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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 : 근대 서양의 인종주의

근대 서양의 인종주의
 
 
대순종교문화연구소 김태수
 
상제께서 어느 날 가라사대 “조선을 서양으로 넘기면 인종의 차별로 학대가 심하여 살아날 수가 없고 청국으로 넘겨도 그 민족이 우둔하여 뒷감당을 못할 것이라. 일본은 임진란 이후 도술신명 사이에 척이 맺혀 있으니 그들에게 맡겨 주어야 척이 풀릴지라. …. (공사 2장 4절)
 

  위의 『전경』 구절은 상제님께서 천지공사의 필요에 따라서 우리나라를 일본에 맡기시는 공사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결정을 하시는 과정에서 조선을 서양에 맡길 수 없는 이유로 인종차별에 따른 학대를 말씀하시고, 심지어 만약 조선을 서양에 맡기면 훗날 “살아날 수 없다”고 예견하셨다. 상제님께서 이렇게 심각하게 말씀하신 내용을 통해 당시 서양의 인종차별이 매우 큰 문제를 안고 있었으며, 조선뿐 아니라 동양인들에게 매우 위험하게 전개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근대 서양의 인종차별에 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이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상제님의 천지공사를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서양의 인종차별주의를 보통 ‘인종주의(racism)’01라고 한다. 인종주의는 일반적으로 의사(擬似) 과학적 분석 기준을 근거로 해서 여러 인종에 대해서 다양한 가치를 부여하고, 어떤 인종이 다른 인종에 비하여 우월하며 가치가 높다고 평가하거나 가치가 낮은 인종들을 높은 가치의 인종들에게 종속시키거나 차별화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말한다.02 이 이념을 가지고 서양인들은 타 국가와 민족을 식민지배하고 착취하는 폭력적 정책을 합리화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인종주의의 기원을 얘기할 때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를 들기도 하나, 그는 노예에 관하여 언급하기는 하였으나 인종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갖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고대 로마는 수많은 종족을 통합시켜야 했으므로 인종주의적 사고를 발전시키지 못하였다.03 즉 근대 서양의 인종주의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근대 서양의 인종주의와 유사한 요소를 지닌 인종의 차별은 중세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세의 인종차별적 요소는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에서 나타난다. 13세기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을 강제 이주시키면서 유대인 거주지역이 생겨났는데, 이것이 소위 ‘게토(ghetto)’04와 같은 형태의 시작이다. 14세기 페스트가 돌면서 유럽에서도 유대인들을 특정 지역에 격리시키는 일이 발생했다. 이후 15세기 말에 스페인에서 그곳에 살던 30만 유대인에 대해 추방하는 등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은 이후 역사의 흐름 속에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는 주로 종교적 이유로 기독교인인 유럽인들이 유대인을 박해한 것이나, 혈통과 관련한 인종에 대한 차별적 요소를 갖고 있었다.
  한편 중세 유럽인들에게 야만인(savage man) 개념이 형성되었는데, 이들은 나체로 생활하고, 얼굴이나 발 외에는 털이 많이 나 있고, 원숭이는 아니나 원숭이 같은 모습을 하며 커다란 채나 통나무를 들고 다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야만인의 이미지는 폭력, 성적 방종, 이성의 결여, 문명과 도덕성이 결여된 것으로 유럽의 문명인과 완전히 구별되는 문화적 특성을 갖는 것으로 생각되었다.05 이러한 야만인에 대한 이미지는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로 진출하여 만난 원주민들에게 덧씌워져 그들을 원숭이와 유사한 존재로 인식함으로써 이들에 대한 차별과 학살로 대응했는데, 이는 근대 인종주의와 맥을 같이 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인종주의는 15세기에 포르투칼이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흑인들을 납치하여 노예로 팔기 시작하면서 비롯되었다. 이후 스페인,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인들이 아시아 및 아메리카, 아프리카에 진출하며 아프리카 흑인들을 지속적으로 노예화함으로써 인종주의는 강화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북아메리카 원주민들도 노예화하고자 하였으나, 이들의 끊임없는 저항으로 성공하지 못하자 원주민들을 ‘저열한 야만인’으로 인식함과 동시에 척결의 대상으로 여겼다.
  이 시기의 유럽인들은 인간을 유럽인, 아프리카인, 아메리카인, 아시아인으로 나누어 우열을 논하는 인종주의적 도식을 만들었는데 이때 그들은 인종 사이의 차이는 극단적으로 크기 때문에 인간은 여러 다른 종으로 되어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른바 다인종설(polygenesis)로서 모든 인간이 아담과 이브의 자손이라는 기독교적 교의를 부정하기도 하였다.
