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별 보기
   daesoon.org  
대순147년(2017) 3월

이전호 다음호

 

도전님 훈시 종단소식 전경 지명 답사기 청계탑 전경 속 역사인물 포토에세이 뇌화고 만화 대순문예 내가 읽은 책 대순광장 나누고 싶은 이야기 상생의 길 퀴즈 및 퀴즈 정답자 알립니다

전경 속 역사인물 : 치수 治水로 백성을 구한 우임금

치수 治水로 백성을 구한 우임금
 
 
연구위원 전성기
 
성골이 옮겨진 후 十五일이 되니 상제께서 구세 제민하시고자 강세하신 날이 되니라. 이날 재실에 모여 치성을 올린 후에 도주께서 “시시묵송 공산리 야야한청 잠실중 분명조화 성공일 요순우왕 일체동(時時黙誦空山裡 夜夜閑聽潛室中 分明造化成功日 堯舜禹王一切同)01이라” 말씀하셨도다. 그러나 듣고 있던 사람들은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하느니라.…. (교운 2장 23절)
 
 
  우(禹)임금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왕조국가였던 하(夏)나라의 시조이다. 우임금은 이름이 문명(文命)이었다. 우는 곤(鯀)의 아들로, 전욱(顓頊) 임금의 손자이자 황제(黃帝)의 현손(玄孫: 증손자의 아들)이다. 요(堯)임금 때 하늘까지 닿을 듯한 홍수가 나서 산을 둘러싸고 언덕을 넘쳐 백성들이 큰 시름에 잠겼다. 그러자 요임금은 홍수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을 구하였다. 여러 신하와 사악(四岳)02이 모두 곤이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 요임금이 말하기를 “곤은 사람됨이 명(命)을 거역하고 종족을 다치게 하였으니 쓸 수 없다.”고 하였다. 사악이 말하기를 “비교해 보면 곤보다 더 현명한 자는 없습니다. 임금께 원하옵건대 그를 시험 삼아 등용해보십시오.” 이에 요임금이 사악의 말을 듣고 곤을 등용해서 물을 다스리도록 했다. 그러나 9년이나 지났지만 홍수는 그치지 않고 아무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곤은 재주와 힘에 있어서 따를 사람이 없을 만큼 뛰어났으나 너무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는 물을 다스리는 방법을 막는 것과 차단하는 것에만 전념하였다. 이 방법은 물살이 약할 때 효과적인 것인데, 실제 물살은 너무 강했기 때문에 실패하게 된 것이다.
  이에 요임금은 치수할 사람을 구하게 되었는데 순임금이 천거 받아 등용되었다. 순임금은 천자를 대신해서 정사(政事)를 돌보고 전국을 다니면서 시찰하였다. 순임금은 곤의 치수사업이 공로가 없음을 보자 곤을 우산(羽山)에 귀양 보내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 있게 하였다. 천하의 사람들은 모두 곤의 처벌이 옳다고 생각했다. 
  요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순임금이 사악과 신하들에게 “누가 요임금의 공적을 계승하여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가?”라고 묻자 모두 일제히 “우에게 물과 대지를 다스리는 사공(司空)의 관직을 맡게 하시면 요임금의 공적을 이어 빛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순임금이 “아, 그렇겠구려!” 하며 우에게 “그대를 사공에 임명하니 물과 땅을 잘 다스리는 데 힘써 주시오.”라고 명했다. 이에 우는 머리를 조아려 절하며 설(契), 후직(后稷), 고요(皐陶)에게 사양했다. 그러나 순임금은 “그대가 어서 가서 이 일을 맡아보도록 하시오.”라며 거듭 명했다. 이렇게 순임금은 곤의 아들 우를 등용해서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치수사업을 계속하도록 하였다.
  우는 사람됨이 민첩하고 의지가 강하며 매우 근면했다. 그 덕은 도리에 어긋남이 없었고, 인자하여 친화력이 있었으며 말은 신뢰할 수 있었다. 목소리는 가락을 타는 듯하여 화기애애하였고 행동은 법도에 맞았으며 사리판단이 명철했다. 부지런하고 화목하여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되었다.
 

