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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51년(2021)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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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 을유년 칠월 초엿새

을유년 칠월 초엿새



대순종교문화연구소 김성수





1. 들어가는 말


  교운 2장 46절에 도주님께서 을유년 칠월 초엿새날에 이용직에게 “오늘 무슨 큰 일이 일어나고 도수가 바꿔지리라”라고 하시며 “이제 두려워 말라. 다녀오도록 하라”라고 분부하시는 장면이 있다. 처음 이 구절을 읽었을 당시 ‘아! 이날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었겠구나. 일본 천황(당시의 명칭, 이하 일왕으로 표기)이 공중파 방송에서 무조건 항복을 발표한 날이 1945년 8월 15일이니까 그 날이겠군…’하고 다음 구절로 넘어갔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동안 여기에 대한 문제는 없었다. 을유년 칠월 초엿새가 양력으로 1945년 8월 13일이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무언가 해결하지 못한 숙제를 놔둔 것처럼, 개운하지 않은 인지부조화의 상태를 수년간 경험하고 있다가, 최근 교법 1장 54절의 ‘… 천상 싸움이 끝난 뒤에 인간 싸움이 결정되나니라’는 말씀이 뇌리를 스치면서, 도수가 바뀐다는 것이 당연히 인간세계의 일을 뜻하는 게 아닐 것인데, 지금껏 잘못된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각성을 하게 되었다.
  실제 당시 사건의 전개를 보자면 8월 14일에 일왕이 대신들을 모아놓고 미국에 무조건 항복을 할 것인지의 최종결정을 했었고, 8월 15일은 단지 녹음된 목소리를 공중파 방송을 통해 발표한 것뿐이었다. 두 날짜 중 더 근본적인 사건을 따지자면 당연히 8월 14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만 놓고 보아도 인간계의 사건과 신명계의 도수 변화를 혼동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명계에서 벌어진 도수 변화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대략적인 흐름 정도는 짐작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던 1945년 8월 6일부터 무조건 항복을 발표한 8월 15일까지 일본 정부 내부에서 벌어진 일과 주요 인물들 사이에 오고 갔던 대화들을 간략하게 재구성 해 보았다. 중간중간 파란색과 빨간색으로 표시해 둔 부분은 일본 정부 내부의 의견대립과 변화과정을 한눈에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이 부분만 읽고 바로 결론 부분으로 넘어가도 전체적인 글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없으리라 본다.



2. 1945. 8. 6 ~ 8. 15의 기록01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투하
     
8월 8일
  도고[東鄕] 외상(外相)은 일왕을 배알하고, 원폭에 대한 트루먼의 발표 등 관련 사항을 보고했다. 일왕은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조건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시기를 늦추는 것은 좋지 않다. 신속히 전쟁을 종결시키도록 노력하라.”고 지시했다.


