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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문화와 함께 읽는 전경 : 친히 머리카락을 한 줌 베어 주시다

친히 머리카락을 한 줌 베어 주시다



교무부 신상미


상제께서 갑진년 정월에 장 효순 화난을 겪으시고 직부의 집에 가셔서 월여를 머무시다가 다시 형렬의 안내로 원평(院坪) 김 성보(金聖甫)의 집에 머무시게 되었도다. 그때 정 남기와 그의 처남이 일진회원으로서 상제의 가입을 강권하고 군중과 합세하여 상제께 달려들어 상투를 가위로 깎으려고 하되 베어도 베어지지 않으니 상제께서 친히 한 줌을 베어 주시며 “이것으로써 여러 사람의 뜻을 풀어주노라”고 말씀하셨도다. (행록 3장 9절)


  위 성구는 상제님께서 갑진(1904)년 1월01에 장효순의 화난을 겪으시고 한 달이 조금 지난 후에 원평 김성보의 집에 머무실 때 있었던 일이다. 당시는 1904년 2월 6일 갑진왜란02, 2월 8일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이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을 강점하기 위해 움직이던 때이다. 일진회는 이러한 일본을 돕는 정치적 단체로 8월 20일 송병준(宋秉畯)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런데 상제님께서 김성보의 집에 머무신 때는 갑진년 정월에서 한 달이 조금 넘은 때인 2월(양력 3월) 경이니 정남기와 그의 처남이 속한 단체가 ‘일진회’라기 보다는 훗날 일진회와 통합되게 되는 진보회의 초기 단체인 ‘대동회’03임을 알 수 있다.
  이 단체에 가입한 상제님의 처남 정남기(鄭南基)가 여러 사람과 합세하여 상제님께 가입을 강권하며 상투를 자르려고 한 행동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무례한 행위이다. 더욱이 당시 상투는 조선의 유교 사회에서 머리카락을 상하게 하면 불효하는 것이라 여겼고, 신분은 물론 전통적으로 관례를 마치거나 장가를 가면 상투를 트는 것으로 성인 남성을 상징하였다. 또한, 상투는 신분을 상징하기도 했다. 신분에 따라 상투에 하는 장식을 달리하였으므로 상투를 지키는 것은 조선시대 사회 상황에서 남성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과도 같았다. 그런데 도대체 이 단체에서는 왜 사람들에게 강제로 가입하게 하고 상투를 자르려고 한 것일까? 강제로 상투를 잘랐던 단발령(斷髮令)의 역사와 이 단체에 대해 함께 살펴보자.



단발령과 흑의 칙령  
  조선 시대에 성인 남성의 머리 모양이 변하게 된 계기는 바로 강제로 시행된 단발령에 의해서이다. 단발령은 을미(1895)년에 일본이 국모를 시해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김홍집 친일내각이 11월 15일(양력 12월 30일)에 고종을 협박하여 단발하게 함으로써 시작되었다.04 조선 문물의 근대화를 추진한다며 위생에 이롭고 편리하다는 이유로 강행하였으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단발령은 예부터 머리카락 하나까지 소중히 여겨온 우리 민족의 문화를 말살하려던 일본의 정책이었으며, 이로 인하여 조선이 불안정한 사태가 야기되면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일본군의 철수를 연기하고 더 많은 군인을 파견하려는 군사적 전략과 단발로 인해 변화될 조선의 경제를 흔들기 위해서였다.05




