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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52년(2022)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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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 화합단결의 어귀에서

화합단결의 어귀에서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차선근




  도전님께서는 화합단결을 누누이 강조하셨습니다. 『대순회보』에도 화합단결을 다룬 글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글도 화합단결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그만큼 수도인들에게 화합단결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글은 이전 글들과는 다르게, 서로를 고맙게 여기라는 도전님의 훈시로부터 시작하여, 우월감과 표단의 극복, 신명의 시험을 차례로 조명함으로써 주제에 다가가 보려 합니다.
  우월감이나 표단이 화합단결을 저해하는 유일한 요소인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법[眞法]을 어기고 정의를 부정하며 공동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 역시 화합단결을 저해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글은 다만,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상황에서 하나로 모여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라면, 그 속에서 화합과 단결을 저해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가 우월감과 표단이라고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서로 고마운 수도인들


  도전님의 여러 훈시 가운데 하나를 살펴보겠습니다.


“화합단결은 우리의 뜻을 이루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지 혼자의 힘만으로는 성취할 수 없습니다. 서로의 힘과 뜻을 합쳐야 비로소 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니, 도인들은 서로 간에 고맙고 감사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 권위로써 도인을 이끌어 나가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언제나 대화로써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래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라도 할 수 있는 환경과 분위기를 만들어 대화에 참여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 간에 대화로써 일을 풀어나가는 것이 곧 상생원리이니,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01


  이처럼 우리의 일은 혼자서 할 수 없다는 것, 힘과 뜻을 합치는 화합단결을 해야만 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 힘과 뜻을 모으는 서로는 고마운 사람들이며, 그렇기에 권위에 의지하지 말고 언제나 대화로써 매사를 풀어나가라는 것이 도전님의 가르치심입니다.
  서로의 대화는 원활하게 소통하는 것이지, 명령을 전달하고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간과하면 진솔하고 의미 있는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선각 위치에 놓인 수도인이라면 이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도전님께서 대화를 위해서는 먼저, 아랫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라도 할 수 있는 환경과 분위기부터 조성해야 한다고 하셨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선각과 후각의 기탄없는 대화는 심정(心情)을 서로 통하여 혼연일체를 만들어내며,02 그로써 체계가 단단하게 서고, 그렇게 해서 이룩된 체계는 올바른 수도를 가능하게 합니다.03
  대화를 통한 화합단결은 선각과 후각이라는 특수한 관계에서만 도모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이것을 보편화하여 모든 수도인에게도 확대 적용해야 합니다.
  수도인들끼리 어떤 이야기라도 마음 놓고 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상대의 가치를 인정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가 어리다거나, 배운 게 부족하다거나 하는 따위의 이유로 ‘네가 무엇을 안다고 그래?’하는 마음을 가져 상대를 무시한다면, 상대의 약점이나 말실수를 흠잡으며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려고 덫을 놓아 기다린다면, 그런 수도인은 어떤 말이라도 하거나 들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이럴 때는 서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도, 대화를 통한 화합단결도 전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도전님께서는 ‘도인끼리 서로 감사한 사람들이라고 여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감사한 사람이라면 그와 대화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전님께서는 대화를 통한 화합단결을 위해서는, 먼저 수도인들끼리 서로 감사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던 것입니다.