8월 9일
  도고 외상은 다음날인 9일 이른 아침에 소련이 (연합국 측으로) 참전한 것을 알았고, 오전 8시 스즈키 수상의 사저를 방문, 최고전쟁지도회의 개최를 요청해 동의를 얻었다. 외상은 이어서 요나이[米內] 해상(海相: 이하 해군상으로 표기)을 방문했다. 해군상도 동의하며 포츠담선언02을 수락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오전 11시 이전에 시작된 최고전쟁지도회의 서두에서 스즈키 수상은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포츠담선언을 수락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인데, 의견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도고 외상은 국체수호(천황제의 유지)라는 한가지로 집중하고 싶다고 했으나, 아나미[阿南] 육상(陸相: 이하 육군상으로 표기)은 “국체수호는 당연한 것이다. 그 외의 조건으로서 1) 미군이 본토를 점령하는 경우, 동경은 제외한다, 그 외의 점령지역과 병력은 극소화한다. 2) 무장해제는 일본이 한다. 3) 전쟁범죄문제의 처리도 일본이 하는 것을 제시하고 싶다.”고 주장했다. 도고 외상은 “국체수호 이외에 조건을 달면 결렬될 공산이 큰데, 또 전쟁을 해서 이길 수 있는 것인가?”라고 질문하였고, 아나미 육군상은 “확실한 계산은 서 있지 않지만 최후의 결전 즉, 본토 결전을 벌이는 것은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우메즈[梅津] 참모총장(參謀總長)과 도요다[豊田] 군령부총장(軍令部總長)도 아나미 육군상과 같은 의견이었다. 회의는 결말이 나지 않고 해산되었다.
  각의(閣議: 내각회의)03 중이었던, 오전 11시에 나가사키에 두 번째의 원폭이 투하되어 커다란 피해가 생겼다는 뉴스가 들어왔다. 각의는 오후 5시 반에 일단 휴식에 들어가 6시 반에 재개되었는데, 국체수호 이외의 조건은 붙이지 않는다는 도고 외상과 3가지 조건을 붙인다는 아나미 육군상이 대립하였고, 뒤이어 전쟁의 전망을 가지고 아나미 육군상과 요나이 해군상이 또 대립했다.
[도고 외상]국체의 수호만 가능하다면 어떠한 고통도 견딘다. 얼마 후 다시 부흥하기 위해 모든 것을 참고 견디는 것이 일본을 구하는 길이다. 황실을 포함하지 않는 것으로 하여 전부를 수락하여 종결을 꾀할 수밖에 없다.”
[아나미 육군상] “4가지의 조건을 스웨덴, 스위스를 통해 미, 영에 통지하고 만일 받아들인다면 평화의 준비, 그렇지 않다면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이 과반수의 의견이다 …. 전쟁의 국면은 호각지세(互角之勢)이다. 패배는 생각지 않고 있다.”
[요나이 해군상] “전쟁이 호각이라고 하나, 과학전으로나 무력전으로나 명백하게 지고 있다. 브겐비르전 이래 오키나와전 모두 패하고 있다.”             
[아나미 육군상] “전투에서는 패하고 있으나, 전쟁에서는 패하지 않고 있다. 육, 해군의 감각이 다르다.”
  우메즈 참모총장과 도요다 군령부총장은 육군상과 같은 의견이었다. 각의도 또 의견이 수렴되지 않은 채 오후 10시가 넘어 해산되었다. 스즈키 수상은 일왕의 배석하에 재차 최고전쟁지도회의를 열고 일왕의 결단을 청하기로 결정했다. 회의에 앞서 요나이 해군상은 스즈키 수상에게 “다수결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포츠담선언 수락이 결정될 경우에는 육군이 소란을 일으켜서 큰일이 발생할 위험이 있다. 각자에게 의견을 말하도록 한 뒤에 폐하의 결단을 청하고, 그것을 회의의 결론으로 해야 한다.”고 의견을 말했고 수상도 찬성했다.


▲ 수상 스즈키와 전범 내각: Tadahiko Okada, Hiromasa Matsuzaka, Kantaro Suzuki, Mitsumasa Yonai, Genki Abe, Heigoro Sakurai, Sadajiro Toyada, Fujihara Yasui, Tadaatsu Ishiguro, Kozo Ohta, Shigenori Togo, Seizo Sakonji, Naoto Kobiyama Hosaku Hirose, Tsukizo Akinaga, Hisatsune Sakomizu, Naoyasu Murase, Korechika Anami (출처: 위키피디아-영문, 1945년 6월 9일)