  병사ㆍ순검 등을 체두관(剃頭官)으로 임명하여 길을 오가는 모든 백성에게 칼이나 가위를 들고 무차별로 단발하였다.06 단발령을 내리자, 비통한 울부짖음의 소리가 집집에서 끊임없이 들려왔다.07 단발 거부운동가들은 ‘사람의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 감히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08라고 완강하게 반대하였으며, 이 중에 벼슬을 포기하거나 자살하는 사람도 있었다. 백성들은 ‘국모 시해’를 비롯한 일제의 침략적 책동을 성토하면서 결국 의병을 일으켰다.09
  단발령은 조선 남성들에게 전통적 신분 체계의 파괴와 유교 사상과 단절되는 것이었고, 백성들은 단발령 시행이 살아 있는 신체에 가해지는 심각한 박해로 받아들여, 정부에 대한 반감이 절정에 달하였다. 특히나 단발의 강요로 인해 생긴 반감은 개화 자체를 증오하는 것으로 발전하였고 점차 ‘일본화’로 받아들여져 반일 의식으로 이어졌다.
  사대문에 보초를 서서 도성을 드나드는 사람마다 상투를 잘랐기 때문에 지방의 농민을 비롯하여 어물ㆍ소금ㆍ곡물 등의 식량, 철물, 토기, 목제품, 포목류 등을 나르는 사람들과 생필품을 판매하는 보부상들은 상품을 시장으로 가져가기를 꺼렸다. 단발령으로 보부상과 농민의 활동이 줄어들자 생필품 가격이 심각하게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10
  그리고 독립운동가에서 친일로 변절한 윤치호(尹致昊)의 일기에 일본인이 우리에게 단발하도록 한 것은 그들의 모자와 양복 제작자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서라고 기록11되어 있듯 단발령이 시행된 후 모자와 양복의 판매율이 급격히 높았다. 양복은 2배 이상이나 가격이 폭등할 정도였으며, 모자 중에 흑색 산고 모자가 가장 잘 팔려 품절이 되기도 하였다.12 일본인 이발관과 사진관도 성업을 이루었다. 아직 상투를 잘리지 않은 사람은 상투를 튼 자기 모습을 간직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고 상투를 잘린 사람은 손질하기 위해 이발관을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상투할 때 쓰이는 망건, 갓 제작 등 우리나라 전통 수공업은 몰락하고 말았다. 겉으로 보았을 때 단순히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인듯하나 이로 인한 조선의 변화는 컸다.


▲ 덕수궁 大漢門 앞에 자리했던 도미타야(富田屋) 양복점, 출처: 『京城繁昌記』, 博文社 1915, 서울역사아카이브



  옷의 문화도 크게 바뀌었다. 조선인이 흑의를 입게 된 것은 고종이 단발령 이전인 1884년 윤5월 24일에 조선 최초로 ‘갑신의제개혁(甲申衣制改革)’을 시행하면서 조정의 모든 관원에게 흑단령을 입게 하는 복식 간소화에서부터 시작된다.13 1895년 4월 5일에는 관리와 백성들의 차별을 없애고 백성들의 편의를 위한 뜻이라며 고종이 모두에게 검은색 두루마기를 입으라는 칙령을 내렸다.14 겉으로는 정부에 의해 추진된 것으로 보이지만, 백의민족이 흑의민족이 되게 된 것은 단발령과 같이 조선 조정을 장악한 일본공사의 조치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흰색의 영국산 면제품 판매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15
  결국,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항쟁을 비롯하여 아관파천(俄館播遷: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란함)을 단행한 고종에 의해 김홍집 친일내각이 물러나게 되어 1897년 8월에 단발령이 취소되었다. 이후 대한제국(1897~1910)이 선포되고 황제가 된 고종이 1904년까지 자주독립을 위해 광무개혁을 실시했다. 광무개혁의 중심 이념은 옛 제도를 근본으로 삼고 새로운 제도를 참조하겠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이었다. 단발령의 폐지는 전통문화의 가치를 존중하겠다는 ‘구본’을 표방한 것이고, 1902년 9월에 군인과 경찰의 단발과 서구식 복장이 시행된 것은 ‘신참’을 표방한 것이다. 신식 무기와 신식 훈련에는 서구식 복장과 두발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16


