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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역사인물 : 송대화(宋大和)

송대화(宋大和)
 
 
연구원 조규제
 
 
 
상제께서 섣달 어느 날 공신을 대동하고 고부로 가시다가 행로에 “아는 벗이 있느냐”고 물으시니 그는 “운산리(雲山里)에 신 경수가 있나이다”고 아뢰었도다. 상제께서 공신의 인도로 경수의 집에 들르셔서 마루에 앉아 글을 써서 불사르고 공신에게 집에 다녀오게 하셨도다. 공신이 집에 가니 일진회의 간부 송 대화(宋大和)가 와 있도다. 공신은 대화를 치송하고 운산리에 되돌아오니 상제께서 “있더냐”고 물으시기에 그는 “예, 그가 있어서 치송하였나이다”고 대답하였도다. (행록 4장 46절)
 

  송대화(宋大和, 1858~1919)라는 인물은 행록 4장 46절에 한 번 나온다. 그 내용을 보면 상제님께서 운산리 신경수의 집에서 글을 써서 불사르고 문공신을 그의 집에 다녀오도록 하셨다. 문공신이 집에 가서 보니 일진회 간부 송대화가 와 있었다. 그래서 문공신은 송대화를 치송하고 돌아와서 상제님께 “그가 있어서 치송하였나이다”라고 하였다. 치송(治送)이란 짐을 챙겨서 떠나보내는 것을 말한다. 상제님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문공신을 보내서 그를 치송하게 하신 것일까? 공신을 보내서 송대화를 치송하게 한 이 구절의 의미를 짐작하기는 어렵다. 다만 송대화가 어떤 인물인가 알아보는 것으로 대강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송대화는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인물로 고부 사람 송두호(宋斗浩, 1829~1895)의 아들이다. 아버지인 송두호는 전라도 정읍군 고부면 주산리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서산(西山)이고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그는 주산마을에서 주변 30리 거리는 남의 땅을 밟지 않고 다닐 정도로 부자였다고 한다. 1894년 1월 고부 봉기 당시 사발통문에 서명한 20명 중 한 사람이다. 농민들이 송두호의 집에서 무장봉기를 결의하고 사발통문을 작성할 때 그의 두 아들, 송대화, 송주성(宋柱晟, 1863∼1924)도 함께 있었다.01
  사발통문을 작성할 당시 조선 사회는 오랫동안 행해진 세도정치의 폐해로 사회질서가 무너져 토호들의 횡포는 심해지고, 관리들의 기강은 해이해져 탐관오리들의 횡포가 극에 달했다. 고부 봉기가 발생할 당시 조선의 산업은 대부분 농업이었다. 그래서 농업의 중심지였던 호남지역의 농민들은 어느 지역보다 극심한 수탈을 겪어야 했다. 고부의 농민들도 토호와 관리들의 수탈 속에 힘겨운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1892년 5월에 조병갑이 고부 군수로 부임하였다. 새로 부임한 조병갑은 온갖 명목의 세미(稅米)를 거두어들였다. 무고한 백성들에게 죄명을 씌워 돈을 수탈하는가 하면, 부친의 송덕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돈을 강제 징수하였다. 또한, 그는 기존의 예동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읍천과 태인천이 만나는 곳에 새로운 보(洑)를 쌓았다. 그는 보를 쌓은 농부들의 임금을 착취하는가 하면 농민들과 한 약속을 어기고 수세(水稅)를 징수했다. 이에 농민들은 저마다 참았던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1893년 11월에 전봉준(全琫準)의 아버지 전창혁(全彰爀, 1827~1893)은 군수 조병갑(趙秉甲)에게 농민들의 고통을 호소하기 위해 고부 관아로 갔다가 장살(杖殺) 당하였다. 전창혁과 농민들은 만석보의 보세 감면을 호소하기 위하여 고부 관아로 달려갔으나 돌아온 것은 죽음뿐이었다.02
  전봉준은 아버지 전창혁이 장살 당한 후에도 조병갑에게 두 차례에 걸쳐 보세 감면에 대하여 진정하였으나 통하지 않았다. 농민들은 호소와 진정으로는 보세 감면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고부군 서부면 주산마을 송두호의 집에 전봉준, 송대화 등 20여 명의 농민이 모였다. 조병갑을 무력으로 응징하기로 한 것이다. 이들은 결의를 다지기 위해 사발통문을 작성하였다. 이때 사발통문에 서명한 20명 중에 송씨가 다섯 명이나 되었는데, 송두호는 그중 원로 격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이때 작성된 사발통문을 보면 전봉준으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송두호, 정종혁(鄭鐘赫), 송대화의 순으로 적혀 있다. 이것으로 고부 봉기 당시 송씨 부자의 역할을 짐작해보게 된다. 송두호는 당시 나이 예순일곱 살이나 되었기 때문에 큰아들 송대화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1894년 1월 10일 밤 배들 평야에 자리 잡은 이평면 하송리 예동 마을에 걸군(乞軍)03을 모으니 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사발통문에 서명한 사람들의 지도 아래 고부 관아로 쳐들어갔다.04 그러나 조병갑은 변장해서 도망가고 없었다. 관아로 몰려간 농민군들은 감옥을 부수고 억울한 죄인들을 풀어 주고, 군기고를 열어 총기를 챙겼다. 날이 새기를 기다려 말목장터로 나가 농민들을 모아 새로 쌓은 만석보를 허물고, 쌓아놓은 보세미 700여 석을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이 사건을 농민들이 고부 관아를 습격하였다 하여 고부 봉기라 한다.
 