8월 10일
  9일 오후 11시 50분부터 어전(御殿)에서 최고전쟁지도회의가 열렸다. 멤버 6인에 히라누마(平沼) 추밀원의장(樞密院議長)이 더해져 7인이 되었다.
[도고 외상] “원폭 투하와 소련 참전이 있었고, 교섭에 의해 조건이 완화될 가망은 없다. 천황의 지위에 변경이 없는 것을 전제로 포츠담선언을 수락할 수밖에 없다.”
[요나이 해군상] “외상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아나미 육군상] “외상 의견에 강력히 반대한다. 수락한다고 해도 4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안된다. 1억 국민이 모두 전사한다고 해도 대의(大義)를 위해야만 한다. 본토 결전에는 자신이 있다.”
[우메즈 참모총장] “육군상에게 전적으로 동의한다. 본토 결전의 준비에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소련의 참전으로 불리해지긴 했으나, 무조건 항복을 해야만 할 정황이 된 것은 아니다. 무조건 항복은 영령들에게 면목이 서질 않는다. 4가지 조건은 최소한의 양보이다.”
[히라누마 추밀원의장] “작전에 자신이 있다면 전쟁을 계속해야 마땅하다.”
[우메즈 참모총장] “공습에 대비해서는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방법을 개선했으므로 앞으로는 기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공습만으로 적에게 굴복해야 할 이유는 없다.”
[도요다 군령부총장] “적 기동부대에 대해서는, 본토 결전 준비 때문에 여유가 없었다. 금후로는 필요에 따라, 대등한 수의 병력으로 무찌를 수 있도록 작전을 수정하겠다. 필승이라고는 할 수 없겠으나 필패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상당한 타격을 적에게 안겨줄 자신이 있다. 국체 유지만으로는 통솔상 불안감이 있다. 국민 중에는 아직 전의에 불타고 있는 자들이 있다.
  스즈키 수상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는 것은 유감이나 일이 중대하고 사태는 긴박하여 지연을 허락할 수 없다. 왕의 결단을 청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뒤에 일왕 앞에 나아가 의견을 청했다.
[일왕] “나는 외상의 안에 동의한다. 개전 이래로 육, 해군이 해온 것을 보면, 계획과 실제가 다른 경우가 많았다. 지금 본토 결전의 준비를 하고 있고, 이길 자신이 있다고 하지만, 우려하고 있다. … 이러한 상황에서 본토 결전에 돌입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 매우 염려스럽다. 일본 민족이 전부 죽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이 일본이라는 나라를 자손들에게 전할 수 있겠는가. 나의 임무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일본이라는 나라를 자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한 사람이라도 많은 일본 국민들을 살려서, … 충성스럽고 용맹한 군인에게서 무기를 빼앗고, 충성을 다해 근무한 자를 전쟁범죄인으로 만드는 일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나, 국가를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스즈키 수상은, 일왕의 결단을 회의의 결론으로 한다고 말하고, 8월 10일 오전 2시 반에 회의를 마쳤다.
  일동이 방공호 입구까지 나왔을 때, 육군의 요시즈미[吉積] 군무국장(軍務局長)이 스즈키 수상에게 다가와 “총리, 약속과 다른 것이 아닙니까?”라고 다그쳤다. 회의가 끝난 뒤라고 하여, 회의 구성원도 아닌 일개 배석자인 국장이 직접 수상에게 다그치는 것도 비상식(육군이 그런거라 별로 비상식도 아니었을 것이다)04이고, 이것은 일왕의 결단에 대한 반발을 의미했다.
  8월 10일 오전에 도고 외상은 ‘천황의 국가통치 대권에 대한 변경 요구는 없다는 전제하에서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는 전보를 연합국 측에 보냈다.
  8월 10일 오후 1시에 중신들(와카즈키 전임수상에서 고이소 전수상에 이르는 8인)은 수상관저에 모여 도고 외상으로부터 설명을 들은 후, 3시 35분에 각각 의견을 일왕에게 말했다. 대세는 포츠담선언 수락이었다.
  육군성에서는 아나미 육군상이 오전 9시 50분에 고급부원 이상을 모아서 전날 밤의 양상을 설명하고 “주장해야 할 것은 주장했지만, 이제는 왕의 결단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포츠담선언 수락은 황실의 보전이 확인되어야 비로소 실행되는 것이므로, 육군은 화전(和戰: 항복 또는 전쟁) 양면의 태세로 연합국 측의 회답을 기다린다.”고 훈시했다. 듣고 있던 육군성의 중견간부는 쇼크를 받았다. 끝까지 전쟁 계속을 고수하던 자들은 특히 충격이 컸다.
  오후 2시부터 각의가 열려 포츠담선언 수락 사실의 대국민 발표 여부가 의논되었다. 결국 저녁 무렵 정보국 총재 담화로 발표되며, 다음 날 아침 신문에도 나가게 되었다. 아라오 군무과장(軍務課長)은 이 사실을 듣고, 아나미 육군상의 단호히 성전(聖戰)의 완수를 주장하는 또 다른 훈시가 동시에 방송되도록,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신문에도 게재되도록 요구하고, 육군상 이하의 승인은 얻지 않은 채 방송국에 보냈다.
  시모무라 정보국 총재가 아나미 육군상을 만나 사전조정을 마친 대국민 담화문을 가지고 방송국에 왔는데, 아라오 군무과장에 의한 육군상 훈시도 이미 도착해 있었다. 시모무라 총재는 아나미 육군상에게 전화를 했다. 육군상은 그 훈시의 내용은 거의 알지 못하는 듯했는데, ‘방송해 줘’라고 말했다. 시모무라는, 육군상이 아랫사람들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고 있어서 방송을 거부하면 암살을 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 결과 모순된 두 개의 방송이 동시에 나가게 되었다.
  외국 방송이 일본의 포츠담선언 수락을 보도하자, 외지에 있던 부대의 지휘관은 반발했다. 중국 파견군인 오카무라 사령관은 예하 부대에, 보도는 적의 모략선전이므로 흔들리지 말라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우메즈 참모총장은 “평화교섭이 시작된 것은 사실이나, 국체의 수호와 영토의 보위를 위해서는 전군 옥쇄(玉碎)05한다고 해도 싸움을 그만두는 것은 없다.”, 이어서 아나미 육군상과의 연명(連名)06으로 “국체 수호에 대한 확약에 조금이라도 의혹이 있을 경우에는 단호히 전쟁목적의 달성에 매진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라고 타전했다.
  남방 총군의 데라우치 사령관은 동경에 “오늘과 같은 정세는 개전 초기부터 각오해 오던 바이고, 지금에 이르러 성전(聖戰) 완수의 의사가 좌절되고 적이 제시하는 조건을 감수하게 된다면, 전력(戰力)이 없어진 나중에 국체의 수호와 영토의 보위를 누가 보장할 것인가?”라고 타전했다. 오카무라 사령관은 한층 더 강경한 의견을 보냈다.



