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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7년(2017)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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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지명 답사기 : 밀양 종남산 영성정(靈聖亭)

밀양 종남산 영성정(靈聖亭)
 
 

종단역사연구팀

 
갑자년 여름에 도주께서 배 문걸을 데리고
밀양 종남산 영성정(靈聖亭)에 이르시어
폐백도수(幣帛度數)를 밤 열 시부터
다음 날 아침 여섯 시까지 다섯 달 계속하시고
다시 함안 반구정으로 옮겨 마치셨도다.
(교운 2장 30절)
 
 
▲ 영성정 터 에서 내려다 보이는 전경 / 2013년 4월 촬영
 
 
  1924년 4월 무극도장 터가 마련되고 1925년 무극도가 창도된 시기 사이에, 도주님께서는 밀양 영성정에서 무더운 여름부터 다섯 달 동안 폐백도수를 행하셨다. 우리 팀에서는 영성정의 위치와 도주님께서 행하셨던 공부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문서 자료를 찾아보기도 하고 현지답사를 통해 조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영성정에 대하여 조사를 하면서 먼저 들은 내용은 6·25 때 불타서 현재 남아 있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거의 100년 전의 일이라 당시 생존인물들을 찾을 수 없어 직접적인 자료의 확보가 쉽지 않았다. 미진하지만 지금까지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미덕사(美德寺) 대웅전 터(경남 밀양시 상남면 남산리 368-1)와 그 아래쪽의 369번지 2곳을 영성정 터로 추정할 수 있었다. 이번 답사는 2곳 중에서 영성정 터로 좀 더 유력하다고 판단되는 369번지의 지표조사(땅 위에 드러나 있는 모습에 대한 조사)를 위해서 계획되었다.
 
 
영성정 터 답사
  종남산(終南山) 영성정이 있었던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 남산리는 남산마을을 중심으로 북쪽의 남동마을, 동남쪽의 새마을, 평리 등 4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남산리에서 영성정은 남동마을 위쪽에 있는 종남산 남사면 7부 능선쯤에 있었다. 종남산 남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남산리는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1914년) 때 생긴 지명이다. 원래 이름은 구법리 혹은 구배리였다. 남산리의 풍수지리상 형상이 매화낙지혈(梅花落枳穴)인데, 이곳에 왕도의 지기가 서려 있다고 하여 ‘구법(九法): 『서경』의 「홍범」에 기록되어 있는, 우임금이 정한 왕도정치의 아홉 원칙’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또 ‘구배(九拜)’는 아홉 번 절을 한다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
  설화에 따르면, 옛날 마을 북쪽(현재 남동마을)에 있었던 영은사에 가자면 산굽이를 아홉 번 돌아야 했는데, 이때 아홉 번의 합장배례를 하면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었다는 전설에 따라 만들어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전설에서는 이곳에 신선들이 살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선을 만나기 위해 찾아가 보면 만나지 못하고 또 찾아가 보면 만나지 못하다가, 어떤 사람이 아홉 구비를 들어갈 때 아홉 번 절을 하자 신선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하여 ‘구배리’라 불렀다고 한다.
 
▲ 밀양 종남산 영성정 터 추정지
 

  영성정이 있던 종남산은 남산리 북쪽에 우뚝 솟아 있다. 높이는 664m로 옛 이름은 원래 자각산(紫閣山)이었다. 또 밀양도호부(조선 건국 후 1415년에 1천 호 이상의 고을이 도호부로 지정됨) 남쪽에 있다 하여 남산이라고도 불렸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큰 해일이 밀어닥쳤을 때 산 정상이 종지만큼만 남아 종지산이라 하였는데, 종지산이 변하여 종남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는 의적 종남이가 숨어 살던 산이어서 종남산이라 했다고 전한다.
  여주에서 밀양 영성정 터(369번지)까지는 약 3시간 반 정도 차를 타고 가야 한다. 출발한 지 3시간 조금 넘어 밀양 상남면 남산리에 도착한 우리는, 남산리 마을 가운데에 있는 남산저수지를 끼고 돌아 북쪽에 있는 남동마을로 향하였다. 남동마을을 통과하여 ‘갈지자(之)’로 나 있는 임도를 따라 차로 10분 정도 올라가 임도 옆 공터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본격적인 현장답사를 위해 차에서 짐을 챙겨 내렸다. 임도 아래쪽에 미덕사(美德寺)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영성정 터 쪽으로 낫으로 풀을 헤치며 내려갔다. 한여름이라 영성정 터는 예상한 대로 잡풀로 뒤덮여 있어 지표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준비해온 낫과 톱으로 풀베기 작업을 3시간 동안 진행했다. 마침 비가 내려 시원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한여름의 더위에 빗물이 미지근하여 열기가 몸에서 후끈후끈하였다.
 
