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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의 만남 : 장자의 소통철학

장자의 소통철학
 
 
연구원 조광희
 
 
 
들어가는 말
  장자(莊子)를 생각하면 어떠한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일반적으로 널리 회자(膾炙)되는 장자라는 인물은 노자와 함께 노장(老莊) 혹은 도가(道 家)를 대표하는 사상가로 잘 알려져 있다. 장자는 내면의 수양을 통한 자연과의 합일을 중요시했다. 그런 영향으로 무위자연(無爲自然), 허무주의 혹은 신선(神仙)과 같은 말들이 장자를 수식하는가 하면, 자연 속에 숨어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탈 세속적인 은둔자의 이미지가 연상되기도 한다. 하지만 장자는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현실의 여러 문제를 놓고 치열하게 숙고한 제자백가(諸子百家) 중 한 명이었다.
 
 
장자가 말하고자 한 소통
  제자백가가 살았던 전국시대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다툼의 시대였다. 제자백가란 이러한 현실에서 저마다의 해결책을 주장한 사상가 집단 전체를 아우르는 말이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장자 역시 나름대로 방법을 제시했다. 정교하게 잘 다듬은 이론체계를 제공하기보다는 해학과 풍자가 가득한 우화(寓話)를 들려줌으로써 암울한 시대를 통찰하고자 했다.
  장자가 통찰한 것은 무엇이었고, 그가 말하고자 한 바는 무엇이었을까? 엄밀히 말해서 장자가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주려고 한 적은 없다. 무엇을 가르쳐 주기보다는 우리의 머릿속에 박힌 고정관념과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만들어낸 가식과 욕망에 근거한 이기심을 스스로 발견해서 없애도록 도와주고자 했다. 비유하자면 장자는 우리의 얼굴을 직접 씻겨주고 단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못난 모습을 외면할 수 없게끔 눈앞에 거울을 들어 주고 있었던 셈이다.01
  가식과 욕망의 상자에 갇힌 우리에게 장자는 무슨 까닭으로 도와주려 했던 것일까? 장자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소통할 때 천지 만물이 조화를 이루고 전쟁으로 얼룩진 혼탁한 시대에 평화가 찾아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통에 장애가 되는 요소를 발견하고 그것을 극복할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소통(疏通)이란 ‘막힌 것을 터버린다’는 소(疎)의 개념과 사람 간에 연결을 뜻하는 통(通)이란 개념의 합성어다. 진정한 소통은 단순한 의사전달을 넘어서서 존중과 이해를 기반으로 한 상호작용의 관점에서 실현될 수 있다.
        
소통의 시작은 차이점을 인식할 때
  이러한 측면에서 장자가 말하고자 한 소통은 크게 3단계로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나와 상대방의 소통을 방해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하지만 혼자서는 알기 힘든 문제다. 상대방과의 만남, 타자와 조우할 때 비로소 문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타자와의 끊임없는 부딪힘 속에서 내가 가졌던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용기를 내서 타자와 만나야 한다.
 
송나라 사람이 ‘장보’라는 모자를 밑천 삼아 월(越)나라로 장사를 갔다.
그런데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문신을 하고 있어서
그런 모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02
 
  송나라 상인이 가졌던 선입견은 월나라 사람 역시 누구나 모자가 필요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 실제로 경험한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이 상인은 예상치 못한 타자를 만난 것이다. 송나라 상인이 무엇을 잘못한 것은 아니다. 단지 월나라에 한번도 가지 못해서 그곳 사람들의 의복 양식을 몰랐다는 것과 누구나 모자가 필요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우리가 송나라 상인이라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대개 송나라에 돌아가거나 월나라에 그대로 남는 것,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이다. 무엇을 선택해야 현명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두 가지 중 어떤 하나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송나라와 월나라의 문화가 다르다는 것을 먼저 인식하는 데 있다. 이것을 알지 못한 채 고국으로 돌아가거나 그저 월나라에 머무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타자와의 낯선 경험 속에서 어떠한 점을 배우고 느꼈는지가 중요하다. 바로 나와 타자 간에 차이가 존재함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발견이야말로 상호 간에 소통을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이 된다. 소통의 첫걸음은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할 때 비로소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
  타자와의 차이를 인지한 후에는 그들에게 맞는 적절한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두 번째 단계에서는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해보는 배려의 소통을 실천해야 한다. 장자는 새를 죽인 노나라 임금의 우화를 통해 좋은 의도일지라도 타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처신은 소통에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공자가 말했습니다. “너는 들어보지 못했느냐?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구소(九韶)의 음악을 연주해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했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 하고 슬퍼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죽어 버리고 말았다.”
03
 
  이 우화에서 노나라 임금이 소통에 실패한 원인은 새를 새로서 대하지 않고 사람을 대하는 방법으로 처신했기 때문이다. 올바른 방법은 인간과 새의 차이를 인정하고 인간의 잣대로 새를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새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이다. 새가 살던 곳에 살게 하고, 호숫가에 노닐게 하며, 미꾸라지와 송사리를 잡아먹게 하고, 같은 새들과 줄지어 날아가 내려앉고 멋대로 유유히 지내게 놓아주는 것이 새를 새답게 하는 방법이다.04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소통이란 역지사지의 자세를 실천하는 것이다.
 
