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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8년(2018)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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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역사인물 : 탁월한 책략가 진평(陳平)

탁월한 책략가 진평(陳平)
 
 

연구원 조규제

 
 
 
사람을 쓸 때는 남녀 노약을 구별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진평(陳平)은 야출 동문 여자 이천인(夜出東門女子二千人)하였느니라.

(교법2장 40절)
 
  지난 수천 년 동안 중국 중원에서는 수많은 영웅호걸이 일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였다. 그중 하나가 유방(劉邦)이다. 진평(?~기원전 178)은 4년간의 초한(楚漢) 전쟁에서 유방의 책사로 활약하였다. 젊어서부터 원대한 포부를 가졌던 진평은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는 유방을 만나 그를 위해 헌신하였다. 진평의 기발한 계책은 유방을 사지에서 구하고 그가 천하를 평정하는 데 공헌하였다.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학(學)을 좋아한 진평은 책략가로서, 또 행정가로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한(漢)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진평에 대한 역사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史記)』 「진승상세가(陳氶相世家)」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글은 「진승상세가」를 주로 하였고, 『사기』의 「고조본기(高祖本紀)」와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 등에 기록된 진평에 대한 내용을 참고하여 정리하였다.
 
▲ 항우와 유방이 마지막 전투를 벌인 해하
 
 
출생과 성장
 
  진평은 중국 하남성(河南省) 호유현(戶牖縣)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는 책 읽기를 좋아하였으며, 결혼하기 전까지 형 진백(陳伯)과 함께 살았다. 진백은 농사를 지으면서 진평의 공부를 뒷바라지하였는데 그의 처가 공부만 하는 진평에 대하여 불평하자 부인과 헤어졌다.
  진평이 장가들 때의 일이다. 부자들은 가난한 진평에게 딸을 주려 하지 않았고, 그 또한 가난한 집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호유현에 장부(張負)01라는 부자가 있었는데 그의 손녀딸이 다섯 번 시집을 갔으나 남편이 모두 죽어 아무도 그녀에게 장가들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평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당시 마을에 초상이 났다. 진평은 자청하여 상갓집의 일을 돕기로 하였다. 진평은 장부를 의식하고 일찍 가서 일하고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장부도 손녀딸의 신랑감으로 풍채 좋고 성실해 보이는 진평을 눈여겨보았다. 장부가 진평을 따라 그의 집에 가서 보니 매우 가난하여 거적으로 문을 달았는데, 집 앞에는 장자(長者: 덕이 고매한 사람)들이나 타고 다녔던 수레의 바퀴 자국이 많이 나 있었다. 장부는 집으로 돌아와 아들 장중(張仲)과 의논하고 손녀딸을 진평에게 시집보냈다. 진평은 장가든 후에 재물이 넉넉해졌고 교류의 폭도 결혼하기 전보다 더 넓어졌다.02
  진평이 젊었을 때 마을에 제사가 있었는데 그는 제사에 사용한 고기를 나누는 일을 맡았다. 그때마다 그는 고기를 매우 공평하게 나누었고, 마을 사람들은 고기를 공평하게 나누는 진평을 칭찬하였다. 칭찬을 들은 진평은 “천하를 나누는 일을 맡겨도 공평하게 잘할 수 있는데”라며 푸념 섞인 말투로 자신의 포부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 일은 ‘진평분육(陳平分肉)’의 고사로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유방과의 만남
 