 

  영성정 터로 추정되는 이곳 369번지는 종남산 정상으로부터 뻗어 나간 여러 줄기의 능선 중에서 남동쪽에서 갈라지는 두 줄기 능선의 시작점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약간 완만한 평지를 이루고 있고, 그 아래쪽으로는 계곡이 시작된다. 이곳 위쪽에는 현재 미덕사라는 절이 있다. 미덕사는 1990년대 후반에 세워진 절인데 대웅전이 세워진 곳은 영성정 터의 추정지 중 하나이다.
  작업을 마치자 약 40평 정도 넓이의 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집터 뒤쪽(종남산 정상 쪽)으로 3m 높이의 축대가 쌓여 있었고, 그 축대 위쪽은 평탄하여 밭으로 이용된 듯하였다. 그 밭 끝에 약 5m의 축대가 다시 쌓여 있고, 그 위에 미덕사가 조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보면 축대가 2단으로 쌓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집터 앞쪽에도 1m 정도의 축대를 쌓아서 집터의 경사를 평탄하게 하였고, 양쪽에는 복숭아나무가 한 그루씩 심겨 있었다. 집터의 양옆에는 뒤쪽 축대와 연결된 돌담이 집을 감싸고 있었다. 아마도 산바람을 막기 위해서 쌓았던 듯하다. 돌담이 많이 무너져 내려 높이는 알 수 없었지만 산중의 아늑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일대를 마을 사람들은 꿍꿍이골이라고 부른다. 사람이 쿵쿵 뛰면 그 소리가 마을까지 울리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우리가 쿵쿵 뛴다면 산 아랫마을에까지 그 소리가 울릴까?
 
 

  이곳 남산리 369번지의 지목은 대지로 설정되어 있다. 주변의 땅이 논이나 밭으로 지목이 설정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대지로 설정되어 있는 것은 이곳이 예전부터 집터였음을 알려준다. 369번지의 크기는 117평(387㎡)이지만 우리가 확인한 실제 집터의 규모는 약 40평 정도였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는 집터 뒤쪽 축대 위에 있는 밭 때문이다. 집터 뒤쪽 축대와 미덕사 쪽 축대 사이가 밭으로 이용되었는데, 이 땅까지가 모두 지목이 대지여서 크기가 117평이나 되었다.
  지금은 빈 터지만 여기에 초가삼간이 있었다고 한다. 방 두 칸에 부엌 한 칸의 집이었는데 지금은 서까래 기둥만 몇 개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집을 지을 만한 위치를 살펴보았다. 지형상으로 볼 때 축대 쪽에 붙여지었을 것으로 보이며, 복숭아나무가 심어진 곳이 마당이었던 것 같다. 영성정이 이곳에 지어져 있었다면 아마도 위치가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집 앞쪽은 축대가 있고 경사가 급해서 문을 내기 어려운 위치여서, 좌우에 돌담이 둘러쳐진 곳에 출입문을 낸 흔적이 보인다. 툭 터진 남쪽 전망을 바라볼 때, 오른쪽에 있는 문은 마을로 왕래하던 큰문 자리로 보이며 왼쪽 소로로 난 쪽문 자리는 밭으로 드나들던 통로였던 것 같다. 이 양쪽 문으로 도주님께서도 다니지 않으셨을까?
 