  한편 18세기에는 신플라톤주의에서 유래한 ‘존재의 거대한 고리(a great chain of being)’의 도식이 유행하였는데, 이에 의하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신과 천사로부터 시작해서 백인 남자를 통해 백인 여자, 아시아인, 아프리카인, 원숭이, 그 외의 모든 동물, 식물, 광물로 차례로 내려간다.06 이렇게 존재들의 서열을 정함으로써 인종의 차별을 구체화시키게 되었고, 차별을 정당화하게 되었다.
  이후 많은 학자가 나름의 과학적 방법으로 생물의 종을 구분하고 서열을 정하는 인종주의적 연구 결과들을 발표하였는데, 로크를 포함한 18세기의 계몽주의 학자들을 포함하여 흄, 칸트, 헤겔 등 많은 철학자도 인종주의적 견해를 피력하였다. 특히 18세기 후반에 독일인 블루맨바흐(J. F. Blumenbach, 1752~1840)는 여러 해부학적 자료와 생활양식 등 환경적 요인들을 분석하여 인종에 대한 퇴화이론을 성립시켰는데, 그의 이론은 19세기 중반까지 인종주의 사고의 중심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백인인 코카서스 인종이 최초의 인종이고, 이 인종이 퇴화된 것이 몽골인종, 에티오피아 인종이다.
  19세기의 인종주의 이론들은 18세기에 축적된 여러 이론을 근거로 하여 해부학, 생물학, 언어학 등 여러 분야에서 전개되었다. 18세기의 인종이론들은 인종의 형태적 특성, 환경적 조건 등 다양한 요소들을 준거틀로 삼아서 인종 간의 차이를 추론하고 계층화된 인종모델을 제시함으로써 인종주의가 형성되는 데 필요한 생물학적 기반을 제공하였다.07 이러한 18세기의 성과들을 집대성하여 19세기에 그 기반을 마련한 인종이론의 대표적인 사람은 인류학자 고비노(Joseph Arthur de Gobineau, 1811~1882)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인종불평등론(Essai sur I’inegalite des races humaines)』에서 유전되는 신체적 특징과 성격, 지능, 문화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사상을 펼쳤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백인종은 다른 모든 인종보다 우수하며, 백인종 가운데서도 최고의 문명을 이룩한 아리안(Aryan) 인종이 가장 우수하다는 것이다. 순수한 민족만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고, 그들에게서 문화의 퇴폐, 몰락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민족으로 아리안족, 특히 게르만족을 들었다.08 이러한 이론을 전개하면서 그는 언어학적 이론을 활용하였다. 고비노가 관심을 가진 어족은 당시에 새로 발견된 인도-유럽 어족인데, 이것은 북인도, 이란 및 거의 전체의 유럽 언어를 포함한다. 고비노는 당시의 통상적인 견해를 받아들여 가장 순수한 인도-유럽인은 고대 인도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를 쓴 사람들과 순수한 게르만어를 쓰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앞의 사람들은 인도 남쪽의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타락했으며 게르만족만이 추운 북쪽에 남아서 순수성을 보존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아름다움, 신체적인 힘, 지적인 능력에서 다른 인종들을 훨씬 능가하는 게르만족이 다른 인종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09 이러한 고비노의 주장은 19세기 유럽 인종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고비노의 이론들을 가장 철저히 계승한 사람은 영국 태생의 정치철학자 체임벌린(Houston Stewart Chamberlain, 1855~1927)이었다. 그는 유럽 문화에 있어 아리아인의 인종적, 문화적 우월성을 주장하여 범게르만주의에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독일인이 가장 고귀한 천품을 타고났다고 주장하여 이후 나치 정권의 국가사회주의 이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10
  19세기 중반부터 서양의 인종주의는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과 강하게 결합된 형태로 전개된다. 사회진화론은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사회에 적용한 것으로서, 그 대표적인 학자는 영국의 스펜서(Herbert Spenser, 1820~1903)이다. 그에 의하면 변화는 유기체에서와 같이 사회에도 이질성과 복잡성을 증대시키며 진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런 구조가 복잡한 사회에서는 사회계급이 분화하며 사회 안의 상호의존성이 증대하여 사회는 진보적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 긴 과정에 적응하지 못하는 개인이나 가족, 인종은 진화과정에서 사멸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개인적인 생존투쟁, 계급적인 생존투쟁, 인종적, 문명적 수준에서의 생존투쟁이 모두 이에 의해 합리화될 수 있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사회적 다위니즘이 인종주의 이론의 기반으로 유럽에서 광범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그것이 자연과학의 외피를 둘러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학이 맹목적으로 존숭되고 있던 19세기 후반의 분위기에서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것은 이 시기 유럽 국가들의 제국주의 정책과도 관계가 있다. 특히 이 시기 유럽 국가들이 전 세계를 식민지화하던 시기였으므로 사회적 다위니즘은 이것을 정당화하기에 아주 좋은 무기가 되었다. 이에 의하면 사회적 성취의 대부분은 유전에 의한 것이므로 유전적으로 우월한 유럽인이 열등한 식민지인을 지배하는 것은 자연법칙에 합당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유럽의 식민정책과 경제적 착취가 합리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11
