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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7년(2017)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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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 : 이마두가 서양에 건너가 과학문명을 열었다?

이마두가 서양에 건너가 과학문명을 열었다?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차선근

 
 
 
  서양인 이마두가 동양에 와서 지상 천국을 세우려 하였으되 오랫동안 뿌리를 박은 유교의 폐습으로 쉽사리 개혁할 수 없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도다. 다만 천상과 지하의 경계를 개방하여 제각기의 지역을 굳게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하던 신명을 서로 왕래케 하고 그가 사후에 동양의 문명신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운(文運)을 열었느니라. 이로부터 지하신은 천상의 모든 묘법을 본받아 인세에 그것을 베풀었노라. 서양의 모든 문물은 천국의 모형을 본뜬 것이라. 그 문명은 물질에 치우쳐서 도리어 인류의 교만을 조장하고 마침내 천리를 흔들고 자연을 정복하려는 데서 모든 죄악을 끊임없이 저질러 신도(神道)의 권위를 떨어뜨렸으므로 천도와 인사의 상도가 어겨지고 삼계가 혼란하여 도의 근원이 끊어지게 되니 원시의 모든 신성과 불과 보살이 회집하여 인류와 신명계의 이 겁액을 구천에 하소연하므로 내가 서양 대법국 천계탑에 내려와 천하를 대순하다가 이 동토에 그쳐 모악산 금산사 삼층전 미륵금불에 이르러 三十년을 지내다가 최제우에게 제세대도(濟世大道)를 계시하였으되 제우가 능히 유교의 전헌을 넘어 대도의 참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갑자년에 드디어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 신미년에 강세하였노라. (교운 1장 9절)
 
  교운 1장 9절은 상제님께서 이 세상에 탄강하시게 된 직접적인 이유를 설명하신 것으로 그 중요도가 높다. 이 가운데 이마두(利瑪竇), 즉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였던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에 대한 상제님의 말씀에 주목해보자. 그 내용은 마테오 리치가 중국 명나라에 와서 천주교를 전파했고, 사후에는 동양의 문명신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건너가 문운(文運)을 열었으며, 그로부터 천국의 모형을 본뜬 많은 문물(文物)이 나오게 되었고, 그 문물은 물질에 치우쳤다는 것으로 정리된다.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테오 리치와 같은 서양 선교사들이 동양에서 포교할 때, 그들은 서양으로부터 갖고 온 과학기술문명 이를테면 천문역법이나 자명종, 해시계, 세계지도 등과 같은 발전된 문물을 전략적으로 활용하였다. 서양은 동양이 인정할 정도의 뛰어난 과학 문명을 이미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또한, 앞으로도 지속적인 과학의 발전 역시 충분히 예측되는 일이었다. 그러한데도, 왜 상제님께서는 마테오 리치가 동양의 문명신을 데리고 서양에 건너가 과학 문명을 열었다고 말씀하셨던 것인가?”
 
  그러니까 서양에는 괄목할만한 수준의 과학 문명이 이미 있었고, 마테오 리치는 그것을 동양에 와서 전해주었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기 때문에, 상제님께서 마테오 리치가 동양의 문명신들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건너가 서양 과학 문명을 열었다고 하신 말씀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실 이 질문은 서양이 미개한 동양을 계몽한 것이 주지의 사실인데, 왜 동양이 서양의 과학 문명을 열었다고 말하는가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시각을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고 한다.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인은 발전된 문명을 지닌 우월한 사람들이고 동양인은 낙후되고 야만적인 미개인들이니, 동양은 동양의 전통과 가치를 버리고 무조건 서양의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는 시각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는 것은 동양을 문명화시켜주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며, 심지어 서양인들은 비서양인들을 문명화시켜주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라고까지 본다.01 지난 200년 동안 오리엔탈리즘의 영향력이 너무나도 막강했던 탓에 동양인들도 자신을 스스로 열등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오리엔탈리즘에 빠진 동양인들은 서양을 절대시·신성시하면서 그들을 따라가려고 노력한다. 게다가 자신보다 경제적으로 불우한 또 다른 제3세계의 민족이나 국가를 열등하다고 여기고 그들을 서구식으로 ‘문명화’시켜야 한다고 믿기까지 한다. 해원상생을 추구하는 수도인의 입장에서 보면 상대에 대한 멸시를 일삼는 이런 사관은 폐기처분이 되어야 마땅하다.
  이런 항변에도 불구하고, 마테오 리치와 그를 포함한 당시 선교사들이 선교에 활용하기 위해 동양에 전한 과학서적만 해도 천문학, 수학, 지리학, 물리학, 기상학, 생리학 등의 분야를 망라해 도합 98종 371권을 넘어서는 게 사실이다.02 이렇게 보면, 오리엔탈리즘과는 별개로 마테오 리치 시대의 서양은 동양이 인정하는 수준의 발달한 과학 문명을 이미 갖고 있었다고 고백해야 할지도 모른다.
 