 
자신의 변화를 통한 소통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자신의 변화를 통한 소통이다. 방법을 알고 행동으로 옮긴다 할지라도 진정성이 없으면 형식적인 행동에 불과하다. 진정성이란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참된 마음이다. 이는 결국 나의 내면에 있는 주체성의 변화를 뜻한다. 주체성이란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어떤 실천에 있어 나타나는 자유롭고 자주적인 능동성을 말한다. 이러한 주체가 타자로서의 객체와 만날 때 어떠한 방향으로든 자주성과 능동성은 일정 부분 제약을 받게 되고 성격의 변화 또한 불가피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처럼 ‘나’라는 주체 역시 타자와의 관계 맺음을 피할 길은 없다. 타자에 적응해 어울려 살 수밖에 없는 나는 그들의 규칙을 일부분 수용해야 하며, 그동안 ‘나’라는 주체를 형성해 왔던 삶의 규범, 시스템, 문화 등은 깨어지고 변형되게 마련이다.
 
공자가 여량이라는 곳을 유람하는데, 그곳의 폭포수가 삼십 길이나 되었다. 그런데 한 사나이가 그런 험한 곳에서 자유롭게 수영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공자가 그에게 물어 보았다.
  “물을 건너는 데 그대는 어떤 특별한 방법이 있는가?”
  그 사나이가 대답하였다.
  “물이 소용돌이쳐서 빨아들이면 저도 같이 들어가고, 물이 나를 물속에서 밀어내면 저도 같이 그 물길을 따라 나옵니다. 물의 길을 따라서 그것을 사사롭게 여기지 않습니다.”05   
 
 

  물과 하나가 된 사나이 이야기에서 ‘변화된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사나이는 물의 흐름을 거부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몸을 맡겼다. 자신의 수영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물의 다양하고 변덕스러운 규칙들을 긍정하고 받아들였다. 우리가 낯선 곳에서 타자를 만날 때 그들의 규범과 문화를 수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자칫 이 부분에서 ‘타자를 수용하는 나의 주체성에 훼손되는 것은 아닌지’ 혹은 ‘나라는 주체를 지우고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오해는 ‘물의 길[水之道]’이라는 말을 설명함으로써 풀 수 있다.
  먼저 ‘물의 길’이라는 표현에는 두 가지 오해가 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물의 흐름이나 방향이 마치 처음부터 정해진 원칙이 있어서 수영할 수 있는 객관적인 물의 길이 사전에 내재해 있다는 식으로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수영을 익히는 과정은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닌데, 내가 터득한 방식만이 진리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물의 성질은 바다, 계곡, 수영장 등 장소마다 날씨에 따라 달라지며, 그에 따라 수영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심지어 체형에 따라서도 수영법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그러므로 ‘물의 길’은 물이 흘러가는 길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수영하는 방법만을 뜻하지도 않는다. 진정한 ‘물의 길’은 내가 물과 더불어 소통해서 생기는 길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물과 나의 소통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물의 길은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 물과 훌륭하게 소통한 뒤에만 드러날 수 있는 것, 또 수영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후 말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일반적인 물의 길, 일반화된 수영방법이 있을 수 있겠지만 매 순간 새로운 곳에서 만나는 물의 흐름은 조금씩 미묘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고 수영법을 완벽하게 익혔다 할지라도 매번 새로운 조수에 적응해야 한다. 사나이가 말한 물의 길이란 그와 물이 만나서 소통한 후 새롭게 생성된 길이다. 그러므로 사나이는 “물의 길을 사사롭게 여기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이다.06
 
 
나가는 말    
  지금까지 말한 장자의 소통철학을 요약하자면 1단계인 나와 타자 간의 차이 인식과 2단계인 역지사지의 자세는 아직 주체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다. 궁극적으로 소통과정에서 주체와 객체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주체가 이전과는 다른 주체로 변화되는 것이 소통의 최종목표라는 것이다. 이는 3단계에서 설명한 ‘물과 사나이가 만든 소통의 길’로 설명된다. 다시 말해 어떤 주체가 타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에게 맞게 자신의 주체 형식을 부단히 재조정해서 변형시킨 것 자체가 바로 장자가 말한 소통의 길[道]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참고 문헌
장자, 『장자』, 오강남 역, 서울: 현암사, 2012.
강신주,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 경기도: 오월의 봄, 2014.
 
 
 

01 장자, 『장자』, 오강남 옮김 (서울: 현암사, 2012), pp.22-23 참조.
02 강신주,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 (경기: 오월의 봄, 2014), p.370 참조.
03 앞의 책, p.373 참조. 且女獨不聞邪? 昔者海鳥止於魯郊, 魯侯御而觴之于廟, 奏九韶以爲樂, 具太牢以爲膳. 鳥乃眩視憂悲, 不敢食一臠, 不敢飮一杯, 三日而死.
04 장자, 앞의 책 p.373 참조.
05 앞의 책, p.515 참조.
06 앞의 책, pp.514-51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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