▲ 러시아 공사관, 1895년 완공, 현재는 6.25 당시 파괴되고 탑 부분만 남았다(좌). 출처: 서울사랑



▲ 대한제국 때 세워진 원구단(남별궁)과 황궁우 일대, 출처: 『韓國風俗風景寫眞帖』, 京城日韓書房, 1910, 서울역사아카이브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8월 22일 1차 한일협약으로 일본의 고문정치가 시작되었다. 1904년 10월 초에 고종이 어전회의에서 “문명 각국은 다 단발엿스니 대한도 단발이 가다”17고 하면서 단발을 시행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한 것은 시기적으로 보았을 때 일본의 간접통치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이뿐만 아니라 문명개화를 주장하는 지식인들이 단발과 흑의가 문명개화의 상징으로 편리하고 위생적임을 알렸다. 배재학당 학생, 유학생, 순검, 군인, 경찰, 일진회원, 진보회원 등 점차 단발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단발과 흑의를 개화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친일의 상징으로 여겼기에 이를 반대하는 의견은 1930년 초까지 이어졌다.



대동회에서 추진한 흑의단발
  행록 3장 9절의 시기를 보면 성구에서 언급된 단체의 명칭은 ‘대동회(大同會)’이다. 대동회는 동학 3대 교주인 손병희(孫秉熙, 1861~1922)가 이용구를 시켜 동학을 재건하기 위해 1904년 2~3월(양력 3~4월)에 설립한 조직 단체이다. 이후 정부의 탄압으로 인해 같은 해 7월 25일(양력 9월 4일)에 중립회(中立會), 8월 29일(양력 10월 8일)에는 ‘진보회(進步會)’로 조직명을 바꿔 설립하였다.18 사전상에서는 이 3단계의 조직명을 통칭하여 ‘진보회’라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왜 『전경』에 ‘대동회 회원’을 ‘일진회 회원’이라고 한 것일까? 8월 20일에 송병준에 의해 조직된 일진회가 중립회와 동일한 내용의 4대 강령을 내세우자 지역에 따라 9월 말부터 명칭이 혼용되었다.19 훗날 진보회의 많은 회원이 일진회와 1904년 12월 2일에 통합되면서 더욱 혼용되어 후대에 기록되었다. 통합 전의 일진회를 구분하여 ‘원초 일진회’라고도 한다.20 이후 손병희는 일진회에 통합된 진보회와 구분하기 위하여 1905년 12월 1일에 새로운 조직인 ‘천도교’를 설립하였다.
  일진회와 혼용되어 사용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손병희를 비롯한 동학교도들이 1904년 ‘갑진개혁운동’을 추진하면서 일진회와 동일하게 검은 옷을 입고 머리카락을 자르는 ‘흑의단발(黑衣斷髮)’을 실행했기 때문이다. 손병희는 동학농민운동의 좌절을 통해 종교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개혁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문명개화노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흑의단발’은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기 위해 강제적으로 내세웠던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동회 때 단발은 1901년부터 권동진, 오세창, 조희연 등이 손병희에게 국내의 모든 동학교도의 상투를 자를 것을 권고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손병희는 이때 솔선수범하여 자신의 머리를 단발하고 흑의를 입었다.21 그 이후 손병희는 1904년 4월 일본에 건너온 박인호와 홍병기에게 대의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일반 도인의 결속이 필요하고, 이들의 결속을 공고히 하려면 단발로 맹세할 필요가 있다면서 “세계문명에 참여하는 표준이오 또한 단결을 굳게 하여 회원의 의지를 일치케 하는 것”으로 단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지시하였다.22 그는 진보회 개회 당시에도 단발을 강조하였다. “우리 동학 도인들이 단발을 하지 않으면 독실한 뜻을 증험할 수 없고 세계적으로 공본된 인허를 받을 수 없으므로 일제히 단발하는 것이 옳다.”라고 하여 한꺼번에 16만여 명이 단발을 시행했다.23 동학교인들에게 단발은 위생에 유익하고 노동에 편리하며, 개혁의 의지를 나타내는 상징이자 문명된 국가의 표상이었던 것이다.



