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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6년(2016)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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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 게시판 : 인간의 두 가지 마음, 양심(良心)과 사심(私心)에 대하여 설명해 주세요

Q 인간의 두 가지 마음, 양심(良心)과 사심(私心)에 대하여 설명해 주세요.
 
 
A『대순진리회요람』에는 양심과 사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일신(一身)의 주(主)이니 사람의 모든 언어 행동은 마음의 표현이다. 그 마음에는 양심(良心), 사심(私心)의 두 가지가 있다. 양심은 천성(天性) 그대로의 본심(本心)이요, 사심은 물욕(物慾)에 의하여 발동하는 욕심(慾心)이다. 원래 인성(人性)의 본질은 양심인데 사심에 사로잡혀 도리(道理)에 어긋나는 언동(言動)을 감행하게 됨이니 사심을 버리고 양심인 천성을 되찾기에 전념하라. 인간의 모든 죄악의 근원은 마음을 속이는 데서 비롯하여 일어나는 것인즉 인성의 본질인 정직과 진실로써 일체의 죄악을 근절하라.01
 

  인류의 역사에서 양심은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사람들은 양심을 중요하게 인식하기 때문에 양심에 대한 관용어나 속담도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도덕은 변해도 양심은 변하지 않는다.” 하였고, 중국 속담에 “야망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기의 양심을 희생시키는 사람은 재를 얻기 위하여 명화(名畵)를 불태우는 사람이다.” 하였으며, 영국 속담에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일거일동을 알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하느님과 양심이다.” 하였고, 독일 속담에 “양심은 매일의 삶에 있어 양념과도 같다.” 하였으며, 프랑스 속담에 “깨끗한 양심처럼 더없이 폭신한 베개는 이 세상에 없다.” 하였습니다.  
  세계적인 문호, 정신적 지도자, 철학자들도 양심에 대하여 중요하게 언급하였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육체에 꼭 맞는 옷만을 입지 말고 양심에 꼭 맞는 옷을 입어라.” 하였고, 인도의 간디는 “선인(善人)은 자기의 양심의 명령에 따르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은 양심의 소리가 하느님의 소리라는 것을 터득하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하였으며,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하늘에는 별이 있고 사람의 속에는 도덕적 의식이 있다.” 하였습니다. 도덕적 의식은 양심을 뜻하는 것이니, 결국 ‘하늘에는 별, 인간에게는 양심’이라는 말입니다. 하늘에는 별이 있어 밤하늘을 아름답게 하듯이 인간의 아름다움은 그의 가슴 속에 양심이 빛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양심이 없다면 금수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나라 「헌법 19조」에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는 성문이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양심은 인류 역사상 사람들이 처세하는 불멸의 불문율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인세에 양심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회에는 금수도(禽獸道)가 판을 치고 약육강식의 장이 될 것입니다.
  『대학(大學)』에 나오는 명명덕(明明德)도 바로 이 양심[明德]을 밝힌다[明]는 의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도(道)의 훈회 1번, ‘마음을 속이지 말라.’에서 그 마음은 바로 양심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인간의 본래 마음은 양심입니다. 마음에는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이 있습니다. 도심이 양심이고 인심이 사심입니다. 양심이 본심(本心)이고 사심이 욕심(慾心)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이야기하면서 신성(神性)의 작용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양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신성의 작용이 양심입니다. 신성이 체(體)라면 양심은 용(用)입니다. 성(性)이 체라면 심(心)이 용입니다. 이것이 심성(心性)의 관계입니다.
  양심은 우리 인간의 본질적인 성품입니다. 성(性)과 심(心)을 너무 분별할 필요가 없습니다. 양심 자리에서는 심과 성의 분별이 없습니다. 그래서 『대순진리회요람』에도 양심을 천성 그대로의 본심이라 한 것입니다. ‘양심(良心)이 곧 천성(天性)’이라는 말입니다. 양심이 인간의 본래 성품이라는 것은 양심이 인간이 쓰는 마음의 본바탕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인간들이 존재합니다. 양심의 지배를 받는 자와 양심을 저버린 자. 양심의 지배를 받는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양심은 신(神)의 직접적인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자는 신의 명령에 순복(順服)하는 자입니다. 이런 점 때문에 고대의 사람은 인간을 신의 종이라 표현하였는데 인간이 어찌 신의 종이겠습니까. 어떤 아버지도 자신의 자식을 종이라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인간을 신의 종으로 여기는 것은 하느님께 허물을 씌우는 것으로 잘못된 신관(神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상제님께서는 어느 족속의 인류이건 간에 밉고 고움의 차별 없이 한결같이 다 사랑하십니다. 우리 인류는 상제님의 손(孫)으로 한 동기(同氣) 형제를 이루었으니 서로가 존중하고 사랑하며 화평(和平)하여야 합니다.02 