백성을 구제한 치수사업
  우는 마침내 익(益), 후직과 함께 순임금의 명을 받들어 제후와 백성들을 모아 홍수를 해결하기 위해 땅을 메우도록 하였다. 산에 올라 말뚝을 세워 이를 측량의 기준으로 삼고 높은 산과 큰 강을 측량하였다.
  우는 아버지 곤이 홍수를 다스리는 데 성공하지 못하고 처벌당한 것이 몹시 마음 아파서 오로지 물을 다스리는 데만 골몰하였다. 13년간 집 밖의 일터에서 지내다가 자기 집 문을 3번 지나면서도 집에 들지 못하였다.03 자신이 먹고 입는 것은 소홀히 하면서 귀신을 섬기는 데는 정성을 다했으며 보잘것없는 곳에 기거하면서도 수로(水路)를 건설하는 데는 온 비용을 다 사용하였다. 육지를 다닐 때는 수레를 타고 다녔고, 물을 다닐 때는 배를 타고 다녔다. 진흙탕은 썰매를 타고 다녔고, 산에서는 바닥에 징을 박은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 왼손에는 수평기(水平器)04와 먹줄을 들었고 오른손에는 그림쇠(원을 그리는 컴퍼스)와 직각자를 들고 다녔다. 그리고 그는 사계절의 일을 때에 맞추어 행하였다. 또한 그는 구주(九州)를 개척하고, 아홉 개의 큰 수로를 내었으며, 아홉 개 큰 호수의 제방을 쌓고, 아홉 개의 큰 산에 길을 통하게 했다. 익(益)으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볍씨를 주도록 명하니 낮고 습한 땅에 벼를 심을 수 있게 되었다. 후직에게는 백성들에게 부족한 식량을 나눠주라고 명하여 식량이 모자라는 곳에는 남는 곳의 것을 조절하여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제후들의 관할 지역 안에서 균형을 맞추도록 하였다. 우는 각지를 순행하면서 그 지역에 맞는 공물을 정하고 공물 운송을 위해 산천의 편리함을 판단하였다.
  우는 아버지의 실패를 교훈 삼아 ‘통하게 하는 것과 이끄는 것’을 위주로 하여 물의 흐름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물을 다스려 나갔다.05 우의 쉴 틈 없는 각고의 노력 끝에 구주는 정치와 교화가 하나로 통일되었으며, 사방 어느 곳에서나 백성들이 잘살 수 있게 되었다. 아홉 개의 큰 산에 길이 생겨 통하게 되었고, 아홉 개의 큰 호수에 모두 제방을 잘 쌓으니 사해가 하나로 모였다. 또한 사람의 생활에 필요한 물자들인 육부(六府)06가 잘 유통되었다. 모든 토지는 조건을 고려하여 알맞게 등급을 매겨 조세를 신중하게 부과했는데 토양은 모두 세 등급을 표준으로 삼아 전국의 세금체계를 정했다. 또한 천자가 있는 수도 밖의 땅을 500리 단위로 나누어 다섯 구역[五服]으로 지정하였다. 이렇게 구분하여 각 지역을 용도에 맞게 이용하고 적절한 세금의 형태와 양을 정해 주었다. 우의 명성과 교화가 동쪽으로는 황하에 다다르고 서쪽으로는 유사택(流沙澤)에까지 미쳤으며, 또 북쪽 끝에서 남쪽 끝에 이르기까지 나라 전역에 널리 퍼졌다. 이리하여 순임금은 우에게 현규(玄圭)07를 내려 천하에 이룬 공적을 선포하였으니 천하는 마침내 태평스럽게 다스려지게 되었다.
  어느 때인가 우는 순임금 앞에서 신하 고요와 서로 의견을 나누던 중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고요가 “아! 천하를 다스리는 길은 인재를 알아보는 것과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하자. 우가 말했다. “아! 완전히 이와 같이 행하는 것은 요임금도 어려워하셨습니다.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은 지혜로운 것이므로, 인재를 관리로 임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일은 은혜로운 것이므로, 백성들이 은덕을 그리워하도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혜로울 수 있고 은혜로울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묘족(苗族)08을 굳이 멀리 쫓아낼 필요가 있으며, 무엇 때문에 교묘하게 말하고 얼굴빛을 꾸며 아첨하는 사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우가 “저는 도산씨(塗山氏)09의 딸에게 장가든지10 나흘 만에 집을 떠나 계(啓)가 태어났을 때도 아끼며 돌봐주지 못했습니다.11 그렇게 가족을 돌보지 못할 정도로 일심으로 혼신의 힘을 다했기 때문에 치수사업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도읍을 중심으로 오복(五服)12을 설치하여 사방 5,000리에 이르는 지역을 관할하고, 12주에 사(師)라는 지방 장관을 두어 도읍의 외곽지역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또 밖으로는 사해에 접근하여 제후국 모두 가장 어진 사람으로 다섯 등급의 우두머리인 오장(五長)을 세워 각자의 백성을 이끌며 공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오직 삼묘족만이 완강하게 거부하여 공적을 이루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임금께서는 유념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순임금은 “나의 덕행으로 백성을 인도한 것은 바로 그대의 공로가 순서대로 이루어진 덕분이오.”라고 말했다. 고요는 이에 우의 덕행에 공경을 표하고 백성에게 모두 우를 본받도록 했으며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벌로 다스렸다. 이때 기(夔)가 음악을 연주하자 조상의 혼령이 내려왔고 제후들은 서로 예를 갖추어 양보했으며, 새가 하늘 높이 날고 짐승들도 춤을 추었다. 이로부터 천하는 모두 우의 분명한 법도와 음악을 받들어 산천(山川)에 있는 신령들의 주재자로 그를 추앙하였다.
 