8월 12일
  동경이 연합국의 회답을 라디오에서 청취한 것은 8월 12일 오전 0시 40분이었다.
  도고 외상은 10시 반에 스즈키 수상을 방문한 뒤, 11시에 일왕에게 미국에서 온 회답에 대해 보고했다. 일왕은 그대로 수락하자는 뜻을 수상에게 전하라고 지시했다. 외상은 12시 반, 스즈키 수상에게 일왕의 의향을 전했다.
  오후 3시부터 열린 각의에서는, 수락파와 재조회(再照會)파07가 대립했다.
아나미 육군상은 재조회에 더하여 무장해제나 보장점령의 문제08를 다시 꺼내 들었다. 도고 외상은 이 이상으로 주문을 달면 교섭은 결렬된다, 이는 일왕의 의향에 배치되고, 다시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육군상과 참모총장은 연명(連名)으로, ‘전쟁 종결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제안에 대하여, 본 12일 이른 아침, 미국의 방송에 접했는데, 육군으로서는 이 방송이 국체 수호의 진의에 반하고 있으므로 단호히 일축하고, 전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태도를 견지하여 국책을 추진 중이므로, 각 군도 다시 단호히 작전 임무에 매진하기 바람’이라고 타전했다.
  연합국에서의 정식 회답이 오후 6시 반에 도착했다. 다음 날 아침 발표하게 되었다. 스즈키 수상은 오후 9시에 키도 내부(內府: 일왕의 상시보필 대신)와 만났다. 키도는 수락해야 한다고 말했고, 수상은 동의했다.