민회(대동회ㆍ중립회ㆍ진보회)의 포교 활동
  손병희가 조직한 대동회ㆍ중립회ㆍ진보회를 지칭할 때 민회라고도 하는데, 이 민회는 조선의 향촌 사회에서 내부적으로 형성된 농민의 조직기반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24 전국 360여 군(郡)에 진보회 지부를 설치하고 관찰사나 군수 등을 상대로 각종 민원에 대해 실시하고 계몽 강연을 하며 포교 활동을 하였다.25 일본 측의 조사보고서인 『주한일본공사관기록』 21권에 따르면 진보회 참여 계층은 정치적 열망을 가진 부유층과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는 일반 농민층으로 나뉜다.26 이는 손병희가 종교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 정부에 인정받고자 정치개혁을 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한 어떤 체제의 국가도 인정할 수 있다는 그는 종교를 통한 백성들의 통합을 주장했다. 즉, 동학의 국교화(國敎化)를 주장한 것이다.27 이러한 그의 굳은 의지를 표현하기 위한 방책으로 가입과 동시에 단발을 강조했다.

  행록 3장 9절을 보면 대동회 때의 포교 활동이 강제성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04년 3월의 내용은 아니지만 같은 해 10월 13일의 《대한 매일신보》 내용을 통해 진보회의 회원 가입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전북 진보회의 활동 내용으로 “전라북도 관찰사가 내부로 전보하기를 인민 수천 명이 진보회라 자칭하고 수백 명이 둔취하였다 하고 익산 군수가 보고하였고, 또 함열군 황등 장터에도 둔취하였다 하였더라.”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둔취(屯聚)’는 군병을 한곳에 모아서 수비하고 경계하는 일 또는 여러 사람이 한곳에 모여 있는 것을 의미한다. 『전경』 성구에도 “… 정 남기와 그의 처남이 일진회원으로서 상제의 가입을 강권하고 군중과 합세하여 상제께 달려들어 상투를 가위로 깎으려고 ….”라고 하였으니 대동회 때도 진보회 때처럼 여러 사람이 모여 다니면서 가입을 강권하고 강제로 단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교운 1장 15절에는 7월28에 김형렬이 동학당원들이 원평에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상제님께 찾아뵙고 아뢰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모임이 보국안민을 목적으로 내세우는 손병희의 민회임을 아신 상제님께서는 또다시 갑오농민전쟁 때처럼 동학군이 사람들을 강제로 동학에 가입시켜 약탈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셨다.
  『증산의 생애와 사상』을 보면 상제님께서 정남기에게 일진회(대동회)를 탈퇴할 것을 권하셨으나 정남기는 그 말을 따르지 않다가 훗날 패가망신을 당하게 된다.29 25만 일진회원들이 일본에 의해 1910년 9월 12일 원래 약속했던 액수의 20분의 1인 15만 엔을 받고 강제로 해산당했다. 15만 엔은 일진회원을 25만 명으로 추산할 때 1인당 쌀 몇 되 값밖에 돌아가지 않는 돈이었다.30 이처럼 일본은 1910년 한일합병조약을 맺기 전까지 일진회를 이용한 후 헌신짝처럼 버렸다.
  상제님께서는 정남기와는 달리 박공우에게 탈퇴하라고 권하셨다기보다 “한 몸으로 두 마음을 품은 자는 그 몸이 찢어지리니 주의하라.”라고 탈퇴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이란 것을 미리 말씀해주셨다. 다행히 상제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박공우는 일진회(민회)와의 관계를 끊고 상제님만을 따랐다(권지 1장 19절, 교운 1장 58절). 어느 날 박공우가 전 동지들에게 조소를 받으며 머리를 깎여 바깥출입을 금하고 머리를 기르고 있을 때도 상제님께서는 “나는 오직 마음을 볼 뿐이로다. 머리와 무슨 상관하리오.”라고 말씀하셨다(교법 2장 10절).
