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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4년(2014)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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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칼럼 : 용서는 해원상생의 실천

용서는 해원상생의 실천
 
 
 

연구원 주현철

 
 
 
  누구에게나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사소하게 부닥치는 일상의 아픔들이 있기 마련이다. 알게 모르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받아가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지혜로운 삶이란 이러한 상처를 마음속에 간직하여 분노하고 원한감정을 키워가는 것이 아니라, 남의 상처는 어루만져주고 자신의 상처는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상처를 받고 격분케 하는 일은 늘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다. 분노와 원한감정은 오랜 동안 쌓아온 신뢰와 돈독했던 인간관계를 한 순간에 무너뜨린다. 이것은 친분이 두터운 사이라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사소한 오해로 인해, 사이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분노로 인한 서로의 관계는 극단적인 상태로까지 치달을 수 있다. 아마 친하니까 이해해 줄 것이라는 생각이 서로의 마음 깊숙이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경우 어느 한쪽이 나서서 오해를 풀지 않는 한, 원한감정이 더욱 더 깊어져 돌이킬 수 없는 앙숙 관계가 될 수도 있다. 서로 잘 모르는 사이였다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인데도 말이다.
  인생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할 감정은 분노의 마음이다. 분노는 인간의 운명을 그르치게 할 수 있는 무서운 흉기로서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사태를 몰고 갈 수 있다. 사람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 이성을 상실하게 되고, 이런 상태에서 내뱉은 말은 종종 자신은 물론 상대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마음의 상처를 남기게 된다. 또 말보다 행동이 앞설 때, 우발적으로 상대의 목숨까지도 앗아갈 수 있다.
  서로가 자신의 행위가 옳았고 상대의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주장과 고집과 비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하는 자기변명과 합리화 등은 둘 사이의 갈등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든다. 이렇게 서로의 입장만을 내세우면 분노와 원망만 더 쌓여가고, 고통 받지 않아야 할 일로 고통을 받게 된다. 우리를 분노하게 만든 사람들을 기억에 떠올릴 때마다 상처는 되살아나고, 그 나쁜 기억은 삶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건강까지도 앗아간다.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막상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용서한다는 것은 잊어버리거나 눈감아 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 용서하기 위해서 꼭 가해자를 직접 만나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의식적인 결단을 통해 증오하는 행위를 멈추는 것을 의미한다. 증오는 전혀 유익이 없으며, 암처럼 사람의 마음에 퍼져 완전히 자신을 파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과 전문의이자 하버드 의과대 교수인 할로웰(Edward M. Hallowell)이 자신의 저서 『용서해야 할 101가지 이유』에서 용서의 이로움과 분노의 악영향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어 간단히 소개하려고 한다. 그는 “의학적으로도 원한을 품고 복수를 꿈꾸는 것보다 용서하는 것이 건강에 훨씬 좋다. 건강에도 많은 점에서 이롭다. 혈압이 내려가고 심장박동 수가 떨어진다. 면역체계가 강해지고 심장마비나 뇌졸중에 걸릴 가능성이 낮아진다. 두통과 요통 등이 줄어들며, 약을 찾는 횟수도 크게 감소한다. 심지어 성기능까지 강해질 수 있다 (…) 감정적 이점도 무시할 수 없다. 용서는 기분을 상쾌하게 해준다. 용서는 즐거움을 더해주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무엇보다 원망과 분노라는 커다란 짐을 벗어버릴 수 있어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또한 언제나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다.” (17쪽)고 말하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용서는 인간을 건강하게 해준다.’는 취지에서 다음과 같이 더욱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48-51쪽)
  우리가 용서라는 힘든 일을 자청해서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당신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분노의 감정까지 포기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담배를 끊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며, 체중을 줄이기 위하여 다이어트를 계속하고, 혈압을 조절하려고 운동을 하는 이유와 마찬가지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용서할 때 당신의 삶은 한결 윤택해진다. 정신적 건강만이 아니라 육체적 건강까지 나아지며 건강하게 장수할 가능성도 커진다. 이것만으로는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럼 분노하고 원망하며 사는 삶은 줄담배를 피워대고 고혈압이나 높은 콜레스테롤 수치에 시달리며 사는 삶이나 똑같다고 생각하라. 요컨대 분노와 원망은 당신의 수명을 갉아먹는다.