  도인들은 서로 고마운 사람이라는 도전님의 말씀은 우리 도장에서 시행되는 공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전님께서는 생장염장(生長斂藏)의 원리에 따라 사시(四時: 春夏秋冬)와 24절후(72후)로 돌아가는 도의 원체(原體)인 1년(360일04), 그리고 그 안의 월ㆍ일ㆍ시ㆍ분ㆍ초의 조화와 자리를 각각 맡는 것이 시학공부, 나아가 시법공부라고 하셨습니다.05 맡아야 할 자리가 많으므로 사람도 많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양위 상제님께서 전하신 진법(眞法)을 실행하여 도통하고 개벽하기 위해서는 그 일을 할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연월일시분초의 자리를 모두 맡아야 하니 한두 명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에 드는 사람은 출세욕ㆍ명예욕ㆍ재물욕 등 사회의 부귀영화를 뿌리치고 상제님의 도문에 들어와 포덕천하와 구제창생을 목적으로 천지대도를 묵묵히 닦는 수도인이며, 도통과 개벽을 위해 일하는 일꾼입니다. 일꾼이 단 한 명이라면 아무리 성심이 뛰어나더라도 연월일시분초 모두를 혼자 감당할 수 없습니다. 많은 수도인 일꾼들이 그래서 필요한 것이며, 따라서 상제님의 도문소자(道門小子)이자 귀한 일꾼인 수도인들은 서로에게 고마운 사람이 됩니다. 서로가 고맙다는 간단한 사실을 안다면 서로가 화합단결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고, 그러므로 반드시 화합 단결해야 한다는 것이 도전님의 가르치심입니다.



우월감, 저 멀리 내다 버리고


  대화하고 화합단결 해야 한다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를 가로막는 게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상대를 존중하지 않고 무시하며 업신여기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지나친 자기애(自己愛)로부터 비롯되는 우월감(優越感)에서 시작됩니다.
  원래 인간은 자신을 아끼고 존중하는 심리적 경향을 가지는 게 정상입니다. 그것이 자존감(自尊感, self-esteem) 또는 자존심(自尊心)입니다. 자존감이든 자존심이든 자신에 대한 인식과 평가를 좋게 가져가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입니다. 다만, 자존감은 ‘내가’ 나에게 용기와 의지를 북돋우고 매사 닥치는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태도이고, 자존심은 ‘상대가’ 나를 나쁘게 평가할 때 그에 대한 반감으로 튀어나오는 태도라는 데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06
  자존심이든 자존감이든 그것이 너무 낮거나 없으면 열등감(劣等感)으로 이어집니다. 열등감은 나를 학대하는 것을 넘어, 때로는 자율성을 잃고 상대에게 얽매여 그를 추종하기만 하는 의타적(依他的) 습성을 만듭니다. 상제님께서는 “사람마다 그 닦은 바와 기국에 따라 그 사람의 임무를 감당할 신명의 호위를 받느니라. 남의 자격과 공부만 추앙하고 부러워하고 자기 일에 해태(懈怠)한 마음을 품으면 나의 신명이 그에게 옮겨 가느니라.”07고 하셨습니다. 열등감과 의타심에 찌든 사람은 신명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적당한’ 자존감과 자존심은 필수적입니다.
  이와 반대로 자존심이나 자존감이 너무 과도하면, 특히 상대와의 관계에서 지나치게 발현되면 우월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게 됩니다. 우월감은 상대보다 내가 더 낫다고 여기는 감정이나, 이를 뒤집어보면 상대가 나보다 못하다고 느끼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이가 많으니까, 내가 덩치가 더 크니까, 내가 포덕을 더 많이 했으니까, 내가 먼저 입도했으니까 등등, 상대가 나보다 못하다는 우월감에 빠져드는 자기 혼자만의 ‘근거 없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이러한 우월감이 만들어내는 문제는 첫째, 상대를 무시하고 업신여기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우월감에 젖어 있다면 상대를 언제나 나보다 못난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에, 만약 상대의 장점이 돋보이거나 상대가 뭔가 훌륭한 일을 했을 때는, 그것을 인정하거나 축하해주지 못하고 시기하며 흠을 잡아 누르려고 하게 됩니다. 대개 그럴 때는 상대가 자만하지 않도록 경계하려 한 것이라는 ‘자기 합리화’까지 빼놓지 않습니다. 상제님께서 잘 기억해두라고 하셨던 『대학』의 글귀에, 남의 장점과 잘함을 마치 자기가 그러한 것처럼 좋아하고 기뻐하는 사람이라면 비록 특출난 재주가 없더라도 크게 이롭고 번창할 수 있는 법이나, 우월감이 강하다면 그러하지 못하고 시기와 질투에 빠져 위태로워지는 법이라고 했음을 자각해야 할 것입니다.08
  상대의 장점을 젖혀두고 언제나 단점만 부각하여 드러내려고 애쓰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이 너무 지나치면 소시오패스(sociopath)처럼 양심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악인(惡人)이 됩니다. 소시오패스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매사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일컫는데, 특히 상대를 동료가 아니라 철저한 도구로 여기고 계산적으로 행동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집니다. 자신을 악인으로 자각하지 못하는 이런 종류의 악인은 자기가 똑똑하고 선하다는 착각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우월감의 둘째 문제는 상대를 감사하게 여기는 것을 방해함에 있습니다. 우월감은 상대를 나와 나란히 걸어가는 벗이자 짝으로 느끼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그저 나에게 복종하고 따라와야만 할 어리석고 못난 사람으로 여기게 합니다. 상대가 어떤 호의를 베풀면, 우월감에 젖은 사람은 그것을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가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은 것뿐이라는 생각만 하게 됩니다. 그것을 알게 된다면 상대는 우월감에 젖은 사람을 가까이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래서는 서로에 대한 존중도 고마움도 자라날 수 없습니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상대를 업신여기고 고맙게 여기지 않게 하는 우월감은 화합단결을 저해하는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우월감에 젖은 사람들 사이에 화합단결이란 구호는 존재할 수 있어도, 그 구호는 요란한 소리만 낼 뿐이고 진정으로 뜻과 힘이 모이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화합단결을 위해서는 상대를 인정해주고 고맙게 여겨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월감을 ‘저 멀리 내다 버려야만’ 합니다.




