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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6년(2016)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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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광장 : 제갈량(諸葛亮)의 융중대(隆中對)

제갈량(諸葛亮)의 융중대(隆中對)
 
 
연구위원 최정락
 
 
 
  제갈량(諸葛亮, 181∼234)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정치가이자 군사가이다. 그는 융중(隆中)에서 밭을 갈고 생활하면서 천하에 뜻을 두었다. 유비(劉備, 161∼223)가 삼고초려(三顧草廬)했을 때, 그는 융중대(隆中對)에서 절실하면서도 곧바로 실행할 수 있는 진취적 방안을 제시했다. 유비를 도와 천하를 삼분(三分)하는 촉한 정권을 수립한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제갈량이 융중에서 생활했던 시기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삶을 살펴보기로 한다.
  제갈량은 서기 181년 낭야군(琅琊郡) 양도현(陽都縣)에서 태어났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기 4년 전인 이 시대는 이미 난세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제갈량의 어린 시절은 평탄치만은 않았다. 모친은 동생 제갈균(諸葛均)을 낳고 얼마 후 사망하였으며 부친도 제갈량이 14세가 되었을 때 세상을 떠났다. 부친을 잃은 제갈량은 형제들과 숙부 제갈현(諸葛玄)에게 보내져 성장하였다. 숙부를 따라 형주(荊州)로 옮겨간 제갈량은 서기 197년 숙부마저 죽자, 양양(襄陽) 교외의 융중(隆中)에서 초려(草廬)를 짓고 청경우독(晴耕雨讀: 맑은 날엔 밭 갈고 비 오는 날엔 책 읽음)하였다.
  융중은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양양시(襄阳市) 서쪽 지점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으로 제갈량이 그의 청년 시기인 17∼27세 동안 생활한 곳이다. 소설 『삼국연의(三國演義)』는 37회 「유현덕의 삼고초려」에서 융중의 수려한 풍경을 생동감 있게 묘사했다. “과연 산은 높지 않으나 수려하고, 물은 깊지 않으나 깨끗하다. 땅은 넓지 않으나 평탄하고, 숲은 크지 않으나 무성하다. 원숭이와 학이 어울려 놀고, 소나무와 대나무가 서로 푸름을 더한다.” 이런 묘사는 실제상황과 기본적으로 들어맞는다. 그는 융중에 은거하며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제갈량이 융중에서 지낸 10년은 제갈량의 신체적 성장뿐 아니라 고금을 망라한 학식과 뚜렷한 세계관, 정치상의 식견이 확립된 시기였다. 그는 17세 때 융중에 은거해 27세가 되어 떠났는데, 후에 그가 치밀한 계획으로 경륜(經綸)을 펼쳐 천하를 삼분(三分)하는 위업을 달성한 것은 모두 융중에 있던 10년 동안의 각고의 노력, 벗들과의 절차탁마(切磋琢磨)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농사를 짓는 한편 훌륭한 벗들과 교류하며 학문을 연구했다. 건안(建安) 초년에 석도(石韜), 서서(徐庶), 맹건(孟建), 최주평(崔州平) 등과 함께 학문을 토론했는데 그중 제갈량의 시야가 가장 넓고 포부가 높았다.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정세 속에서 그는 언제나 자신을 춘추시대의 대정치가인 관중(管仲)이나 전국시대의 명장인 악의(樂毅)에 비유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공부 방법은 매우 특이하였는데, 학우들이 경서의 자구 해석에만 매달릴 때 그는 개요와 핵심을 파악하는 데 치중하여 전체의 의미를 파악하려 하였다.
 
 