  ‘당신의 고통을 어떻게 바꿔가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솔직히 대답해보자. 당신의 대답이 적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라면 나는 다시 이렇게 묻고 싶다. 정말로 그렇게 하고 싶은가?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이렇게 해도 당신 마음이 그대로라면 다른 식으로 접근해보자.
  과학적 연구에 따르면, 자연스레 용서하는 사람에 비해서 분노하고 원망하는 사람은 심장발작을 일으킬 확률이 높다. 분노와 원한을 품고 사는 사람들은 감정을 순간적으로 폭발시키며 자제력을 잃기 십상이다. 게다가 폭력적인 성향을 보인다. 또한 그들은 알코올이나 약물에 의존하고, 다른 사람들과 긍정적인 관계를 오랫동안 지속하지 못한다.
  원한을 품고 복수를 획책해서 얻는 이점이 무엇일까? 그것은 담배를 피우고 약물을 복용해서 얻는 이점과 비슷하다. 달리 말하면 순간적인 만족감은 얻겠지만 장기적으로는 파멸을 재촉하는 것이다.
  대부분이 실패하지만 운이 좋아 복수에 성공하더라도 그 성공의 열매는 생각했던 것만큼 달콤하지 않다. 복수는 만족감을 주지만 과대포장된 즐거움이다. 복수를 향한 욕구는 흔히 갈망으로 돌변하고, 광적인 격정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우리는 복수를 통해 세상을 공정하게 바꿔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복수로 우리 고통을 종식시키고 사태를 ‘종결’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복수를 부정행위에 대한 응징이라 해석하는 상황에서 사용된 ‘종결’이란 단어는 잘못 사용된 것이다. 우리는 복수를 꿈꿀 때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다. 복수가 상처를 꿰매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부당한 취급을 받거나 모욕을 당할 때 복수를 통해 해결하고 ‘종결’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복수에 성공하더라도 기대하던 결과는 얻을 수 없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상처가 꿰매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고통으로는 고통을 치유할 수 없고, 상실감으로 상실감이 치유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수는 ‘종결’이 아니라 기만적 만족에 불과하다. 그런 만족으로는 우리를 분노의 사슬에서 해방시킬 수 없다. 오히려 복수는 증오심을 더 키울 뿐이다.
  게다가 복수는 사태를 종결하기는커녕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사태가 더 복잡해진다. 복수한다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잘못된 일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며, 부러진 뼈가 다시 붙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뼈가 부러진다. 복수는 더 큰 원한을 남기고, 더 많은 사람이 복수를 꿈꾸게 만들며, 갈등을 격화시킨다. 복수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을 불행의 늪에 빠뜨린다.
  복수심은 이렇게 위험하기도 하지만 고약한 입내와도 같아서, 복수를 꿈꾸는 사람은 옆 사람을 불쾌하게 만든다. 분노는 감춰도 감춰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사람이 옆에 있으면 누구라도 쉽게 감지해낼 수 있다. 분노가 악취처럼 그런 사람의 몸에서 풍겨 나오기 때문이다. 누가 그런 사람과 가까이 지내고 싶어하겠는가?
  그런 사람들은 부정행위를 수집하는 것이 취미이다. 그들은 눈을 크게 뜨고 부정한 짓을 찾아 헤맨다. 그래야 내면의 분노를 계속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분노를 폭발시킬 때 희열을 느낀다. 따라서 그들의 삶은 점점 황폐하게 변해간다.
  분노하는 것보다 용서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찬 삶 속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분노란 인간이 충족시키기 어려운 욕망이다. 설령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복수를 했다 하더라도 일시적으로 마음의 쾌감을 누릴지는 몰라도 지속적이고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다. 기다리는 것은 공허함과 또 다른 복수일 것이다. 결국 승자는 없고 패배자만 남게 된다.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까지 버리면서 분노와 원망을 우리 가슴속에 새겨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누구나 용서라는 관용을 베풀기란 어렵다. 상처가 깊을수록 용서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용서를 베풀 수만 있다면 자신이 최고의 수혜자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원한감정으로 인한 분노는 원한을 유발시킨 가해자보다 그로 인해 원한을 품은 피해자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할 뿐이다.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분노와 원망을 떨쳐버릴 수 있다면, 우리는 정신적 속박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얻을 것이며, 원한감정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세상에 오셨던 상제님께서 용서의 이로움과 원한감정의 폐해에 대해 그냥 지나치실 리 없다. 일상생활을 하다보면 남에게 이유 없이 오해를 받고 구설수에 올라 고통을 받고 분개하고 복수심을 불태우는 경우가 있는데, 이에 대해 상제님께서는 “바람도 불다가 그치나니 남의 시비를 잘 이기라. 동정에 때가 있나니 걷힐 때에는 흔적도 없이 걷히나니라.”(교법 1장 28절)고 말씀하시어, 시간이 지나면 진실이 밝혀져 오해가 사라질 것이니 원한을 품지 말고 잘 참고 견뎌내는 것이 현명한 방법임을 밝혀주셨다. 또 괜히 트집을 잡고 싸우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경우 참지 못하고 분에 못이겨 서로 싸우게 되면, 자신 또한 똑같은 사람으로 취급을 받게 된다. 상제님께서는 이러한 분노를 이겨내고 마음을 안정시키면 신명의 도움을 받아 유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믿음을 우리에게 주셨다.