표단(豹丹), 보내고


  화합단결을 막아서는 우월감과 더불어 경계해야 할 것은 표단(豹丹)입니다. 표단은 표범의 성질, 그러니까 사나운 성질입니다. 사나우면 다투는 것을 즐기게 됩니다. 우월감이 표단과 같은 것은 물론 아닙니다. 우월감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상대와 싸우려고 폭력적으로 덤벼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우월감이 약하다면 상대와 잘 싸우려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정한 우월감은 표단과 관련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상제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호둔(虎遁: 호랑이로 변신하는 술법)09 사례는 표단을 우월감과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상제님께서는 광구천하(匡救天下)를 위해 인심(人心)과 속정(俗情)을 살피시려고 3년 동안 전국을 주유하셨습니다. 1900년이 되어서야 고향인 객망리로 돌아오시고 시루산에서 조모님의 묘를 옮기셨습니다[緬禮=移葬]. 곧이어 시루산에서 진법주를 외우시고 신장들을 소집시키는 공사를 보셨는데, 이 공사는 천지대도를 여시고 천지공사를 시행하시려는 목적으로 신명계를 재조정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10
  『전경』은 이 공사 직전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일이 시루산에서 벌어졌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상제님께서 호랑이로 변신하는 호둔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둘째, 유덕안의 집에 가셔서 쥐눈이콩 한 줌과 냉수를 종종 드셨는데, 이때 유덕안의 아들 칠룡에게 “네가 나에게 살려달라고 애걸하는구나.”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셋째, 시루산에 오르셔서 소리를 지르기도 하시고 산밑 샘터 너머에서 우시기도 하셨다는 것입니다.11 
  이 가운데 둘째와 셋째, 즉 칠룡에게 ‘살려달라’는 호소를 잘 들었다고 하신 것은 인간을 살리고자 하시는 상제님의 마음을, 샘터 너머에서 우셨다는 것도 인간 생존의 처참한 현실에 가슴 아파하시며 “이제 온 누리가 멸망하게 되었는데 모두 구출하기 어려우니 어찌 원통하지 않으리오.”12라고 하셨던 애휼(愛恤) 어리신 마음을 드러내는 장면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장면 역시 상제님께서 인간을 고통에서 구하고자 하시는 애휼의 심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상제님께서 호랑이로 변신하시는 모습을 두고 그저 변신 술법을 익히는 요술 공부라고 여겼지만,13 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상제께서 일찌기 손바래기 시루산에서 호둔을 보시고 범의 성질이 너무 사나워 사람을 잘 해친다 하기에 그 성질을 알아보시니라. “사람이 전부 돼지 같은 짐승으로 보이니 범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사람들이 그 피해를 심하게 입을 것이므로 종자를 전할 만큼 남겨두고 번성치 못하게 하였노라.”고 종도들에게 이르셨도다.14