 
8월 13일 [을유년 칠월 초엿새]
  오전 4시가 지나 비서관 하야시 대좌는, 아나미 육군상의 명을 받고, 우메즈 참모총장을 방문해 “육군상은, 하타[畑] 원수(元帥)에게 육군 상층부를 대표해서 왕을 만나, 뜻을 바꿔 달라고 청하게 할지를 고려 중입니다.”라고 전했다. 참모총장은 잠시 침묵하다가 “본관은 포츠담선언을 수락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우메즈 참모총장은 수락 거부, 혹은 재조회로 자신과 마음이 일치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아나미 육군상(1945. 8. 15 자결)으로서는 충격이었다.
  육군상은 7시 10분에 키도 내부(內府)를 방문해 “비관주의로는 전쟁에 이길 수 없습니다. 본토 결전으로 연합국의 조건을 일본에 유리하게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으므로, 나는 계속 전쟁을 강력히 주장합니다.”라고 말했는데, 키도“왕은 이미 결정했고, 연합국에도 통지가 끝났으니까.”라고 대답했다. 아나미 육군상은 떠날 때 웃으면서 “육군성 내부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시는군요.”라고 말했다.
  오전 8시 반, 최고전쟁지도회의 구성원 6인과 법제국 장관이 출석하여 회의가 열렸는데, 10시 전에 일왕이 양(兩) 총장을 불러, 외교교섭 중이므로 공세적인 항공작전은 보류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여, 두 총장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회의는 10시 반부터 재개되었다. 도고 외상은 2시에 자리를 떠나서 일왕에게 논의 상황을 보고하였는데, 수락해야 한다는 외상의 주장이 옳으므로 그 뜻을 수상에게 전하라는 일왕의 말이 있었다.
  회의는 3시에 중지되었고 4시 전부터 각의가 되었는데, 최고전쟁지도회의와 똑같이, 수락을 주장하는 스즈키 수상, 도고 외상, 요나이 해군상과 재조회(再照會)를 주장하는 아나미 육군상, 우메즈 참모총장, 도요다 군령부총장이 대립했다. 각료 12인이 수락에 찬성하였고, 마츠자키 법상(法相), 아베 내상(內相), 야스이 국무상의 3인은 반대, 태도 보류가 1인이었다.
  각의가 끝나기 전 수상은 “차제에 평화를 찾자는 것이 왕의 말씀이다. 전쟁을 계속한다 해도 원자폭탄이 출현한 지금 이미 때늦은 것이고, 국체 수호도 도저히 불가능해진다. 각의 결과를 말씀드리고 다시 한번 성단(聖斷)을 청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아나미 육군상과 야스이 국무상은 다시 한번 자주적 무장해제와 보장점령 문제를 조건에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요나이 해군상이 이미 앞 전의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 왕의 판단이 내려진 사항을 다시 의논하는 것은 부적당하다고 말해 스즈키 수상도 채택하지 않았다.
  각의는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로 7시에 해산되었다. 산회 후 아나미 육군상은 스즈키 수상에게 “왕의 결정을 청하는 것을 이틀만 기다려 주실 수 없겠습니까?”라고 했는데, “이 이상은 연장시킬 수 없습니다.”라는 답이었다. 우메즈, 도요다 양(兩) 총장은 오후 7시, 수상관저에 있던 도고 외상을 찾아가서 11시까지 의논을 계속했다.


▲ 일본의 어전회의: 중앙에 일왕 히로히토가 앉고, 해군 장교는 왼쪽, 육군장교는 오른쪽에 앉는다. (출처: 위키피디아, 1943년 4월)


 
8월 14일
  일왕은 오전 10시에 육군의 하타와 스기야마 겐(본토 결전의 핵심 제1 총군사령관, 자결), 해군의 나가노 3인의 원수를 불러 의견을 구했다. 스기야마와 나가노는, ‘아직 적에게 일격을 가할 힘은 있습니다’라고 했는데 특히 나가노는 “군은 여전히 여력이 남아 있고 또 사기도 왕성하므로 항전하여 상륙한 미군을 단호히 격퇴하여야 합니다.”라고 보고한 취지가 기록에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하타는 자신이 없다고 대답하고 있다.
  일왕은 “소련도 참전하였고 특별공격도 과학의 힘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포츠담선언을 수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말하고 (2대 1의 의견이 나왔지만) 군의 복종을 요구했다. 3인은 각 군의 협력을 약속했다.
  10시 50분에 최고전쟁지도회의와 각의의 멤버, 히라누마 추밀원의장, 약간 명의 배석자가 출석하여 어전회의가 열렸다. 아나미 육군상, 우메즈 참모총장, 도요다 군령부총장이 한 번 더 연합국에 조회해봐야 한다고 상주한 후, 스즈키 수상이 일왕에게 다시 결정을 청했다.