 

마테오 리치 시절의 서양에는 오늘날과 같은 근대적 개념의 과학이 없었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마테오 리치 등이 가져온 서구 과학 문명은 오늘날과 같은 개념의 근대적 과학이 아니었다고 한다.03 마테오 리치 시대의 서양이 갖고 있었던 지식은 이른바 ‘스콜라주의(Scholasticism)’라는 것에 기반을 두는 것이었다. ‘스콜라’란 유럽 중세시대에 신학과 철학을 가르치던 기독교의 수도원 학교를 말하고, 그 학교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스콜라주의’는 중세시대 서양을 지배했던 거대한 사상 경향이었다.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자연이나 인간 이성에 대한 연구 목적을 기독교의 ‘하나님’ 신앙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데 둔다는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관찰하여 얻은 지식을 기독교 신앙을 위해 이용하는 것은 종교에 종속된 과학을 의미하기 때문에, 오늘날 말하는 근대 과학 개념과는 엄연히 다르다. 마테오 리치 등 선교사들이 서양의 자연철학을 동양에 전하기는 하였지만, 그 지식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시키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마테오 리치 시대의 서양에는 근대적인 과학자들이 존재하지 않았고 심지어 ‘과학자’라는 용어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마테오 리치가 선교를 위해 동양으로 갖고 온 ‘과학 문명’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적 의미의 ‘과학 문명’은 아닌 셈이다.
  마테오 리치가 동양에 전한 과학은 기독교라는 특정한 단 하나의 종교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종속되어 있어야만 하는 ‘지식체계 모둠’이었다. 어떤 천재가 나타나서 획기적인 발견이나 발명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기독교라고 하는 한 종교의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면 용납받기 어려웠다. 이런 이유로 해서 서양에서 지속적인 지식의 축적과 발전을 통한 문명의 성장은 장담할 수 없었다고 해야 한다. 마테오 리치 시대의 서양 과학 문명이란 근대적 개념의 과학이 아니라 이러한 맥락에 있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서양에서 과학기술문명은 17세기 이후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대체로 과학사(科學史)는 신의 존재를 입증하고 그 신앙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중세의 기독교적 ‘과학’을 넘어선 시기, 즉 오늘날의 근대 과학 개념이 확립된 때를 1687년 뉴턴(1642~1727)의 고전역학 완성 이후로 본다. 이때는 마테오 리치가 죽은 지 70여 년이 지난 해이다(진묵이 죽임을 당하고 서양으로 동양의 도통신을 거느리고 건너간04 1633년으로부터는 50여 년이 지난 해이다). 