  『전경』에 따르면 상제님께서 호둔을 보신 이유는, 범의 성질이 너무 사나워 사람을 잘 해친다는 사람들의 말이 과연 사실인지 확인해보고자 함이셨습니다. 세상의 소문을 그대로 믿기보다 실증해보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상제님께서는 시루산에서 신명계를 재조정하는 공사를 보시기 전에, 인간에게 해악과 고통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몸소 확인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상제님의 애휼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목할 부분은 호둔을 하시니 ‘사람이 전부 돼지 같은 짐승으로 보인다’고 하셨던 상제님 말씀입니다. 호랑이 같은 고양잇과 동물은 사물을 흑백으로 보므로 색상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갖지만, 사물의 형체는 알아볼 수 있기에 사람과 돼지 정도는 충분히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호랑이가 사람을 돼지 같은 짐승 ‘먹잇감’으로 본다는 것은 그 거칠고 사나운 성질 때문입니다.15
  상제님께서 호둔으로써 몸소 체험하여 확인해주신 호랑이의 성질은 사나워서 싸우기 좋아하는 표단입니다.


공우의 성질이 사나워서 남과 자주 다투기에 하루는 상제께서 공우에게 “너는 표단이 있으니 인단으로 갈음하라”고 말씀하시고 난 뒤로는 성질이 누그러지고 남에게 이기려고 하지 않고 다시 다투지 아니하였도다.16


  표단의 ‘단(丹)’은 원래 붉은빛을 띠는 천연광물[硃砂]을 뜻하는 것으로서, 그 특유의 붉은빛은 뜨거운 정성 덩어리[丹誠], 곧 강렬한 마음의 표현이라는 의미로 발전하게 했습니다. 여기에는 선도 악도 없습니다. 어떤 마음이든 그것이 강렬하게 발현된다면 모두 ‘단’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17 이렇게 해서 인단(人丹)은 인간이 가진 순수한 마음을, 표단(豹丹)은 표범이 가진 그 특유의 사나운 마음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표단은 표범의 성질이지만, 호랑이의 성질이기도 합니다. 표범과 호랑이는 물론 다릅니다. 주지하듯이 표범은 호랑이의 ⅔ 수준으로 그 덩치가 작고, 몸의 무늬도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생김새가 비슷했기에 표범과 호랑이는 순우리말인 ‘범’19 이라고 같이 불려왔으며, 심지어 표범을 암컷 호랑이로 여기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민간에서 표범과 호랑이의 구분이 엄격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표단은 표범의 성질이지만, 호랑이의 성질이기도 합니다. 호랑이는 신앙의 대상이기도 할 정도의 영물이었으나, 앞선 상제님 말씀처럼 그 사나운 성질 표단으로 인하여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림 1> 한국에 서식하는 표범 (아무르 표범)18