 
마지막 선양, 우의 즉위
  순임금은 하늘에 우를 천거하여 후계자로 삼았다. 17년 뒤 순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3년 상을 치른 우는 천자의 자리를 순의 아들 상균(商均)에게 양보하고 양성(陽城)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천하의 제후들이 모두 상균을 떠나 우에게 조회하러 왔다. 우는 그제야 천자(天子)의 자리에 올라 남면(南面)13하고 천하의 조회를 받았다. 나라 이름을 하후(夏后)라 하고, 성을 사씨(姒氏)라 했다. 우임금이 즉위하자 고요를 등용하여 하늘에 추천하고 정권을 넘겨주려 했으나 고요가 죽게 되어 고요의 후손을 영(英)과 육(六), 허(許)14에 봉했다.
  우임금은 재위 중에 식사할 때도 열 번이나 일어서서 급한 일들을 처리했고 길을 가다가 죄지은 사람을 보면 수레에서 내려 죄를 짓게 된 이유를 물어보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요순시대에는 백성들이 모두 요순 임금의 아름다운 마음을 본받아 범죄가 일어나지 않았으나 과인이 천자가 되고 나서는 모두가 자기 마음대로 살려 하기 때문에 범죄가 생겨나는 것이다. 진실로 과인이 덕이 없음을 슬퍼하노라.” 또한 우임금은 각 지방에서 금을 바치게 하여 아홉 개의 솥을 만들었다. 이 아홉 개의 솥[九鼎]은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사용했으며 평화를 상징하기도 하는데, 이후 중국 왕실의 보물이 되어 천자의 상징물로 은나라를 거쳐 주나라까지 전해졌다. 그리고 우임금에게는 3명의 뛰어난 신하가 있었는데, 그들은 우물 파는 기술자 익(益), 수레의 발명가 해중(奚仲), 술을 발명한 의적(儀狄)이었다. 이때의 술은 마유주(말의 젖을 발효시킨 도수가 아주 낮은 술)였지만, 술맛을 본 우임금은 참으로 맛있지만 술로 반드시 후대에 나라를 망치는 자가 생길 것이라 경계하며 술은 물론 의적도 멀리하였다.
  우임금은 고요가 죽자 익을 등용하여 그에게 정사를 맡겼다. 그로부터 10년 후 우임금은 동쪽 지방을 시찰하다가 회계산(會稽山)15에 이르러 세상을 떠났다. 우임금이 천하를 익(益)에게 넘겨주었지만, 3년 상을 치르자 익은 우임금의 아들 계(啓)에게 천하를 양보하고 기산(箕山) 남쪽으로 물러났다. 우임금의 아들 계는 현명하여 천하의 마음이 그에게 돌아갔다. 우임금이 세상을 떠나면서 익에게 천하를 주었지만 익은 우임금을 보좌한 기간이 짧아서 천하의 신임이 두텁지 않았다. 그래서 제후가 모두 익을 떠나 계에게 알현하면서 말했다. “우리의 군주 우임금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계가 마침내 천자의 자리에 오르니 이 사람이 바로 하나라의 계임금이다.