  [일왕] “달리 의견이 없으면 내 의견을 말하겠다. 반대론의 취지는 잘 들었지만, 나의 생각은 이전에 말한 것과 달라진 것이 없다. 나는 세계의 현상과 국내 사정을 깊이 생각해 보았는데,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국체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걱정도 있으나, 내 생각에 상대국에서 보낸 회답문이 악의를 가지고 작성된 것이라 보이지는 않는다. 상대방의 태도에 일말의 불안이 있다고 하는 것도 일단은 당연한 것이나 나는 의심하고 싶지 않다. 중요한 것은 국민 전체의 신념과 각오의 문제라고 생각하므로 이번 상대국의 회답을 그대로 수락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모쪼록 모두가 그렇게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육·해군의 장병으로서 무장해제나 보장점령은 견디기 어려운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국민이 옥쇄하여 순국하고자 하는 기분은 잘 알고 있으나, 나 자신은 어떻게 되더라도 국민의 생명을 구하고 싶다. 이 이상 전쟁을 계속하면 결국, 우리나라는 완전히 초토화된다. 나로서는 국민에게 더 이상의 고통을 겪게 하는 것은 견딜 수 없다. 일본이 완전히 없어지는 결과에 비해서 조금이라도 종자가 남겨질 수만 있다면, 나아가 다시 부흥이라는 광명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나는 메이지 천황의 3국 간섭 시기의 괴로운 심정을 생각하며, 참고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뎌내어 장래의 회복을 기대하고 싶다. 이제부터는 일본을 평화의 나라로 재건하는 것인데, 이것은 어려운 일이고 또 시간도 오래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국민이 일치 협력하여 노력하면 반드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국민과 함께 노력하겠다.
  오늘까지 전장(戰場)에서 전사하고, 혹은 내지에서 비명에 쓰러진 사람이나 그 유족을 생각하면 비탄을 참을 수 없고, 전상(戰傷)을 입고 전화(戰災)를 당하여 가업을 잃은 사람들의 앞으로의 생활에 대해 근심을 감당하기 어렵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할 것이다. 국민은 현재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므로 필시 동요하리라 생각되는데, 국민에게 호소하는 게 좋다면 언제라도 마이크 앞에 서겠다. 육·해군 장병은 특히 더 동요가 클 것이므로 육·해군 대신은 그 마음을 달래는데 상당히 어려움을 겪을 것인데, 필요하다면 내가 어디라도 나가서 친히 설득해도 좋다. 차제에 조서(詔書)를 낼 필요도 있을 것이므로, 정부는 조속히 그 준비를 하길 바란다.”
  말이 끝나자, 스즈키 수상은 재차 왕의 결단을 청해서 폐를 끼친 점을 사죄했다. 딱 정오였다.


▲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적 항복 선언에 환호하고 있는 프랑스 파리 주둔 미군들(출처: 위키피디아)



8월 15일
  일본제국의 종전(終戰) 선언이 정오 뉴스에 나왔다. 그 내용은 히로히토 일왕이 연합국의 포츠담선언(무조건적인 항복)을 수락한다는 것이었다.