<그림 2> 한국에 서식하는 범 (백두산 호랑이=시베리아 호랑이)20



  정리해봅니다. 상제님께서는 우주와 창생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신명계를 재편하시고 천지대도를 여시며 천지공사를 시행하시기 이전에, 먼저 인간을 애휼하시고 구제하시려는 뜻을 보이셨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것들이 무엇인지 몸소 확인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호둔을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호둔을 통해서 입증하신 호랑이의 성질은 사납다는 것, 그 때문에 사람을 쉽게 해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호랑이는 번성하지 못하고 쇠락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박공우 역시 사납고 잘 다투는 성질인 표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역시 호랑이처럼 앞날이 밝지 못함은 자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상제님께서는 말씀 하나만으로 박공우의 성질을 표단에서 인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호둔으로써 직접 확인해주신 표단은 사납고 잘 다투는 성질입니다. 그래서 상대를 돼지 같은 짐승으로 보이게 합니다. 표단을 가지고 있으면 상대를 무시하고 업신여기게 될 것임은 자명하다는 말입니다. 곧, 우월감의 폭력적 형태가 표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성질은 화합단결을 저해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로 기능합니다.
  따라서 ‘표단은 보내야(몰아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를 업신여기는 마음, 상대와 다투려고 드는 마음이 계속 발생하여 화합단결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화합단결이 안 되어 뜻과 힘을 모을 수 없다면 우리의 일도 이룰 수 없습니다. 표단을 버리고 상대를 존중하는 것은 화합단결하는 길이면서, 동시에 척을 푸는 길이기도 합니다. 상제님께서는 천한 사람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지 말고, 오히려 그를 우대해주어야 척도 풀리고 좋은 세상이 빨리 온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21 이것이 잘 다투려고 하는 사나운 성질인 표단을 버려야 하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신명의 시험은, 다 받는다


  표단과 우월감을 버려야 한다는 말은 두말할 나위 없이 당연합니다. 이것을 항상 염두에 둔다고 하더라도 평소 실행에 옮길 때는 한 가지 주의할 게 있습니다. 그것은 표단과 우월감을 버렸다고 생각하더라도, 때때로 그 감정이 치밀어오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상제님께서는 그것이 신명의 시험일 수 있다고 훈계하셨습니다.


“이제 천지신명이 운수자리를 찾아서 각 사람과 각 가정을 드나들면서 기국을 시험하리라. 성질이 너그럽지 못하여 가정에 화기()를 잃으면 신명들이 비웃고 큰일을 맡기지 못할 기국이라 하여 서로 이끌고 떠나가리니 일에 뜻을 둔 자가 한시라도 어찌 감히 생각을 소홀히 하리오.”22


  너그러움이 없어 화목한 분위기를 만들지 못하면 신명들이 떠나간다는 것이 상제님 말씀이십니다. 명심해야 할 사실은 첫째, 단 ‘한 분’의 신명도 혹여 있을지 모를 속사정을 봐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끌고 떠난다고 하셨으니, 너그럽지 못함을 이해해주는 신명은 단 한 분도 없습니다! 신명은 오직 존재하는 사실에 지극할 뿐입니다.23
  둘째, 신명들이 떠나기는 떠나는데, 그냥 떠나는 게 아니라 한바탕 비웃고 떠난다는 것입니다. 상제님의 도문에 어렵사리 들어와 나름 힘과 공을 들여 도를 닦는데, 이것을 알아주어야 할 신명들이 격려는 고사하고 비웃음만 내던진다면 이 얼마나 한심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사나운 성질과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너그러움을 잃은 나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어디에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습니다.
  셋째, 정말 주의할 문제는 신명들이 무대를 만들어 놓고 바로 이런 상황을 연출하여 시험을 본다는 데 있습니다. 시험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일부 종교인들은 ‘우리가 절대 시험을 보지 않도록 해주시고, 단지 우리를 악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하고 빕니다. 학생들도 시험이라면 스트레스를 받아 진저리를 칩니다. 하지만 우리 수도인들은 시험을 반드시 봅니다. 위의 상제님 말씀에 의하면, ‘신명의 시험은 괴롭고 싫지만, 다 받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의 목적은 운수를 채워 넣을 기국의 크기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상제님께서는 신명의 시험 과목 가운데 하나가 성질이 사나운지 너그러운지 알아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운전면허 시험장에서 운전 코스와 장애물을 설치하듯이, 욱하는 성질이 끓어올라 화가 터져 나오는 상황, 상대를 업신여기며 깎아내리고 그럼으로써 화합단결을 못 하게 막는 상황을 신명들이 기획ㆍ각본ㆍ감독할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표단이나 우월감을 잘 억누르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신명들이 각본을 짜서 나를 주연 배우로 삼아 무대 위에 내몰고 뭔가를 연출할 때는, 별안간 표단이나 우월감이 마음속에 샘솟는 순간이 닥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는 ‘당황하지 말고’, 신명이 나를 시험하는 상황임을 알아차리고 즉시 그 시험을 여유롭게 통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도인 면허 자격증을 천지신명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져서는 안 된다! 그 대신 져주어야 한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표단과 우월감에 사로잡힌 상대를 만나는 일에 대해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상제님께서는 이럴 때는 그 사람과 멱살 잡고 같이 싸우거나 혹은 맞서지 말고 물러서 져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트집을 잡고 싸우려는 사람에게 마음을 누그리고 지는 사람이 상등 사람이고 복된 사람이니라. 분에 이기지 못하여 어울려 싸우는 자는 하등 사람이니 신명의 도움을 받지 못하리라. 어찌 잘 되기를 바라리오.”24