  인간이 양심을 간직하고 그 명령에 따르며 양심에 비추어 자신을 성찰하는 것은 인격적 성숙의 표현입니다. 양심은 진리의 규준이며 신의 경종이요 만세(萬世)의 보감(寶鑑)이니, 우리는 양심으로 듣고 양심으로 보며 양심으로 말하고 양심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공자의 사물(四勿)03이 있지만, 우리는 예의 자리에 양심을 두어 양심이 아니면 보지 말고 양심이 아니면 듣지 말며, 양심이 아니면 말하지 말고 양심이 아니면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흔히 양심의 소리라 합니다. 사람들은 고래로 양심의 소리를 신(神)의 의지를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왔습니다. 양심은 신의 대변자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신의 소리로 알아야 합니다. 고대의 성현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했던 내면의 미묘한 소리는 바로 신의 소리이고 이것을 대중이 보편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양심의 소리라 한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양심에 대한 상용구를 연구해보면 양심의 본질과 작용에 대한 단초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양심 불량’이라는 말, ‘양심도 없냐.’는 말, ‘양심에 털이 났다.’는 말,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는 말, ‘양심의 자유’라는 말, 등등의 양심에 관한 상용구를 모아서 분석·분류·종합해보면 어떤 패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양심에 털이 났다.’는 말은 우리나라의 문화에서 나온 말입니다. 자, 생각해보세요. 밭에 잡초가 나면 뽑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몸에 잡초가 나지는 않습니다. 털이 나지요. 그런데 그 털은 나 있을 곳에 나야지 털이 없어야 하는 곳에 털이 있으면 흉한 것입니다. 털이 혀에 나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것은 흉한 것을 넘어 매우 불편할 것입니다. 눈동자에 털이 난다면 그것은 큰일 날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양심은 맑고 깨끗한 인성의 본질인데 여기에 털이 났다는 표현은 흉측하다는 것의 다른 표현입니다. 양심이 없는 언동을 경멸하고 경계하여 이르는 말입니다.
  ‘양심 불량’이라는 것은 양심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기능이 장애를 일으킨 것입니다. 어둠은 빛의 부재(不在)입니다. 어두운 방에 불을 켜면 어둠이 어디로 도망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방이 밝아집니다. 어둠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니 사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양심의 부재가 사심입니다. 양심이 밝아지면 사심은 일어나지 못합니다. 이것이 도심이 지극하면 사심은 일어나지 못한다는 도전님 말씀의 의미입니다.04 주자(朱子)도 『근사록(近思錄)』에 “사람을 가르쳐 지도할 경우에 그 사람의 양심을 양육해 주면 나쁜 마음은 자연히 소멸한다.” 하였습니다.
  양심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도를 닦는 것이니,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양심을 밝힌다는 뜻입니다. 양심 철학이 상생 철학입니다. 상생은 인간 내면의 양심의 교류입니다. 양심을 빼놓고 상생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사랑하는 것, 자체가 양심의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생을 이야기할 때 양심도 같이 말해야 합니다. 양심이 음(陰)이면 상생은 양(陽)입니다. 마음이 음이면 몸은 양이요 삼요체가 음이라면 사강령은 양인 관계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양심이 없는 상생은 상생이 아닙니다. 그러니 상생 못지않게 양심이 중요한 것입니다. 상생 정치, 상생 문화, 상생 사회, 상생 철학, 상생 경제 등과 같이 양심 철학, 양심 문화, 양심 정치, 양심 경제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강조해야 합니다. 우리는 상생과 양심을 동시에 밀고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상생이 힘을 받게 됩니다. 상생만 외치지 말고 양심도 함께 외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양심이 조용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천기 자동으로 해원상생대도(解冤相生大道)의 향기가 사회에 퍼져나가는 소이연(所以然)입니다.
  선천의 인간 삶에 대한 슬픔의 역사는 인간의 사심(ego)이 연출한 것입니다. 이제 바야흐로 양심의 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양심이 진실로 답입니다. 인간사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는 양심에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양심을 회복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세상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후천 선경입니다. 우리 도인들은 진실로 그 시대를 여는 선구자가 될 것입니다.

 

01 『대순진리회요람』, pp.18~19.
02 『포덕교화기본원리(1)』, p.10 참조.
03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는 네 가지 가르침. 『논어』 「안연」편에 나오는 말이다.
04 “사(私)는 인심이요 공(公)은 도심(道心)이니, 도심(道心)이 지극하면 사심(私心)은 일어나지 못하느니라.” (『대순지침』,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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