▲ 사발통문
 

  이렇게 동학농민혁명은 시작되었다. 이때 참가한 농민들은 고부 관아를 나와 일단 해산하였다. 고부에서 농민들이 봉기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군수 조병갑에게 책임이 추궁되었다. 그리고 조병갑의 후임으로 익산 용안(龍安) 현감 박원명이 임명되었다. 새로 부임한 박원명은 농민들에게 ‘모든 것이 관의 잘못이니 돌아가서 기다리면 폐해(弊害)를 해결해 주겠다’고 하며 대책 없는 유화책으로 일관하였다. 전봉준과 농민들은 이 유화책을 믿고 일단 해산하였다. 그러나 안핵사(按覈使)05 이용태는 난민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약탈을 일삼았다. 게다가 사람들을 동학당으로 몰아 양민들의 돈을 수탈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물러나 사태를 관망하던 민심이 다시 들끓었다. 본격적인 혁명 준비를 마친 전봉준은 1894년 3월 무장투쟁을 다시 시작하였다.
  당시 송대화는 1894년 3월 봉기와 9월 봉기 때도 참여하였다. 그가 언제 접주(接主)06가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1894년 9월 봉기 때에는 대접주07로 승격되어 출전하였다. 그리고 그는 농민군 훈련대장을 맡아 전봉준과 생사를 같이했다. 하지만 일본군과 관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동학 농민군은 충남 공주 우금치에서 크게 참패해서 후퇴해야만 했다. 송대화는 원평, 태인 전투를 마지막으로 전봉준과 헤어진 것으로 보인다. 전봉준과 헤어진 송대화는 임피(臨陂)로 가서 이름을 장승팔로 바꾸고 고용살이를 하다가 주인집 딸과 혼인을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얼마 후 강원도로 넘어가서 훈장 노릇을 하다가 1904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후 흥덕(興德)08의 일진회 간부가 되었다.
 
 

  이상으로 송대화의 활동에 대하여 남아 있는 단편적인 기록들을 정리해 보았다. 사발통문과 단편적인 기록으로 본 송대화는 자신의 이익보다는 농민들의 이익을 위해 목숨을 다해 불의를 숙청하려 했던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송대화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대접주였으며, 일진회의 간부이기도 하였다.
  송대화의 방문은 일진회 또는 동학과 관련하여 문공신과 의논하기 위한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것은 문공신 또한 동학의 회원이었으며, 한때 일진회의 회장을 역임했기 때문이다.
  문공신은 이 사건 이후에 후천음양도수 조정공사, 정의도 공사, 물화상통 공사 등 상제님의 중요한 공사에 참여하게 된다.
  위의 두 가지 경우를 연관하여 추측해 보면, 상제님께서는 신경수의 집에 계시면서 글을 써서 불사르시고 문공신을 자신의 집으로 보내 송대화를 치송하게 한 것이 장차 문공신이 참여하게 될 공사를 위해 사적인 일을 정리할 수 있게 하신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문공신이 송대화와의 관계를 잘 정리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것으로 생각된다.
 
 
 

01 이이화, 『파랑새는 산을 넘고』 (경기: 김영사, 2008)
02 앞의 책.
03 호남지방의 농촌에는 대개 마을마다 농악이 있었다. 음력 정월이면 농악대가 이 농악을 치고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액막이한다. 그리고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곡식을 받는다. 그래서인지 예로부터 이를 걸군이라 부르며 이렇게 걷힌 쌀은 1년간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산제에 쓰인다.
04 최현식, 『갑오동학혁명사』 (전주: 신아출판사, 1994)
05 조선 후기 지방에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처리를 위해 파견한 임시 직책.
06 동학의 교단 조직인 접(接)의 책임자를 이르던 말.
07 접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복수의 접이 생김에 따라 그 상위 조직으로 포(包) 조직이 만들어졌는데, 포의 리더를 대접주(大接主)라고 불렀다.
08 전라북도 고창지역의 옛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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