  사마천이 말했다. “우임금은 사씨(姒氏)를 성(性)으로 삼아 그 후손들이 각지에 나뉘어 봉해져 그 나라 이름을 성으로 삼았다. 그래서 하후씨(夏后氏), 유호씨(有扈氏), 유남씨(有男氏), 짐심씨(斟尋氏), 동성씨(彤城氏), 포씨(褒氏), 비씨(費氏), 기씨(杞氏), 증씨(繒氏), 신씨(辛氏), 명씨(冥氏), 짐과씨(斟戈氏)가 생겨난 것이다. 공자가 하나라의 역서(曆書)16를 바로 잡아서, 학자들이 『하소정(夏小正)』17을 많이 전수했다고 한다. 우순(虞舜)과 하우(夏禹) 때 공물과 세금 제도가 갖추어졌다. 혹자는 우가 강남(江南)에서 제후들과 모여서 공적을 심사하다가 세상을 뜨고 그곳에서 장례를 치렀기 때문에 회계(會稽)라 불렀다고 한다. 회계는 회계(會計)와 같은 뜻이다.”
  앞에서 밝힌 우임금에 대한 내용은 『서경』과 사마천의 『사기』와 『십팔사략』, 『산해경』 등을 근거로 구성한 것이다. 우임금이 세운 하 왕조는 고고학적으로는 아직 그 실체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최근 중국에서는 전설상의 시대라고 추정했던 하 왕조를 실존했던 것으로 보고 연구를 진행 중이다. 고대의 건국영웅들은 동서양이 같이 신화적 속성과 역사성을 겸비하고 있다. 우임금에 관한 기록들도 그러하다. 여기서는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인물로 바라보는 대순진리회의 관점대로 역사적 실재성을 전제로 구성해 보았다.
  우임금은 홍수를 막아 백성들의 재난을 없앴던 공로로 순임금을 이어 천하를 다스렸다. 우임금 이후에는 요순시대처럼 덕 있는 이에게 왕위를 계승하던 선양제(禪讓制)18에서 자식에게 왕위를 계승하는 세습제 왕조가 들어섰다. 그는 고대 중국에서 선양제로 즉위한 마지막 왕이었다. 역사적으로는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어 생산력이 커지면서 잉여 생산물로 인한 인간의 욕망이 증가하여 사유제와 권력욕이 무모한 침탈로 확대되는 상황이었다. 이처럼 인간의 사욕이 커지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임금은 홍수로 고통 받는 백성들을 한시라도 빨리 구제하기 위해 13년간이나 자신과 가족도 돌볼 겨를이 없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하여 지대한 공로를 세운 인물이다. 이는 위천하자 불고가사(爲天下者不顧家事)의 모범을 보인 매우 훌륭한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이렇듯 우임금은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서전서문(書傳序文)의 심법(心法)을 바탕으로 세상을 구하고 바른 정치를 펴고자 한평생 일심(一心)으로 노력했기 때문에 성군(聖君)이 될 수 있었다. 우임금의 일은 도통과 지상천국건설을 목표로 하는 수도인의 마음가짐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수도인은 가정화목을 근본으로 사회발전에 이바지하면서 광구천하와 광제창생하고자 이 땅에 오신 상제님의 뜻을 일심으로 받들고자 하는 정신을 함양하고 견지해 나가야 함을 새삼 되새기게 된다. 