 
폐백도수
  도주님께서는 1924년 4월에 무극도장 터를 마련하시고 치성을 올리신 후, 폐백도수에 따른 공부를 다섯 달 동안 행하기 위해 영성정에서 공부를 시작하셨다. 공부하신 시기는 5월부터 10월 사이의 5개월 동안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공부하시던 도주님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마음속에 그려보았다. 법좌를 하고 앉으신 도주님께서, 화로를 가운데 놓고 납폐지를 계속 태우며 주문을 외우시는 모습이 떠올랐다. 한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화로에 납폐지를 계속 태울 때 나오는 열기, 납폐지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와 재가 방안에 가득차서 입고 계신 한복에 쌓이고, 뿌연 검은 연기 속에서 끊이지 않고 주문을 외우시는 모습까지. 이 공부를 밤 10시부터 다음 날 아침 6시까지 밤을 새우며 8시간 동안 계속하셨고, 그 기간이 다섯 달 동안 계속 이어졌다.
  도주님께서는 이 공부를 폐백도수라고 부르셨다. 폐백도수가 어떤 것이기에 이렇게 고난이 심한 공부를 행하신 것일까? 현대에는 결혼한 신부가 시댁 어른께 큰절을 하고 올리는 대추나 밤, 포 등을 폐백이라 한다. 원래 폐백은 귀한 예물을 보내거나 올릴 때 사용하는 말로 고대에는 가장 귀한 물건이었던 비단을 주로 가리켰다. 그래서 폐백(幣帛)의 한자어가 비단을 뜻하는 말로 이루어져 있다. 폐백이란 말은 유학의 경전인 《시경》과 《서경》에도 등장하는데 진귀한 예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고대로부터 천지신명께 제사를 올릴 때도 폐백을 바쳤는데, 풍운뇌우(風雲雷雨) 신들께 폐백과 술잔을 각각 올렸다는 기록도 보인다. 또 귀한 사람을 초빙하기 위해 폐백을 보내기도 하였다. 특히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을 보면, 원단 제사에 오방신의 각 방위 빛깔(검은색, 청색, 붉은색, 흰색, 황색)에 따라 비단으로 폐백을 올려야 하는데 흰색 폐백만 올린 책임자를 면직시켰다는 내용도 있다. 폐백의 의미는 현대로 오면서 확장되어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조선 시대에는 왕가나 사대부 집안의 혼례 때 비단이 폐백으로 이용되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다산과 행복의 의미로 대추, 밤 등이 사용되고 있다.01
 
▲ 축대에서 내려다본 영성정 터
 

  도주님께서 말씀하신 폐백도수에도 이러한 고대 폐백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도주님께서는 1924년 4월 무극도장에서 치성을 마치신 후, 육정신을 외우시며 진인보두법을 행하시고, 다시 밀양 영성정에서 공부를 이어가셨다. 이때의 도주님 공부는 마치 가장 진귀한 물건인 비단을 신명들께 폐백으로 올려 그 정성을 표현하던 고대의 제사처럼, 그리고 귀한 사람을 청할 때 폐백을 보내 정성을 표현하던 그런 예와 비슷한 의미가 아니었을까? 폐백은 본래 존귀한 대상에게 예물을 보내거나 올릴 때 또는 바칠 때 이용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도주님의 다섯 달의 정성은 아마도 상제님과 천지신명께 올리셨던 폐백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25년 4월 도주님께서는 구태인 도창현에 무극도를 창도하시며, 상제님을 비롯한 천지신명을 영대와 도솔궁에 봉안하셨던 것이다. 물론 폐백도수가 이런 의미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무극도 창도 이전에 폐백도수가 행해졌던 점은 위에서 말한 폐백의 의미를 추측케 한다.
 