(교법 1장 55절 참조) 이렇게 상제님께서는 용서하는 방법에 대해서 암시적으로 말씀해 주신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인간이 하는 일을 직접 또는 신명을 통해 모두 알고 계신다. 상제님께서는 “신명은 탐내어 부당한 자리에 앉거나 일들을 편벽되게 처사하는 자들의 덜미를 쳐서 물리치나니라. 자리를 탐내지 말며 편벽된 처사를 삼가하고 덕을 닦기를 힘쓰고 마음을 올바르게 가지라. 신명들이 자리를 정하여 서로 받들어 앉히리라.”(교법 1장 29절)고 말씀하셨다. 누구나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화가 나고 원한감정을 품게 된다. 그렇다고 자신이 직접 가해자에게 복수하여 또 하나의 악의 씨를 뿌려서는 안 된다. 상제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상제님께 그 이후의 일을 맡겨야 한다. 상제님께 모두 일임하면 정확한 판단과 결정을 내리실 것이다. 또 상대방이 자신에게 편파적이거나 모욕적인 행동을 한다면, 상대방을 원망하기에 앞서 항상 자신에게 허물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자세도 필요하다. 자신에게 허물이 없는데도 상대방이 그런 행동을 한다면, 그 독기(毒氣)가 본처(本處)로 돌아가 상대방이 화(禍)를 입게 된다.(교법 2장 28절 참조)
  상제님께서는 “일에 뜻을 둔 자는 넘어오는 간닢을 잘 삭혀 넘겨야 하리라.”(교법 1장 3절)고 말씀하셨다. 간닢이란 ‘분노의 감정’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곧 큰일을 하려는 사람, 특히 도통을 목적으로 하는 수도인들은 분노를 이기고 이성적이고 지혜롭게 행동해야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큰 교훈을 남겨주신 것이다.
  인간에게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으면 상대에게 똑같은 크기의 상처, 아니 그보다 더 큰 상처를 안겨주려는 성향이 있다. 더군다나 ‘복수를 정의’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유명한 인도의 민족주의자인 간디는 “눈에는 눈으로 복수한다면 세상사람 모두가 맹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자신의 고통을 더 큰 고통으로 복수하려 한다면, 자신이 지금 처해 있는 암흑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진주도 처음엔 조개에게 상처였다. 진주는 조개의 고통의 산물이다. 진주는 조개가 모래와 같은 자극물에 의해 속살에 상처가 생겼을 때, 그에 대한 내부반응에 의해 만들어진다. 상처회복에 필요한 온갖 성분이 상처 입은 부분으로 급히 보내지고, 오랜 시간 동안 상처를 치유하다가 마지막으로 얻어지는 것이 바로 진주다. 상처 입은 조개가 그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영롱한 진주가 완성되는 것이다.
  모래알에 상처를 입지 않는 조개가 없듯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에게 마음의 상처를 준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한다. 그러나 조개는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모래알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보듬고 감싸 안아 아름다운 진주를 만들어 낸다.
  악(惡)을 선(善)으로 갚지 않고 악을 악으로 갚으면, 또 다른 악을 낳는 법이다. 상제님께서는 특히 보복감정을 경계하시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피로 피를 씻는 것과 같으니라.” (교법 1장 34절)
“남을 미워하지 말라. 사람은 몰라도 신명은 먼저 알고 척이 되어 갚나니라.” (교법 2장44절)
“원수의 원을 풀고 그를 은인과 같이 사랑하라. 그러면 그도 덕이 되어서 복을 이루게 되나니라.” (교법 1장 56절)
  남을 포용하면 척은 발생되지 않는다. 남이 나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해서 나도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려고 한다면, 이는 악(惡)을 악으로 갚는 것이다. 복수가 달콤한 꿀처럼 느껴지겠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희열일 뿐이다. 그 꿀은 곧 독(毒)으로 변할 것이다. 나에게 복수를 당한 사람이 또 다시 복수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기 때문이다. 마음에 상처를 준 사람에게 복수심이나 악감정을 갖는 것보다 상대를 포용하고 이해하고 용서한다면,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진주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될 것이다.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에 누명을 쓰거나 오해를 받으면 참기 어려운 것이 자연스런 인간의 생리이다. 그렇다고 과거의 일에 대한 원한과 분노로 인해 새로운 기회를 놓치는 어리석음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과거의 상처를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고 해서 그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일을 끄집어내봤자 상처를 준 사람이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만 더 깊어질 것이다. 용서는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일이다. 원한과 분노에 사로잡혀 살아간다면 마음의 벽만 높일 따름이다. 이 벽은 상제님께서 주시려는 복과 은혜까지도 차단하여 목표한 일의 실현을 방해할 뿐이다. 상제님의 말씀을 믿고 슬기롭게 극복하면 더 강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 상제님께서는 고통 받은 것 이상으로 많은 복과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용서는 악연의 고리를 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며, 서로를 화해로써 연결해주는 밧줄이다. 용서는 원한을 풀고 서로 잘 살자는 해원상생을 실천하는 확실한 방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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