  상제님의 처남인 정남기가 일진회 회원(대동회 회원)이 되어 상제님께 가입을 권하며 강제로 상투를 자르려 하자 상제님께서 “이것으로써 여러 사람의 뜻을 풀어주노라”라고 말씀하시며 머리카락 한 줌을 베어주셨다. 여기서 ‘여러 사람’은 대한제국을 강점하고 조선의 경제를 침략하려고 한 일본인, 이를 도운 일진회 회원과 문명개화를 주장한 민회(대동회ㆍ중립회ㆍ진보회) 회원 그 외에 서양 근대화를 추구한 지식인일 것이다. 이들이 단발을 통해 얻고자 한 것은 각자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제님께서는 그들의 뜻을 풀어주셨다. 이는 단발령이 내렸으나 조선의 풍습으로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겠다는 사람과의 마찰이 불가피할 것을 아시고, 개화되는 시대에 발생하는 많은 상극을 해소하시고자 친히 머리카락을 한 줌 베어주신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01 1904년 정월(음력 1월 1일)은 양력 2월 16일이다.
02 1894년 6월 23일(양력 7월 25일) 청일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894년 6월 12일(양력 7월 14일)에 일본이 경복궁 침공 및 국왕을 생포한 갑오왜란과 유사한 사건으로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이 한반도에 재침해 해서 전역의 군사를 점령한 갑진왜란이 일어났다.
03 『상생의 길』에서는 ‘진보회’로 서술함. 김성수, 「일진회에 대하여」, 『상생의 길』 2 (2004), p.12 참고.
04 『고종실록』 33권, 32년 11월 15일; 35권, 34년 8월 12일.
05 이민원, 「상투와 단발령」, 『사학지』 31 (1998), pp.273~288 참고.
06 황현, 『역주 매천야록』 상, 임형택 외 옮김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6), p.476.
07 L.H.언더우드, 『상투의 나라』, 신복룡 옮김 (서울: 집문당, 2019), p.198.
08 『효경』, 「개종명의장제일(開宗明義章第一)」, “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09 정경숙, 「단발령에 관한 문화현상학적 연구」 (서경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2), p.45.
10 이사벨라 버드 비숍,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이인화 옮김 (파주: 살림, 2012), p.419.
11 「윤치호 일기」 3 (1895년 12월 26일), 한국사료총서, http://db.history.go.kr/
12 이경미, 「19세기 개항 이후 한ㆍ일 복식제도 비교」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9), p.80 참고.
13 『고종실록』 21권, 21년 윤5월 24일.
14 『고종실록』 33권, 32년 4월 5일.
1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1 (과천: 탐구당 문화사, 1999), pp.46-47 참고.
16 김태웅, 『한국 근대사를 꿰뚫는 질문 29』 (파주: 아르테, 2019), pp.210-211 참고.
17 「어전회의」, 《대한매일신보》 1904. 10. 10.
18 이용창, 「동학·천도교단의 민회설립운동과 정치세력화 연구」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pp.76-93 참고.
19 김정인, 『천도교 근대 민족운동 연구』 (서울: 한울, 2009), p.67.
20 김종준, 『일진회의 문명화론과 친일활동』 (성남: 신구문화사, 2010), p.40 참고.
21 이동초, 『천도교 민족운동의 새로운 이해』 (서울: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2010), p.91.
22 이용창, 앞의 글, p.106.
23 이동초, 앞의 글, p.91 참고.
24 조계원, 「근대 전환기의 맥락에서 본 정치적 충성」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p.121 참고.
25 천도교중앙총부 교서편찬위원회, 『천도교 약사』 (서울: 천도교중앙총부, 2006), p.125.
26 김종준, 『고종시대 군주권과 민권의 관계』 (서울: 역사공간, 2020), pp.169-170.
27 이용창, 앞의 글, pp.71-72 참고.
28 이때 시기가 명확하지 않으나 ‘동학당원’이라 하였으므로 일진회가 조직되기 전인 원초 일진회(중립회) 시기인 1904년 7월로 추측된다.
29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증산의 생애와 사상』 (서울: 대순진리회 출판부, 1994), p.117.
30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5 (서울: 인물과 사상사, 2007), pp.217-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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