  마침내 때가 왔다. 그의 친구 서서(徐庶)가 그를 유비에게 천거한 것이다. 건안 11년(206) 전후, 유비가 신야(新野)에 주둔할 때 서서가 찾아와 투항했다. 유비는 서서의 재능을 중하게 여겨 기용했다. 서서가 말했다. “양양성에서 20리 떨어진 융중이라는 마을에 천하에 보기 드문 재능을 가진 선비가 있습니다. 주공께서는 왜 그분을 청해오지 않으십니까? 그분은 성은 제갈(諸葛)이고 이름은 양(亮), 자는 공명(孔明)입니다. 이분은 경천위지(經天緯地: 천하를 경륜하여 다스림)의 재능을 가지고 있어 세인들은 그를 와룡(臥龍)이라고 부릅니다. 제갈량은 누워 있는 용인데 명공께서는 그를 만나 보시겠습니까?” 유비가 말했다. “그러면 그대가 제갈량을 청해 오세요.” 서서는 대답했다. “이 사람은 그렇게 쉽게 찾아올 사람이 아닙니다. 그를 만나려거든 반드시 친히 찾아가셔야 합니다.” 유비는 서서의 의견대로 얼마 후에 융중으로 제갈량을 찾아갔다. 미리 약속하지 않아 첫 번째는 만나지 못했고 두 번째 찾아갔으나 여전히 만나지 못했다. 그 후 세 번째로 찾아가서야 만나게 되었다.
 
▲ 삼고초려(三顧草廬) - 일본의 서화가가 『삼국연의』를 근거로 해서 삼고초려를 묘사한 그림이다.
 

  이것이 바로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廬)이다. 삼국 시절의 유비가 융중에 은거하는 제갈량과 함께하기 위해 세 번이나 그를 찾아가 정성을 다해 보임으로써 마침내 제갈량의 마음을 감동하게 해 그를 세상 밖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제갈량은 출사표(出師表)에서 “신은 본래 한낱 평민의 신분으로 남양(南陽)에서 직접 밭을 갈고 농사를 지으며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구차하게 생명을 보존하고 있었을 뿐, 제후에게 가서 명성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제(先帝)께서 신을 비천하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송구스럽게도 몸소 몸을 굽히시어 세 번씩이나 신의 초려(草廬)를 찾아오셔서 저에게 당대의 상황을 물으셨습니다. 이 일로 신은 감격하여 선제를 위하여 몸 바쳐 일할 것을 맹세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을 만나자, “지금은 한 왕실의 위세가 땅에 떨어져 간신이 권력을 휘두르고 천자는 도성을 떠나 피신하고 있는 형편이오, 본인은 격분한 나머지 본인의 힘도 생각지 않고 대의명분을 위해 총력을 기울여 왔으나 무운(武運)이 따르지 않아 오늘에 이르렀소. 선생, 부디 이후의 진로를 인도해 주시오.”라고 간청하였다. 이에 제갈량은 융중대(隆中對)를 제시하였다.
 
▲ 제갈초려(諸葛草廬) - 동한 말년 제갈량이 융중에서 생활하던 모습을 재연했다.
 

  융중대는 ‘천하 삼분’을 분석한 글로, 유비의 ‘건국의 청사진’이자 삼국 분할의 핵심 사상이었다. 이 ‘천하 삼분’의 융중대가 제갈량의 대표적인 견해이다.
 
 
  동탁 이래로 수많은 호걸들이 여기저기서 들고 일어나 각지를 차지했습니다. … 장군은 황실의 후예이고 신의가 사해(四海)를 떨치며 영웅들을 거느리고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인재를 그리워하는 분입니다. 만일 형주와 익주를 차지하여 험한 요새를 지키고, 서쪽과 남쪽으로 여러 오랑캐와 화친을 맺고 달래며, 밖으로는 손권과 동맹을 맺고 안으로는 정사에 힘쓰십시오. 그리고 천하에 변란이 있기를 기다렸다가 상장(上將)에게 명하여 형주군을 완(宛)과 낙양으로 진군하도록 하고, 장군은 몸소 익주군을 이끌고 진천(秦川)으로 출격한다면, 백성들이 어찌 단사호장(簞食壺漿, 백성이 군대를 환영하기 위해 갖춘 음식)으로 장군을 환영하지 않겠습니까? 실로 이와 같다면 패업을 이루고 한 왕실을 부흥할 수 있습니다.01
 