  상제님 말씀에 근거하면, 표단과 우월감에 사로잡혀 흠집을 내고 트집을 잡아 싸우려고 덤비는 사람은 운수가 작거나 없는 하등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맞서서 싸우다가 혹여 지기라도 한다면, 분통이 터져 더욱 나쁜 상황에 빠집니다.
  상제님께서는 이런 상황에 부닥치면 승부를 볼 욕심에 사로잡혀 다투지 말고, 오직 져주라고 하셨습니다. 져주는 것은 지는 것과 다릅니다. ‘지는 것’은 능력이 모자라서 받는 결과이지만, ‘져주는 것’은 이기고 지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라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져주는 사람은 더욱 유능하고 마음과 운수가 더 큰 상등 사람입니다.
  지지 않고 져주는 것은 ‘너그러움’이라는 시험 채점표를 들고 서 있는 신명들에게 좋은 점수를 받는 확실한 방법입니다. 표단과 우월감을 가진 사람은 절대 져주지 못합니다. 표단과 우월감을 극복한 사람이라야 져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강함[剛强] 대신 부드러움[柔]으로 만사를 대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는 부드러움이 귀한 것이요, 강하고 굳은 것은 재앙의 근원이 된다’고 하신 상제님 말씀처럼,25 이런 사람이 바로 고귀한 사람입니다. 신명이 가장 좋아하는, 그래서 큰 운수 자리로 안내를 받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사실, 수도 생활에서 혹여 어떤 어려움을 당하면 신명의 도움을 간절히 바랄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한두 번 하다 보면 자연스레 ‘신명의 도움을 받기 위해 급작스레 심고(心告)만 드릴 게 아니라, 평소에 무언가 신명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를 미리 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당연히 들게 됩니다. 그 준비란 하늘을 감복시킬 만큼의 대단한 정성을 미리 쌓아 두는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포덕하고 태을주를 받들며 유형ㆍ무형의 공(功)을 쌓는 일이 그 정성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화목하지 못하면, 그래서 화합단결을 못하면 신명이 응하지 않고 떠난다는 상제님 말씀을 되새겨 볼 때, 사나운 성질인 표단과 상대를 업신여기는 우월감을 버리는 일이야말로 가장 먼저 정성을 들여 이루어야 할 일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질 인(仁)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니, 신명의 음호(陰護)를 항시 받음은 당연합니다.26
  다시 강조하자면, 우월감은 저 멀리 내다 버립니다! 표단은 보냅니다! 신명의 시험은 다 받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지지 않습니다. 그 대신 깨끗하게 져줍니다! 이게 수도인이 닦고 연마하는 기초 초식 중의 기초 초식입니다.






