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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6년(2016)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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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宿) 신명 : 정(井) 별을 관장하는 비융(邳肜)신명

정(井) 별을 관장하는 비융(邳肜)신명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정수(井宿)
  정수는 28수 가운데 스물 두 번째 별자리이다. 그리고 정귀유성장익진(井鬼柳星張翼軫) 남방(西方) 주작(朱雀) 칠수(七宿) 가운데서 첫 번째 별자리다. 이 별자리의 주된 별[主星]은 8개로 상징 동물은 상상의 신수(神獸)인 안(犴)이다. 정수의 속성(屬性)은 목(木)이며, 28수 중에서 가장 많은 별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별자리를 정수라고 한 것은 주된 별 8개의 배치가 ‘정(井)’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정수를 의인화하여 남방정목안성군(南方井木犴星君)이라 하는 데 위엄이 있으며 얼굴은 늙은 호랑이를 닮았고 송곳니가 돌출되어 있는데 손에는 장극(長戟)을 들고 있다고 한다. 상징동물인 안(犴)은 즉 폐안(狴犴)이다. 폐안은 글자대로라면 ‘감옥을 지키는 들개’로 전설에 의하면 용(龍)이 나은 아홉 아들 가운데 하나이다.01 폐안의 생김새는 사자와 유사하며 공정(公正)하고 의(義)를 좋아하여 시비(是非)를 명확하게 판별한다고 알려져 있어서 폐안의 모습을 관청이나 감옥에 배치했다고 한다.02
 

후한의 창업공신 비융
  비융(邳肜, ?-30)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E 2-CE 58)를 도와 후한(後漢)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다. 그의 자(字)는 위군(偉君)으로 신도군(信都郡, 현재 하북성 冀縣) 사람이다. 비융의 아버지 비길(邳吉)은 요서(遼西) 태수를 지냈다. 비융은 왕망(王莽, BCE 45-CE 23)03이 집권했을 때 화성군(和成郡)의 졸정(卒正)04을 지냈다. 그는 유수가 경시제의 명령으로 하북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하곡양(下曲陽, 하북성 진양현)에 이르렀을 때 성을 바치고 항복하여 다시 태수로 임명되었다. 유수가 북상하여 계(薊, 북경시 大興縣)에 이르렀을 때에 왕랑이 봉기했다. 왕랑은 한단에서 점을 치는 자였는데 혼란한 시대를 틈타 급속하게 세력을 확대하였다. 세력을 확대한 왕랑이 유수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게 되니 유수는 쫓기는 신세로 전락했다.05
  유수에게 참으로 다행이었던 것은 화성군과 신도군이 왕랑에게 항복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때 비융은 유수가 군대를 잃고 신도군으로 돌아오고자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오관연(五官掾) 장만(張萬), 독우(督郵)06 윤수(尹綏)와 정예 기병 2천 명을 선발하여 길을 따라가 유수군을 맞아들이도록 명령하였다. 얼마 후 비융과 유수는 신도군에서 다시 만났다.
  당시는 천하대란이라 할 정도의 난세로 결과를 예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왕조를 창업한 군주로서 정확한 판단력과 통찰력을 보여준 유수로서도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선택이 쉽지 않았다. 유수 휘하의 대부분의 장수들은 비록 2개 군의 원조가 있다고 하지만 군대가 아직 부족하다고 여겼다. 이들은 장안(長安)으로 돌아가는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한마디 말로 나라를 흥(興)하게 한 비융
  애초에 경시제가 유수에게 하북 평정을 명령하면서 내 준 군대도 소수였다. 그마저도 왕랑의 봉기로 대부분의 병력을 잃은 상태였다. 게다가 남아 있는 유수군의 사기도 형편없이 추락한 상태였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때 비융은 장수들 대부분의 생각과는 반대의 의견을 피력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의논하는 사람들의 말은 모두 틀렸습니다. 관리와 백성들이 한(漢)을 사모하여 노래 부른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경시(更始)가 존호(尊號, 황제를 의미)를 들자 천하가 호응하였고, 장안의 사람들이 궁(宮)을 깨끗이 하고 길을 청소하여 그를 맞아들였던 것입니다. 한 사람이 창을 들고 호령하니 천리 안의 장수들은 모두 성을 버리고 숨거나 엎드려 항복을 청했습니다. 자고(自古) 이래 그처럼 사물과 백성을 감동시킨 사례는 없었습니다. 점이나 치던 왕랑이 이름을 빌리고 세력을 잡아 오합지졸(烏合之卒)들을 몰아다가 연(燕), 조(趙) 땅을 진동시켰습니다. 왕랑이 이러한데 하물며 명공(明公, 유수)께서 2개 군(郡)의 병사들을 분발케 하시고 천하가 호응하는 위세를 떨쳐서 공격하신다면 어떤 성(城)인들 이기지 못하겠습니까? 공이 싸우신다면 어떤 군대이든 항복시키지 못하겠습니까? 지금 이 병력을 해산하고 돌아가신다면 어찌 하북(河北)만 잃겠습니까? 반드시 장안 일대를 동요케 하여 공께서 지금까지 쌓으신 권위를 실추시키실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만약 밝으신 공께서 다시 정벌하고자 하는 뜻이 없으시다면 비록 신도(信都)에 있는 병사라도 다시 모으기는 어렵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명공께서 서쪽 장안으로 가신다면 한단의 백성들은 부모를 버리고 성주(城主)를 배반하면서까지 천리 길에서 공을 호송하려하지 않을 터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흩어지고 도망갈 것입니다.”
  ‘일언가이흥방(一言可以興邦)’07이라는 말이 있다. 한 마디 말로 나라를 흥성(興盛)하게 할 수 있다는 것으로 비융의 말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의 말은 선견지명(先見之明)이라 할 수 있었다. 역사에 ‘만약’이란 말은 없다고 하지만, 이때 유수가 장안으로 돌아갔다면 후한 건국은 힘들었을 것이다.
  유수는 비융의 말을 옳다고 여겨 장안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로 비융을 후대장군(後大將軍)에 임명하고 여전히 화성 태수로 삼았다. 유수는 비융으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선봉에 서게 했다. 비융이 당양(堂陽)에 이르렀는데 당양은 이미 왕랑에게 투항한 상황이었다. 비융은 장만(張萬), 윤수(尹綏)를 시켜 먼저 그곳의 관리와 백성들을 설득했다. 이들의 설득이 성과를 거둬 유수가 밤에 당양에 도착하니 곧 백성들이 성문을 열고 나와 맞았다. 또한 비융은 병사를 이끌고 중산(中山)에서 백사(白奢)의 도적들을 격파하였다. 그 이후로 비융은 항상 유수를 따라다니며 공을 세웠다.
  그런데 유수의 주력군이 빠진 신도는 다시 왕랑에게 함락되었다. 왕랑이 임명한 신도왕(信都王)은 비융의 일가족을 모두 잡아 가두고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비융을 부르도록 하였다. 그 편지의 내용은 ‘항복하면 벼슬과 땅을 주겠지만 항복하지 않으면 종족(宗族)을 멸(滅)한다’는 협박이었다. 비융은 울면서 다음과 같은 답장을 썼다.
  “주군(主君)을 섬기는 자는 가족을 돌볼 수 없습니다. 우리 가족이 지금까지 신도에서 편히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유공(劉公, 유수)의 은혜입니다. 공이 이제 나랏일을 다투고 계시는데 제가 어떻게 사사로움을 돌아볼 수 있겠습니까?”
  그때 마침 경시제가 파견한 장수가 신도를 공략하여 왕랑군이 패하여 도망치고 비융의 가족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한단을 평정한 후 비융은 무의후(武義侯)에 봉해졌다.
  하북을 평정하여 기반을 확립한 유수가 25년 호현(鄗縣, 하북성 栢鄕縣)에서 신하들의 추대로 제위에 올라 한의 부흥을 선언하니 그가 후한의 초대 황제인 광무제이다. 25(건무 1)년 비융은 영수후(靈壽侯)로 봉해지고 대사공(大司空)의 일을 보았다.
  광무제가 낙양(洛陽)에 돌아오자 비융을 태상(太常)08에 임명했는데 한 달 남짓 만에 소부(小府)로 전락하고 그 해에 면직(免職) 당했다. 그 후 비융은 다시 좌조시중(左曹侍中)이 되어 항상 광무제를 수행하여 정벌 다니다가 30(건무 6)년 세상을 떠나니 아들 비탕(邳湯)이 뒤를 이었다.