근대 화학의 새로운 문을 연 보일(1627∼1691), 빛의 파동설을 제창함으로써 전자파 통신의 이론적 기초를 쌓은 호이겐스(1629∼1695), 기계공학과 고체물리학의 토대를 놓은 로버트 훅(1635∼1703), 현대문명을 가능케 한 전자공학의 기반을 조성한 쿨롱(1736~1806) 등 근대과학자들이 등장하고 근대 과학의 초석이 다져졌던 것도 모두 그 이후에 벌어졌던 일들이다.05 결국, 마테오 리치가 죽은 후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서양에 근대적 수준의 과학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아울러 그로부터 촉발된 증기기관의 발명과 1760년의 영국 산업혁명은 인류 문명의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 지적해야 하는 것은 마테오 리치 이후에 서양으로 건너간 일련의 동양 사상체계들이, 기독교 세계관에 물들어있던 서양에 근대적 과학 문명의 발아와 전개를 가능하게 했던 이론적 기반들을 만들어주었다는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고대의 바퀴부터 나침반, 화약, 종이에 이르기까지 문명의 기반을 다지는 발명품들은 죄다 동양에서 나왔다. 180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도자기와 직물·비단 등의 첨단 최고급 기술은 동양이 보유하고 있었고, 세계 경제와 무역, 인구의 2/3 이상도 동양에 집중되어 있었다. 대항해시대 이후 동서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동양의 뛰어난 문물이 서양으로 전파되는 것은 충분히 예견되는 일이었다. 세계적인 과학자이면서 역사학자이기도 한 조지프 니덤(1900∼1995)은 서양의 근대 과학기술과 지식의 성취들이 동양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결과임을 고백하고 있으며, J. J. 클라크는 서양이 동양으로부터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고 동양사상은 별 볼 일 없는 것이라는 서양 중심주의가 팽배하지만, 실은 르네상스 이후 서양은 동양으로부터 막대한 영향을 받은 게 사실이라고 실토한다. 다만 동양이 서양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즉각 알려졌지만, 그 역으로 서양이 동양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감추어져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06
  실제로 서양 근대철학을 출범시킨 데카르트(1596∼1650), 동양철학이 서양철학보다 더 우수했음을 논증한 아이작 보시우스(1618∼1689), 그로부터 영향을 받아 민주주의 철학을 체계화시키고 세계는 신 또는 자연이라고 하는 하나의 실체라는 일원론을 주장함으로써 근대 과학으로 가는 다리를 놓았다고 평가받는 스피노자(1632∼1677), 독일 계몽철학을 열고 특히 이진법의 도입으로 컴퓨터 이론의 기초를 닦은 라이프니츠(1646∼1716), 프랑스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볼테르(1694∼1778), 정치학과 경제학을 개척한 애덤 스미스(1723∼1790), 절대적 관념론의 거장 헤겔(1770∼1831) 등을 포함하여, 마테오 리치 사후에 등장했던 근대의 거의 모든 서양 사상가들이 동양사상에 매료되었고 그것에 큰 빚을 지고 있음이 조명되고 있다.07 이들이 이론적 토양을 풍성하게 만들어주지 않았다면, 근대 과학의 탄생과 성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양의 문명신들이 마테오 리치와 함께 서양으로 건너가 서양의 근대 과학 문명을 열었다는 사실은 신명계의 일이니 직접적인 증거는 확인할 수 없지만, 실제 서양의 과학사가 동양으로부터 막대한 영향을 받아 근대 문명을 열었음을 실토하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정황 증거는 확인할 수 있다고 하겠다.
 