01 《대순회보》 16 (1990), 2면.
02 『대순지침』, p.78.
03 차선근, 「임원과 도인 간의 通心情을 위하여-대화를 중심으로」, 『상생의 길』 2 (2004), pp.33-51 참조.
04 무엇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서 1년의 정의와 길이는 달라진다. 흔히 지구의 1년을 365.2422일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지구가 타원으로 태양을 공전하는 주기를 1년(태양년)으로 보기 때문이다. 만약 지구가 타원이 아니라 원으로 태양을 공전한다면 1년이 360일이 된다. 태양계의 모든 행성은 타원 공전 궤도를 가지는데, 지구는 금성과 해왕성 다음으로 원에 가까운 공전 궤도를 갖는다.
05 『도전님훈시』 (1989. 5. 30) ; 『도전님훈시』 (1989. 6. 22) ; 『도전님훈시』 (1991. 6. 12).
06 한민·서신화·이수현·한성열, 「한국인의 자존심 개념과 특성에 대한 연구」, 『한국심리학회지: 문화 및 사회문제』 19-2 (2013), p.204, pp.227-230.
07 교법 2장 17절.
08 교운 1장 57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또 대학(大學)의 다른 장(章: 傳十章)을 외워주시며 잘 기억하여 두라고 이르셨는데 글귀는 이러하도다. ‘만약 어떤 한 신하가 정성스러워 한결같을 뿐 다른 재주는 없지만, 그 마음이 매우 고와 포용력이 있어서, 남이 가진 재주를 마치 자기가 가진 것처럼 여겨 남의 빼어남과 밝음을 그 마음으로 좋아함이, 마치 자기 입에서 나온 것보다도 더한다면, 이는 능히 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로써 자손과 여민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니, 또한 이로울 것이다! 남의 재주를 시기하고 미워하며, 그 빼어남과 밝음을 배척하여 통하지 못하게 하면, 이것은 능히 포용하지 못함이다. 이로써 자손과 여민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니, 역시 위태로우리라(若有一介臣 斷斷兮 無他技 其心休休焉 其如有容焉 人之有技 若已有之 人之彦聖 其心好之不啻若自其口出 寔能容之 以能保我子孫黎民 尙亦有利哉 人之有技 媢疾以惡之 人之彦聖 而違之 俾不通 寔不能容 以不能保我子孫黎民 亦曰殆哉)’.
09 원래 호둔은 기문둔갑에서 구둔(九遁)의 하나로서 인사(人事)의 길흉을 논하는 것이나, 『전경』의 호둔은 변신술을 의미한다. 차선근, 「호랑이에 대한 소고」, 『상생의 길』 3 (2005), pp.39-40.
10 차선근, 「신축년에 천지대도를 열으시고 下」, 《대순회보》 241 (2021), pp.22-29.
11 행록 2장 1절·7∼10절.
12 행록 5장 24절.
13 행록 2장 11절.
14 교법 3장 19절.
15 차선근, 「호랑이에 대한 소고」, p.39.
16 교법 2장 31절.
17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漢韓大辭典』 (서울: 단국대학교출판부, 2000), pp.464-465.
18 이미지 소스 https://en.wikipedia.org/wiki/Amur_leopard
19 ‘범’은 순수한 우리말이다. 호랑이는 ‘虎狼’이라는 한자 말이다.
20 이미지 소스 https://en.wikipedia.org/wiki/Siberian_tiger
21 교법 1장 9절.
22 교법 1장 42절.
23 교운 1장 19절.
24 교법 1장 55절.
25 處世柔爲貴 剛强是禍基. 행록 3장 49절.
26 공사 2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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