(비융 끝)
 
 

01 용의 아홉 아들은 비희(贔屓), 이문(螭吻) 또는 치미(鴟尾), 포뢰(浦牢), 폐안(狴犴), 도철(饕餮), 공하(蚣蝦) 또는 공복(蚣蝮), 애자(睚眦), 산예(狻猊), 초도(椒圖)이다.
02 萬民英(明) 原著, 『圖解 星學大成 第一部: 星曜神煞』, 北京; 華齡出版社, 2009, p.443.
03 자(字)는 거군(巨君). 위군(魏郡) 원성(元城, 현재 하북성 大名 東) 사람. 전한 말기의 대표적인 외척으로 전한을 타도하고 신(新, 8-23)을 세웠다. 왕망은 대표적인 외척 가문으로 성제(成帝, BCE 32-7) 때 대사마에 발탁되었고 애제(哀帝, BCE 6-1)가 죽자 고모인 태황태후 왕정군의 지지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자신이 옹립한 평제(平帝, BCE 1-CE 5)를 독살시키고 마침내는 전한을 타도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이 하늘의 뜻임을 나타내기 위해 부명(符命)을 조작하였다. CE 7년 황제가 된 후, 유교 경전에 의거한 개혁정책과 한나라와 다른 화폐, 관료 제도를 강력하게 시행하였다. 그러나 현실과 맞지 않은 개혁정책과 빈번한 제도 변경으로 국정의 혼선과 오류가 중첩되었고, 기근(饑饉)이 겹치면서 민심의 이반을 불러왔다. 23년 왕망은 이러한 정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믿었던 권력 핵심부마저 해체되면서 장안을 침공한 반군에게 살해됐는데 이때 나이가 68세였다.
04 태수의 별칭이다. 왕망(王莽)이 주(周)나라의 제도(制度)에 의거하여 졸정(卒正), 연솔(連率), 대윤(大尹)을 두었는 데 모두 군(郡)의 태수이다. 그 군을 맡은 사람의 봉작(封爵)에 따라 구분한 것으로서, 공(公)의 경우 ‘목(牧)’, 후(侯)의 경우 ‘졸정(卒正)’, 백(伯)의 경우 ‘연솔(連率)’, 봉작(封爵)이 없는 사람은 ‘윤(尹)’이라 칭하였다.
05 왕랑의 봉기와 관련한 사항은 다음을 참조. 「벽(壁) 별을 관장하는 왕패(王霸) 신명」, 《대순회보》 173호, pp.65-68.
06 순찰하는 벼슬아치. 군(郡)의 좌리(佐吏)로 속현(屬縣)의 행정을 맡은 관리.
07 『논어(論語)』 「자로(子路)」
08 한(漢) 나라 구경(九卿)의 하나. 종묘 예전(宗廟禮典), 시호 하사(諡號下賜) 등의 일을 맡아 진(秦)의 봉상(奉常)이나 후세의 예조(禮曹)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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