  진시황(秦始皇)이 죽은 후 진나라의 폭정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자 진평은 위왕(魏王) 구(咎)를 섬겼다. 진평이 위왕을 섬기면서 계책을 내놓았으나 중용되지 못하였고 모함까지 받게 되자 위나라를 떠나 항우의 심복이 되었다. 진평이 항우를 도와 진나라 군대를 쳐부수자 항우는 진평에게 경(卿)의 작위를 내렸다.
  항우가 팽성현에 있을 때 은왕(殷王, ?~기원전 205년)은 반기를 들어 유방의 편을 들었다. 진평은 항우의 명을 받고 당시 초나라에 있던 위왕 구의 빈객(賓客)들과 함께 은나라를 쳐서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유방이 은나라를 다시 굴복시켰다. 은나라가 유방에게 항복하자 화가 난 항우는 은나라를 평정했던 장군과 관리들을 주살하려고 하였다. 이에 목숨의 위협을 느낀 진평은 항우에게서 받은 황금과 관인(官印)을 밀봉하여 항우에게 돌려보내고 살길을 찾아 칼을 지팡이 삼아 허둥지둥 그곳을 떠났다.
  진평이 항우를 떠나 황하를 건널 때 뱃사람이 그가 혼자 가는 것을 보고 죽이려 하였다. 이것은 진평이 귀중한 물건을 가졌을 것으로 의심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를 알아차린 진평은 옷을 벗어 알몸으로 사공을 도왔다. 사공은 비로소 진평이 가진 재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죽이려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던 검도 돌려주었다.
  하남성(河南省) 수무현(修武縣)에 도착한 진평은 친구인 위무지(魏無知)의 천거로 유방을 만나게 되었다. 진평은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진평을 만나 얘기를 나눈 유방은 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호군(護軍)을 겸하는 도위(都尉: 장군보다 낮은 무관)로 삼아 자신과 수레를 함께 타고 다니게 하였다. 이에 장군들은 재능을 알 수 없는 진평을 중용하였다며 반대하였지만, 유방은 그를 더욱 총애하였다.
  또 한 번은 진평이 장군들에게 금품을 받았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유방은 진평을 천거한 위무지를 불러서 꾸짖으니 그가 말하였다.
 
“신이 드린 바는 능력이고, 폐하께서 물으신 바는 품행입니다. … 신은 기이한 계책을 내는 선비를 천거한 것이니, 생각건대 그 계책이 참으로 국가에 이로운지 아닌지를 따질 뿐입니다.”03
 
유방이 다시 진평을 불러 꾸짖어 말했다.
 
“선생은 위왕을 섬기다 중용되지 않자 항우를 섬기러 떠났고, 지금은 또 나를 따라 유세하러 왔으니 믿을 만한 사람이 이렇게 여러 마음이 있는가?”
 
진평이 말했다.
 
“신이 위왕을 섬겼으나 위왕이 신의 말을 쓰지 않아 위나라를 떠나 항우를 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항우는 다른 사람은 믿지 못하였고, 그가 신임하고 총애하는 사람은 항씨가 아니면 그 아내의 오라비들이었으니, 비록 빼어난 선비라도 등용될 수 없어 저는 곧 초나라를 떠났던 것입니다. 듣건대 한왕께서 사람을 잘 가려 쓰신다기에 귀의한 것입니다. 신은 맨몸으로 온 탓에 금품을 수수하지 않고는 사용할 자금이 없었습니다. 진실로 신의 계책 중에서 쓸 만한 것이 있다면 대왕께서는 그것을 쓰시고, 만약 쓸 만한 것이 없다면 자금이 아직 그대로 있으니 잘 봉하여 관청으로 보내고 사직하여 집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04
 
  진평의 말을 들은 유방은 즉시 그에게 사과하고 상금과 함께 호군중위(護軍中尉: 군감찰기관)에 제수하여 장군들을 감독하게 하였다. 그러자 장군들은 더 말하지 못했다.
 
