음』의 글을 인용하여 ‘과학혁명’ 이후 “근대인은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바라보듯이 자연을 바라보고 또한 자연을 본보기로 삼던 태도를 멈추고, 자연을 정복하고 자연의 지배자와 소유자가 되기를 원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성주의, 과학주의, 실증주의의 정점에서 사람들은 과학에 환멸과 염증을 느꼈고, 보이는 현실 세계보다는 그 너머에 있는 세계에 관심을 두면서 상징주의가 유행하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자연과학으로는 접근할 수 없고 오직 상징으로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자는 상징이론의 대표적 선구자로 보들레르(1821~1867)와 이를 계승한 카를 구스타프 융(1875~1961)을 예로 든다. 보들레르는 시인으로서 프랑스 최초의 진정한 상징주의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유명한 시 「상응(Correspondances)」은 프랑스 상징주의의 대헌장 구실을 하는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상응의 첫 구절에는 그의 상징주의적 사상이 잘 나타난다.
 
 
<자연>은 하나의 신전이니 거기서
산 기둥들이 때로 혼돈한 말을 새어 보내니,
사람은 친밀한 눈으로 자기를 지켜보는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그리로 들어간다.

 
 
          
  보들레르는 가시적인 자연 배후에 비가시적인 세계(혹은 천상계)가 있다고 믿었다. 그 세계는 자연이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마치 신이 ‘신전’에서 신탁(神託)을 내리듯이 그 세계는 자연(천지만물)을 통해 말을 건네며 자신을 드러낸다. 시인은 천상계가 내리는 메시지를 듣기 위해서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가야 한다. 시인에게는 온 우주가 ‘초월적 진리’를 담고 있는 상징이다. 하나하나의 사물 배후에 숨어있는 길은 상징적 의미를 깨쳐 나가며 이를 언어로 예술화하는 것, 이것이 시인의 사명이고 보들레르의 상징이론이다.
  카를 구스타프 융은 20세기에 와서 보들레르적 맥락에서 상징을 연구한 대표적인 학자이다. 융의 상징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원형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융은 신화나 심리상담 연구에서 인간 경험의 심리적 측면에서 동일한 요소들이 존재함을 확인하고 그 이미지를 ‘원초적 이미지’라고 하였다. 그는 이 집단무의식의 구조인 원초적 이미지를 ‘원형’이라 명명하였다. 융은 이 원형이 자신을 구체적으로 현현한 것이 바로 상징이라 하였다.
  상징에 대해 융은 의식이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없는 어떤 불분명한 것, 알려지지 않은 것, 숨겨져 있는 것을 간접적으로 이미지를 통해 드러내는 수단이라고 정의했다. 이 세상에는 인간 이해의 범주를 넘는 것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우리는 완전히 정의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이러한 개념을 표상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상징적인 용어를 사용한다. 모든 종교가 상징적인 언어나 이미지를 사용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여기에 있다.
  현대를 이미지와 상징의 복권 시대라고도 한다. 원래 인류는 오랜 시간 동안 인간의 죽음에 대해 맞서면서 불변과 불멸을 이미지화했다. 그리고 현실세계 너머의 보이지 않는 초월적 진리, 곧 인간이 완벽하게 정의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개념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그런데 현대에는 그러한 상징적 이미지가 ‘탈주술’의 근대 속에서 신비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작자는 근대의 보들레르와 융과 같은 학자를 통해서 상징과 상징적 상상력의 재건을 통해 현대의 영적 그리고 정신적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자 주장한다.
  필자는 이러한 인류의 오래된 불멸에 대한 숙원(宿願)과 감추어진 초월적 진리에 대한 상상력이 우리 도장의 건물과 벽화에 이미지와 상징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미지와 상징에 대한 이해는 우리 종단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01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 강사로. 프랑스 그르노블대학교에서 「질베르 뒤랑의 문학비평 : 새로운 세계관과 비평의 쇄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02 레지스 드브레(Regis Debray), 『이미지의 삶과 죽음』, 정진국 옮김 (시각과 언어, 1994), p.9.
03 서구적 시선의 역사이다. 수만 년간 힘을 발휘해온 이미지의 위력은 무엇인지 살펴본 책으로, 이미지가 어떻게 인간사회를 결속시키고 흩어놓고 파괴하는지 살펴보고 있다.
04 유럽의 구석기시대 후기 시대명이다. 기원전 30000년 경부터 기원전 2만5000년 경까지 지속되었다. 프랑스의 오트가론의 지명 오리냐크(Aurignac)에 연유하여 명명하였다.
05 20세기 중반 프랑스의 소설가·정치가이다. 저서는 『정복자』, 『인간의 조건』, 르포르타주 소설의 걸작 『희망』 등이 있다.
06 미셸 마페졸리는 프랑스의 사회학자이다. 그는 질베르 뒤랑과 줄리앙 프로인트의 제자로 파리 5대학의 명예 교수이다. 그의 저작은 공동체 유대와 현대 사회의 일상생활 영역에서의 ‘상상력’을 다룸으로서 포스트모던 이론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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