 
▲ 융중대(隆中對) - 제갈량이 유비에게 융중대책을 설명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저명한 융중 대책은 짧은 수백 자에 불과하지만 기세가 힘차고 격정이 넘친다. 이는 시국에 대한 제갈량의 고도의 개괄이자 정밀한 분석이다. 그는 유비에게 천하 삼분의 계책을 설명하면서 형주(荆州)와 익주(益州)를 차지하고 오(吳)의 손권(孫權)과는 동맹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후 국력을 키우고 위(魏)에 변란이 일어났을 때 형주와 익주에서 군대를 동원하여 위를 공격하면 한실을 다시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갈량이 27세에 집을 나서 유비를 도와 정벌하면서부터 54세에 오장원(五丈原)에서 병사하기까지 27년간의 모든 행적으로 보면, 융중 대책은 제갈량이 힘써 실현하려는 총체적 전략 목표이자 실제 행동을 시종 관통하는 근본적 강령이다.
  군사를 일으킨 후 10여 년간 유비는 지략과 병력이 부족해 당시의 혼전하는 국면의 틈새에서 생존을 유지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남북으로 유랑하거나 남의 처마 밑에 의지하는 상황에 처했다가 초가집을 세 번 방문해 제갈량을 모신 후에야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유비는 관우와 장비에게 “나에게 제갈량이 있음은 마치 물에 물고기가 있음과 같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수어지교(水魚之交)의 유래이다. 이후 제갈량은 한실(漢室)을 부흥시켜 경세제민(經世濟民)할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아,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려움을 무릅쓰며 다섯 차례나 북벌에 나서 그 뜻을 실행하려 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목숨을 다해 생전의 맹세를 실천한 것이다.
 
▲ 석패방(石牌坊) - 융중 무후사(武侯祠) 앞에는 ‘고융중(古隆中)’이라는 글이 돌편액에 새겨져 있다. 돌기둥 위에는 당나라 두보(杜甫)의 “(유비는) 세 번이나 초려를 찾아 다스릴 계획을 물었고, 두 대에 걸쳐 나라 위해 애쓴 것은 늙은 신하의 마음이구나.”란 시구가 새겨져 있다.
 

  제갈량은 승상이 되어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스스로 모범을 보였으며, 공정한 정치를 행했다. 『삼국지』를 저술한 진(晉)나라의 학자 진수(陳壽, 233∼297)는 「제갈량전(諸葛亮傳)」에 첨가한 평에서 “촉의 모든 백성들이 그를 존경하고 아꼈다. 형법과 정치는 비록 엄격하였지만 원망하는 자가 없었다. 그것은 마음을 공평하게 쓰고 상벌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상제님께서도 천지에 조용한 일도 나로부터 비롯되고 천지에 분란한 일도 나로부터 비롯되니 제갈공명의 지극히 올바른 처사를 본받으라 하셨다.02 이렇듯 제갈량은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를 터득한 뛰어난 인물로서, 그가 자신과 비교했던 관중(管仲)과 악의(樂毅)에 견줄 만한 인물이다. 후세의 사람들은 중국 곳곳에 무후사(武侯祠)를 지어 그의 정대(正大)함을 기리고 있다.
 
▲ 제갈량 동상
 
 
 
참고문헌
구청푸, 류징청, 허청웨이, 『중국을 말한다』 7, 서울: 신원문화사 , 2008.
여명협, 『제갈량 평전』, 서울: 지훈출판사, 2007.
제갈량 편집팀, 『제갈량 문화유산 답사기』, 허유영 옮김, 서울: 에버리치홀딩스, 2006.
제갈량, 『제갈량집』, 서울: 홍익출판사, 2008.
진순신, 『삼국지의 영웅』, 이재정 옮김,  서울: 솔, 2002.
《대순회보》 26호, 「「전경」속의 인물: 제갈공명(諸葛孔明)」, 1991. 
《대순회보》 122호, 「「전경」속 역사인물: 제갈량(諸葛亮)」, 2011. 
 
 

01 『삼국지』 촉서(蜀書) 제갈량전(諸葛亮傳),「隆中對」, “自董卓造逆以來,天下豪傑並起. …將軍既帝室之冑, 信義著於四海, 總攬英雄,思賢如渴,若跨有荊·益,保其巖阻, 西和諸戎, 南撫彝越, 外結孫權, 內修政理, 待天下有變, 則命一上將, 將荊州之兵, 以向宛·洛, 將軍身率 益州之眾,以出秦·川, 百姓有不簞食壼漿以迎將軍者乎? 誠如是, 則大業可成, 漢室可興矣.”
02 교법 3장 29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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