 
뛰어난 책략을 발휘하다
 
  유방이 팽성(彭城)에서 항우의 공격을 받고 대패하여 형양성(滎陽城)으로 물러나 병사들을 정비하였다. 항우는 그 후 다시 급하게 한나라군을 공격하여 군량과 마초(馬草)를 운반하는 보급로를 끊고 형양성을 포위하였다. 얼마 후 유방은 형양의 서쪽 땅을 할양하여 강화를 요청하였으나 항우는 듣지 않았다. 이에 진평은 무력만으로는 항우를 물리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군신(君臣) 간의 이간책을 건의하였다. 항우의 충직한 신하로는 책사 범증(范增, 기원전 277~기원전 204)과 장수 종리매(鍾離昧) 등이 있었다. 유방은 진평의 계책을 받아들여 이간책에 쓸 황금 4만 금을 내어주었다. 진평은 먼저 이 황금을 활용하여 초나라 진영으로 여러 명의 첩자를 파견하여 유언비어를 퍼트리게 했다. 종리매를 비롯한 여러 장수가 공을 많이 쌓았는데, 그들에게 봉지(封地)를 내어 왕으로 봉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나라와 동맹하여 항우를 멸망시키고 각기 왕이 되고자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항우는 종리매를 의심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사자를 유방의 진영에 보냈다. 이때 유방은 진평의 계책대로 귀중한 음식을 준비하게 하였다. 그런 다음 항우의 사자를 보고는 짐짓 놀란 듯 “이런 범증의 사자인가 하였더니 항우의 사자였구려!”라고 말하고는 잘 차린 음식을 모두 물리게 하고 다시 형편없는 것으로 항우의 사자를 대접하였다. 초나라로 돌아온 사자는 항우에게 모든 상황을 보고하였다. 항우는 진평의 계책대로 범증을 비롯하여 장군들을 의심하였다. 이때 범증이 유방이 주둔하고 있는 형양성의 공격을 건의하였으나 항우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항우의 의심을 받은 범증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등창이 나서 죽었다. 범증은 장량(張良)에 버금가는 참모였으나 항우는 그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 이렇게 진평은 범증과 항우를 이간하는 데 성공하였다.
  식량이 떨어지자 진평은 어두운 밤을 이용해 여자 2천 명에게 군복을 입혀서 형양성 동문(東門)으로 나가게 하였다.05 초나라군이 속아 이들을 공격하는 사이 진평은 유방과 함께 서문(西門)으로 나가서 관중으로 돌아갔다. 이렇듯 진평은 탁월하고 기묘한 계책으로 위기에 처한 유방을 여섯 번이나 구하였다.
  관중으로 돌아온 유방은 홍구(鴻溝)를 가운데 두고 항우와 대치하였다. 오랜 전쟁에 지친 항우와 유방은 홍구의 동쪽을 초나라, 서쪽을 한나라의 영토로 하기로 하고 휴전협정을 맺었다. 항우는 약속 한 대로 동쪽에 있는 팽성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장량과 진평은 철수하는 항우를 공격하게 하였다. 뛰어난 참모 범증을 잃은 항우는 이때부터 수세에 몰리기 시작하였다. 한신(韓信), 팽월(彭越) 등은 대군을 이끌고 추격하여 해하(垓下)에서 항우의 군대를 포위하였다. 이때 항우의 군사들을 사방에서 포위한 유방의 군사들은 장량의 계책에 따라 초나라의 노래06를 불렀다. 오랜 전쟁에 지쳐서 고향 생각에 사로잡힌 초나라 병사들은 도망가거나 한나라에 투항하였다. 병사를 잃은 항우는 패배를 거듭하다가 오강(烏江)에서 3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유방은 해하의 전투에서 항우를 대파하고 한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천하는 통일되었으나 각지에서 크고 작은 반란이 계속되었다. 한 고조 6(기원전 201)년 한신이 반란할 것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장군들은 한신의 토벌을 주장하였으나 진평은 한신과의 정면 대결은 승산이 없다고 건의하였다. 진평은 유방에게 “폐하가 남방의 운몽호(雲夢湖)를 순시한다고 속이고, 제후들과 진(陳) 땅에서 회동한다 하십시오. 그리고 한신이 오면 그를 사로잡으시면 됩니다”라고 하였다. 유방은 진평의 계책에 따라 초나라 서쪽 국경에 있는 진 땅에서 제후들을 불러 회동한다고 하였다. 유방은 한신이 오자 그를 사로잡았다. 유방은 한신을 사로잡는 데 공을 세운 진평에게 대대로 세습되는 포상을 내렸다. 하지만 진평은 이를 사양하고 자신을 천거한 위무지에게 공을 돌렸다. 덕분에 위무지도 포상을 받았다.
  한 고조 7년 유방은 흉노의 선우(單于) 묵돌(冒頓, 재위 기원전 209~기원전 174)07을 진압하러 갔다가 평성(平城)08에서 묵돌의 40만 병사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포위가 7일간이나 계속되자 한나라군의 식량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진평은 묵돌의 부인 연지(閼氏)에게 선물과 함께 “유방이 묵돌에게 미녀를 바치려 한다”는 말을 흘렸다. 이에 연지가 묵돌을 설득해 포위를 풀자 한 고조는 돌아갈 수 있었다. 진평의 계책으로 사지(死地)를 벗어난 유방은 곡역(曲逆) 지방을 지나는 길에 그곳의 땅이 넓고 더 풍족한 것을 보고 진평을 곡역 후(侯)에 봉하였다. 이후에도 진평은 호군중위로 대(代)나라 승상 진희(秦稀)의 난과 회남왕(淮南王) 경포(黥布)의 난에 종군(從軍)하며 계책을 내었다. 그때마다 진평의 봉읍(封邑)은 늘어났다.
 