  한편 사회진화론의 한 부류로서 우생학을 들 수 있는데, 이를 창시한 사람은 프란시스 갈톤(Francis Galton, 1822~1911)이다. 그는 인종의 다양함 속에서 육체적, 정신적, 도덕적으로 우수한 요소는 반드시 유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인간혈통은 가축이 개량되는 것처럼 인위적인 선택에 의하여 개선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12 즉 인간의 정신적 능력도 육체적 특성과 같이 유전적이고, 인간의 사회적 조치를 통하여 의식적으로 유전적 인자들의 자연도태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이것을 통하여 유전적 인자를 개선시킬 수 있고 인간의 진화를 촉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13 이러한 갈톤의 기본사고는 많은 우생학자에게 수용되어 계속 발전되었다. 우생학자들은 인종이 변종되는 것을 막고 인구의 유전적 인자를 개량하는 것을 중심적인 과제로 설정하고 그것을 위한 사회정책적 조치를 주장하였다.14
  이러한 인종주의는 비서양인들에게 광범하게 적용되어, 나치 정권의 홀로코스트, 스페인이나 영국인들이 아메리카에서 저지른 원주민 학살, 영국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학살, 독일의 나미비아 원주민 학살, 벨기에의 콩고 원주민 학살 등 많은 비인간적 사건들을 일으켰다. 특히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서양인들이 19세기 초반에 이미 거의 말살하여 인디언보호구역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게 하였다.
  이렇게 서양 근대의 인종주의는 여러 민족에 대해서 서열을 정하고 가장 높은 위치에 백인인 자신들을 위치시킴으로써 그들이 저열하다고 생각하는 타민족을 착취하고 학대하며 심지어 특정 민족을 말살하려는 시도까지도 정당화하려고 하였다. 서양인들의 이러한 행태를 볼 때 상제님께서 ‘살아날 수 없다’고 하신 뜻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01 인종주의를 처음으로 정의한 인물은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1887~1948)인데, 그녀는 인종주의를 ‘한 종족 집단이 선천적으로 열등하게 운명지어져 있고 다른 종족은 우월하게 되어 있다는 도그마’라고 하였다. (Ruth Benedict, 『Race and Racism』 (1943), p.97; 강철구, 「서양문명과 인종주의」, 『서양사론』 70집 (한국서양사학회, 2001), p.10 재인용.)
02 전복희, 『사회진화론과 국가사상』, (서울: 한울, 1996), p.30.
03 강철구, 앞의 글, p.13.
04 유대인 게토는 1515년 베네치아인들이 게토 누보에 유대인들을 격리시키면서 형성되었는데, 이후로 유럽의 여러 곳에 이와 같은 격리지역이 만들어졌다. 이는 유대인들에 대해 기독교사회를 오염시키는 악(惡)으로 인식하는 편견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곳은 주거환경이 좋지 않음으로 인해서 위생상태가 악화되었으며, 이 때문에 슬럼으로 인식되었다. 18세기 말 나폴레옹에 의해 대부분의 게토는 폐쇄되었다. (이호상·남영우·김영호, 「중세 베네치아 유태인 게토의 기원과 형성」, 『한국도시지리학회지 13권』 1호 (한국도시지리학회, 2010), p.109.)
05 강철구, 앞의 글, p.16.
06 강철구, 앞의 글, p.20.
07 박성진, 『사회진화론과 식민지사회사상』, (서울: 선인, 2003), p.97.
08 신응철, 「인종주의와 문화-고비노 읽기, 칸트와 니체 사이에서」, 『니체연구』 제8집 (2005), p.123.
09 Tzvetan Todorov (trans. by C. Porter), 『On Human Diversity』 (Cambridge: Harvard Univ. Press, 1993), p.130. (강철구, 앞의 글, p.23. 재인용)
10 독일의 국가사회주의에 고비노의 이론이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 일반적 견해이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신응철, 앞의 글, pp.124-127 참조.)
11 강철구, 앞의 글, p.28.
12 George A. Miller, 『Francis Galton, Anthropologist, Psychology』 (Pelican Books in the U.S.A, 1966), p.156. (박성진, 앞의 책, p.101. 재인용.)
13 전복희, 앞의 책, p.39.
14 전복희, 앞의 책,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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