▲ 이마두의 묘지. 중국 북경의 ‘중공북경시위당교(中共北京市委黨校)’ 안에 있다
 

  그러나 동양이 ‘우리’라고 하는 ‘전체’를 중시해왔던 반면, 서양은 오래전부터 특정한 한 개인만 귀하게 여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남으로 인식하고 소외시키는(이것을 타자화[他者化]라고 한다) 토양을 갖고 있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경향은 플라톤(기원전 427~기원전 347)이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실재인 ‘이데아(Idea)’를 제시하면서 현실 세계(감각 세계)는 거짓이고 이데아 세계는 참이라고 주장하고, 영혼이 천상에서 추락해 육체라고 하는 감옥에 갇혀있다는 이원론을 강조함으로써 주체와 객체를 분리한 데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뿌리 깊은 것이었다. 그 이후 전개된 모든 서양철학이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불과하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플라톤의 영향력이 막강하였던 탓에,08 서양은 주체와 객체, 나와 너를 분리시키는 이원화 및 타자화의 길을 심화시켜왔다. 원래부터 갖고 있었던 그러한 토양으로 인해서, 동양으로부터 새로운 문명의 씨앗이 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서양에서 발아된 문명은 이웃이나 타 국가를 배타적인 남이라는 이유로 사이좋게 같이 삶을 공유할 대상으로 상정하지 않았고, 심지어 자연마저도 물질적인 것으로 취급하여 정복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그 결과 지구에 존재하는 민족들과 국가들의 평화로운 공존은 부정되었고,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지배·억압·수탈하는 제국주의가 강조되었으며, 자연과 인간의 합일이나 자연을 살아있는 생명으로 보는 자연 존중 정신 역시 척결되었다. 이것을 바탕으로 서양 문명은 인간으로 하여금 물질적 재화의 풍요를 추구하는 욕구 충족적인 삶에 치중하도록 강요했으니, 이게 바로 세속적 물질주의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세련된 근대 과학 문명’으로 정당화되었다.09 거칠게 말해서 서양 문명은 정신과 물질의 단절, 자연과 인간의 단절을 강조하기 때문에, 물질적으로는 풍요롭다고 하더라도 인간 정신을 소외시키고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위험성을 가진다는 말이다.
  다시 교운 1장 9절로 되돌아가 보자. 상제님께서는 마테오 리치 사후 동양의 문명신들이 서양으로 건너가 물질에 치우친 문명을 열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17세기 이후 서양에 근대적 개념의 과학기술문명이 열렸다는 사실, 그리고 그 문명은 동양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으며 정신적인 가치보다 형이하학적인 물질에 더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진실들은 요즘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인데, 하물며 세계사 정보와 각국의 동향에 무지했던 20세기 초반의 한국에서 그러한 지구 전체의 역사와 문명을 통찰해 낸다는 것은 보통 평범한 인간의 수준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여기에서 증산이라는 분이 단순히 한 인간이 아니라 과연 상제님이시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새삼 깨닫게 된다.
 
 
 
 

01 조현범, 「선교사와 오리엔탈리즘」 , 『종교문화비평』  7 (2005), pp.185-191.
02 자세한 서적 목록은 주겸지, 『중국이 만든 유럽의 근대』, 전홍석 옮김 (파주: 청계출판사, 2010), pp.105-111 참조.
03 조현범, 「조선 후기 유학자들의 서학 인식: 종교/과학 구분론에 대한 재검토」, 『한국사상사학』 50 (2015), pp.103-116 참조.
04 “진묵이 천상에 올라가서 온갖 묘법을 배워 내려 인세에 그것을 베풀고자 하였으나 김봉곡에게 참혹히 죽은 후에 원(冤)을 품고 동양의 도통신(道通神)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화 계발에 역사하였나니라.” (권지 2장 37절).
05 교무부,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이마두와 진묵의 사후 서양 문명의 발전과 그 폐해」, 《대순회보》 67호 (2007), pp.32-33.
06 J. J. 클라크, 『동양은 어떻게 서양을 계몽했는가』, 장세룡 옮김 (서울: 우물이 있는 집, 2004), p.14, pp.34-35.
07 자세한 내용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라이프니츠가 만난 중국』, 이동희 편역 (서울: 이학사, 2003), pp.169-206; J. J. 클라크, 앞의 책, pp.68-83; 주겸지, 앞의 책, pp.203-396; 황태연·김종록, 『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 (파주: 김영사, 2015), pp.82-280 참조.
08 로버트 멜러트, 『화이트헤드의 철학과 신학: 과정신학이란 무엇인가』, 김상일 옮김 (서울: 지식산업사, 1989), p.8.
09 장석만, 『개항기 한국사회의 “종교” 개념 형성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pp.8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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