 
한나라의 토대를 닦다
 
  한 고조 유방은 회남왕 경포의 반란을 진압하던 중에 입은 상처로 인하여 세상을 떠났다. 유방이 사망하고 여태후(呂太后)09의 아들 효혜(孝惠)가 황제가 되었으나 여태후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여태후는 유방의 측실 척희(戚熙)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그녀의 아들 여의(如意)도 독살하였다. 이처럼 여태후가 정권을 장악하고 전횡을 일삼았으나 진평은 이러한 그녀의 전횡에 동조하는 듯 처신하였다. 여태후는 그 보답으로 상국(相國) 조참(曹參)의 뒤를 이어 진평을 상국 좌승상에 임명하였다. 이것은 승상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자리다.
  여태후는 효혜가 세상을 떠나자 그 후궁의 아들 소제(少帝)를 황제로 세우고 자신은 태황태후가 되어 사실상 황제의 지위를 대신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유씨가 아닌 자를 지방의 왕으로 세우면 토벌하라”라는 한 고조 유방의 유언을 무시하고 여씨 일족을 각 지방의 제후왕으로 세웠다. 진평은 여태후 집권 기간 동안 정치에는 무관심한 듯 주색에 빠진 듯이 지내면서 때를 기다렸다. 기원전 180년 마침내 여태후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진평은 여태후가 사망하자 태위(太尉)10 주발(周勃)과 힘을 합하여 국정을 농단하던 여씨 일족을 제거하고 한 고조의 넷째 아들 문제(文帝, 기원전 180~기원전 157)를 황제에 추대하여 문경지치(文景之治)11의 기틀을 닦았다. 이때 진평은 주발을 우승상으로 추천하고 자신은 좌승상에 머물렀다. 얼마 후 주발이 승상에서 물러나자 진평이 홀로 승상을 지내다 기원전 178년에 세상을 떠났다. 진평이 세상을 떠나자 문제는 그에게 헌후(獻候)라는 시호를 내렸다.
  진평은 한 삼걸(漢三傑)에 해당하는 소하(蕭何)나 장량, 한신보다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다. 하지만 진평은 대세를 보는 탁월한 안목을 가졌으며 상황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기이한 계책으로 문제를 해결하였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진평의 유연한 계책은 매번 성공하였다. 이러한 그의 계책은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유방 사후 여씨의 난을 진압하여 한나라의 기틀을 회복하였다. 이렇듯 진평은 초한 전쟁 중에는 책략가로서 능력을 발휘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나라 건국 후에는 승상으로서 능력을 발휘하여 어진 재상으로도 이름을 남겼다.
 
 
 
참고문헌
『사기(史記)』
사마천, 『사기세가(史記世家)』, 정범진 외 옮김, 까치, 1996
반고, 『한서(漢書)』, 노돈기·이리충 편저, 김하나 옮김, 경기도: 팩컴북스, 2013년
오치규, 『1인자를 만든 2인자, 유방의 참모들』, 서울: 위즈덤하우스, 2015
 
 
 
 

01 부(負)는 부(婦) 자와 통용되는 글자이기 때문에 ‘장씨 성을 가진 여인’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02 반고, 『한서(漢書)』, 노돈기·이리충 편저, 김하나 옮김, (경기도: 팩컴북스, 2013), pp.291-292.
03 앞의 책, p.296.
04 같은 책, p.297.
05 사마천, 『사기』 「고조본기(高祖本紀)」, “乃夜出女子東門二千餘人.”
06 유방의 군사들이 초나라 군사들을 사방에서 포위하고 노래를 불렀다 하여 이것을 ‘사면초가(四面楚歌)’라 한다. 여기에서 유래한 ‘사면초가’는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어려운 처지를 뜻하는 용어로 쓰인다.
07 선우는 유목국가인 흉노족(匈奴族)의 최고 우두머리를 부르는 칭호. 진시황의 통일과 비슷한 무렵 묵돌 선우가   유목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고 진·한(秦漢) 제국과 맞먹는 세력을 가졌다.
08 현재의 산시성 대동 부근에 있는 평성(平城).
09 한 고조 유방의 정비(正妃)로 중국 역사상 3대 악녀로 꼽힌다. 고조 사후 효혜제와 소제 시절 15년간 정권을 장악하고 여씨 일족이 한나라를 통치하게 하였다.
10 당시 무관의 제일 높은 관직.
11 문제(文帝)와 그 아들 경제(景帝) 때는 순리에 따른 정치와 중농(重農) 정책, 그리고 세금을 줄이는 등의 노력으로 경제가 활성화되어 번영을 누렸다. 문제와 경제의 시기를 선정을 베풀어 민생의 안정을 이루었다 하여 ‘문경지치’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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