 
영성정에 대한 나머지 이야기
  영성정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 중의 하나는 영성정이 당시 본부의 간부였던 김용국 씨의 재실이었다는 이야기와 선산 김씨의 재실이었다는 설이다. 이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수집한 자료들을 검토해 보았다. 이번 답사지의 토지대장에 따르면 1912년에 이곳을 최초로 토지등기 한 사람은 강태희 씨였다. 그리고 1919년에 이 땅을 이전받아 1931년까지 소유한 사람은 한춘옥 씨로 도주님께서 공부하신 1924년 당시의 소유자였다. 그 후 1931년에 일본사람에게 이전되었다가 1949년 신일기 씨에게, 다시 1973년에 현재의 소유자에게 이전되었다. 이렇게 소유권이 이전된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소유관계로만 보면, 우리가 전해 들었던 김용국 씨의 재실 혹은 선산 김씨의 재실이라는 이야기는 사실일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였다. 왜냐하면 남의 땅(1924년 당시 한춘옥 씨 소유)에 재실을 짓는 경우는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선산 김씨 재실 혹은 김용국 씨의 재실이라는 설이 타당한지 살펴보았다. 먼저 선산 김씨 재실이었다는 설을 살펴보기 위해서 영성정이 있던 상남면 남산리에 선산 김씨가 살고 있는지 확인하였다. 그러나 한 명도 살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물론 이전에 살았다가 모두 이사 갔을 수도 있지만 재실이 마련된 곳에 후손이 한 명도 살지 않는다는 점은 의아스러운 점이었다. 그래서 후손이 없다는 사실과 재실의 땅이 김씨 소유(1924년 당시 한춘옥 씨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결합하자, 영성정이 선산 김씨 재실이었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었다.
  다음으로 김용국 씨의 재실이라는 설은 왜 등장했을까? 이 질문은 1920년대 무극도인들의 활동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김용국 씨가 무극도의 간부였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김용국 씨는 1925년경 무극도 본부 간부로 행정업무를 담당하면서 포덕사업에서 ‘연락(聯絡)’이라는 직위를 맡고 있었다. ‘연락’이란 직위는 최소 240명에서 최대 1만5천 명까지의 포덕한 도인을 이끌어 가는 책임자였다. 김용국 씨는 4천여 명 이상을 이끌었던 책임자로, 출신 지역이 영성정 위치 바로 옆 마을인 기산리였다는 사실이 눈에 띄었다.
  종남산 남쪽 사면 마을이 남산리이고, 산 너머 종남산 동쪽 사면에 있던 마을이 김용국 씨가 살던 기산리이다. 또한 당시에도 도인들의 포덕은 지금처럼 가족이나 친지, 마을 사람 등 연고가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었다. 그래서 종남산 능선을 사이에 두고 있는 남산리와 기산리가 거리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연고 관계를 생각해보면 멀다고 할 수만은 없었다. 현재 남산리 최고령자 중 한 분도 기산리에서 넘어와 정착하였고, 현재 369번지의 소유주도 기산리에 사는 처남의 소개로 이 땅을 사게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영성정터 추정지인 369번지 바로 옆에 붙어있는 밭(369-1, 369-2번지)은 1921년~1943년 사이에 기산리 출신 김봉두 씨의 소유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김봉두 씨가 무극도에서 240명의 도인을 이끌던 ‘연락’ 직위에 있었다는 점이다. 김봉두 씨와 369번지의 소유주 한춘옥 씨가 이웃 사이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영성정과 관련하여 김봉두 씨가 아니라 김용국 씨가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상위 직책을 맡고 있었던 김용국 씨가 도주님을 이곳으로 모셔 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도주님께서 다섯 달 동안 공부하실 장소인 영성정 섭외와 기타 여러 가지 준비를 주관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김용국 씨의 재실 혹은 선산 김씨 재실이라는 영성정에 대한 와전된 이야기가 생겨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참고로 김봉두 씨는 김해 김씨였다.
  영성정(靈聖亭)의 한자 표기에 나타나 있듯이, 정(亭) 자는 경관이 좋은 곳에 아담하게 지은 집을 뜻한다. 함안 반구정처럼 경관이 좋고 볕이 잘 드는 이곳 종남산에 지었던 정자로 추정된다. 답사를 마무리하면서 조사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를 얻지 못한 점은 큰 아쉬움을 남긴다. 도주님의 행적을 쫓아가면서 항상 느끼는 점이지만, 이번 조사를 하면서도 큰 절벽이 가로막고 있는 듯해서 조사 방향을 정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힘든 노고를 아끼지 않으시며 도를 펼치셨던 도주님의 행적을 알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기도 했다. 간혹 우리는 도주님께서 후세 도인들을 위해 50년 공부로 수도의 모든 법을 짜놓으셨다는 말을 하곤 한다. 그리고 ‘도주님의 50년 공부’를 수식어처럼 많이 인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영성정의 폐백도수처럼 ‘50년 공부’ 하나하나에는 도주님의 정성이 살아 숨쉬고 있음을 조심스레 느낄 수가 있다. 이 느낌은 전기가 전해지듯 마음을 채우며 이렇게 묻는다. ‘그러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개벽 후 후천 오만 년의 도수를 나는 펴고 너는 득도하니 그 아니 좋을시구!” (교운 2장 11절)
 
 
 
 
 

01 곽춘근, 「폐백도수에 관한 고찰」, 《대순회보》 191호 (2017), pp.107~10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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