3. 나가는 말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이후에, 히로히토 일왕은 일관하여 포츠담선언의 수락을 희망하고 있고, 수상을 비롯한 대다수의 정부 관리들도 그에 동조하고 있다. 다만, 육군을 대표하는 아나미 육군상과 우메즈 참모총장과 같은 수뇌부들은 전 국민이 옥쇄하더라도 쉽게 굽힐 수는 없다는 입장을 표명하며, 전 군(軍)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공사 2장 4절에 나오는, 상제님께서 일본에게 붙여주신 ‘일시(一時) 천하통일지기(天下統一之氣)’는 한 때 부여된 기운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그것이 거두어지는 시점이 있기 마련인데, 그동안 막연하게 일본이 미국에게 패망하는 시점이겠거니 하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자료를 정리하다 보니, 상제님께서 붙여주신 ‘천하통일지기’가 거두어지는 시점을 도주님께서 ‘오늘 무슨 큰일이 일어나고 도수가 바꿔지리라’고 하신 을유년 칠월 초엿새(양력 8월 13일)로 특정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8월 10일, 8월 12일 계속하여 아나미 육군상과 연명(連名)하여 각 군에 ‘전원 옥쇄의 각오로 전쟁을 계속한다’는 메시지를 보내던 우메즈 참모총장이 어찌된 일인지 불과 하루 뒤인 8월 13일이 되자 ‘포츠담선언 수락’으로 바뀌었고, 이에 충격을 받은 아나미 육군상은 혼자서라도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15일 새벽에 자결하고 만다. 만일 이 둘이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더라면 전원 옥쇄를 영광으로 알고 있던 대다수 육군에 의해 본토 결전이 수행되었을 것이고 엄청난 인명 손실이 뒤따랐을 것이다.
  8월 14일 오전에 있었던 어전회의에서 일왕은 최후의 결정을 위해 육군의 하타(히로시마 지역 책임자)와 스기야마 겐(본토 결전의 핵심 제1 총군사령관), 해군의 나가노 3인의 원수를 불러 의견을 구했다. 하타를 제외한 두 사람이 아직 군의 사기는 왕성하므로 상륙한 미군을 격퇴할 수 있다고 하였으나, 일왕은 2:1의 의견에는 상관없이 그냥 항복하기로 하고 군의 복종을 요구했다. 이 중 본토 결전을 위한 핵심 인물이었던 스기야마 겐 역시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충분히 반격을 지휘할 수 있었던 핵심 인물들이 무기력하게 자결을 택하는 것을 보면 도수의 변화가 인간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을유년 칠월 초엿새의 도수 변화로 인해 일본에게 부여되었던 ‘일시 천하통일지기’는 거두어지고, 수많은 인명이 사지(死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제시하며 글을 마친다.


▲ 1945년 9월, 일본군 무장해제시키는 미군과 구경나온 동네주민(출처: pacificparatrooper.wordpress.com)






01 左近允尚敏, 『敗戦,一九四五年春と夏』, 光人社NF文庫(2012.9), pp.267~297.
저자인 사콘죠 나오토시(左近允尚敏: 1925~2013)는 일본제국해군으로 1945년 종전 당시 대위로 복무 중이었다. 최종계급은 해상자위대의 해장(海將:중장).
02 1945년 7월 26일,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독일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열린 연합국 정상회담 중 발표한 연합국의 대일(對日) 공동선언. 연합국 정상들은 이 선언에서 일본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고, 또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대일처리방침을 밝혔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03 대통령 중심제 국가의 국무회의에 해당한다.(법률용어사전)
04  저자인 左近允尚敏의 말이다. 이 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의 설명을 덧붙이자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육군의 위상은 비정상적으로 높았다. 예를 들어 같은 계급일지라도 해군 병사들이 육군 병사들을 대할 때는 ‘육군 나으리’와 같은 호칭을 붙여 존경을 표시해야만 할 정도로, 육군 제일이라는 횡포가 자못 심했다.
05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져 흩어진다는 뜻으로 명예나 충절을 지키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것.
06 (두 사람 이상이) 이름을 나란히 씀.
07 8월 10일 도고외상이 연합국 측에 보냈던 전보에 대한 연합국 측의 회신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항복 시점으로부터 천황과 일본 정부의 권한은 연합군 최고사령관(SCAP)에 종속된다.(필자 주: 일본의 요구대로 천황제는 존속시키기로 함) …일본 정부의 최종적인 형태는 포츠담선언에 기초하고 일본 국민이 자유롭게 표명한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
이를 그대로 수락하자는 파와 이대로라면 국체 수호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므로 다시 연합국 측에 조회를 해 보자는 파로 나뉨.
08 연합국 측이 내건 조건을 일본이 제대로 이행하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미군이, 예를 들어 큐슈와 같은 지역을 점령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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