 
 
【참고문헌】
『典經』
『서경(書經)』
『사기(史記) 』
『산해경(山海經)』
『십팔사략(十八史略)』
『회남자(淮南子)』
民衆書林編輯局, 『漢韓大字典』, 서울: 民衆書林, 2000.
최의중, 「만화 : 우임금 이야기」, 《대순회보》 173호.
백양, 『맨얼굴의 중국사』 1, 김영수 옮김, 서울: 창해, 2005.
樊樹志, 『100가지 주제로 본 중국의 역사』, 김지환ㆍ이병인ㆍ이영옥ㆍ이호현 옮김, 서울: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8.
사마천, 『사기본기(史記本紀)』, 김원중 옮김, 서울: 을유문화사, 2007.
사마천, 『사기본기』, 박일봉 역저, 서울: 육문사, 2012.
서욱생, 『중국 전설시대와 민족형성』 上, 조우연 엮음, 서울: 學古房, 2012.
신성곤ㆍ윤혜영,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울: 서해문집, 2004.
위안커, 『중국신화사』 上, 김선자ㆍ이유진ㆍ홍윤희 역, 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10.
이토 세이지, 『신이(神異)의 나라 중국의 신화와 전설』, 박광순 옮김, 서울: 넥서스, 2000.
저우스펀,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중국사』, 김영수 옮김, 파주: 돌베개, 2006. 
정재서, 『이야기 동양신화』, 파주: 김영사, 2010.
증선지(曾先之),  『십팔사략(十八史略)』, 소준섭 엮음, 서울: 미래사, 2004.
증선지(曾先之), 『십팔사략』, 편집부 편역, 서울: 자유문고, 1992.
허청웨이, 『중국을 말한다 01 동방에서의 창세』, 양산췬ㆍ정자룽, 김봉술ㆍ남홍화 옮김, 서울: 신원문화사, 2008.
 
 
 

01 빈 산속에서 때때로 소리 없이 읊조리며 고요한 방에서 깊은 밤에 한가로이 듣는다. 분명하게 조화로 일이 이루어지는 날에 요ㆍ순ㆍ우의 도가 모두 하나가 되리라.
02 요임금의 신하이름이다.
03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 상(上)편에서는 8년간 집에 들어가지 못한 것으로 나온다.“當堯之時, 天下猶未平, 洪水橫流, 氾濫於天下. 草木暢茂, 禽獸繁殖, 五穀不登, 禽獸偪人. 獸蹄鳥跡之道, 交於中國. 堯獨憂之, 擧舜而敷治焉. 舜使益掌火, 益烈山澤而焚之, 禽獸逃匿. 禹疏九河, 瀹濟漯, 而注諸海; 決汝漢, 排淮泗, 而注之江, 然後中國可得而食也. 當是時也, 禹八年於外, 三過其門而不入”
04 면이 평평한가 아닌가를 재거나 기울기를 조사하는 데 쓰는 기구를 이른다.
05 우임금은 물을 다스림에 있어, 그 막힘이 없는 곳으로 흘러가게 하였다. 『맹자(孟子)』,  「이루(離婁)」 하(下), “禹之行水也, 行其所無事也.” 서욱생, 『중국 전설시대와 민족형성』 上, 조우연 엮음(서울: 學古房, 2012), p, 392 참조.
06 금속, 나무, 물, 불, 토지, 곡식의 여섯 가지 물자.
07 붉은 기운이 있는 검은색 옥기(玉器)로 천자가 제후를 책봉하거나 조회 등의 의식 때 쓴다.
08 고대 중국 남방의 소수 민족의 이름으로 삼묘(三苗)를 말한다.
09 씨족의 이름으로 도산(塗山)은 중국 안휘성(安徽城)에 있는 지명이다.
10 우임금은 30세가 되도록 결혼을 못해서 후에 길에서 우연히 만난 도산씨의 딸과 태상(台桑)에서 사통(私通)하여 부부가 되었다. 우임금은 부모의 명(命)도 없이 중매쟁이의 말도 오가지 않았는데 부부의 연을 맺은 셈이다. 이 때문에 우임금의 행실이 음(淫)하다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굴원(屈原)은 “짝이 없을까 장가든 것은, 아들을 얻으려 한 것이니(閔妃匹合, 厥身是繼. 『楚辭』 「天問」)”라고 하여 자손을 잇기 위한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태상(台桑)’의 ‘상(桑)’, 즉 뽕나무는 본래 태양신을 숭배하던 사람들이 태양수(太陽樹)인 부상(扶桑)을 재배할 수 없기 때문에 대체물로 길렀다고 한다.
11 이 부분에 대한 신화적 내용으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우임금이 일할 때 곰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고 놀란 아내 도산씨가 도망가다 돌이 되어 출산하려 하자, 우임금이 “내 아이를 돌려 달라!”하고 외치자, 돌 북쪽이 부서지며 계(啓)가 태어났다고 한다. 이토 세이지, 『신이(神異)의 나라 중국의 신화와 전설』, 박광순 옮김, 서울: 넥서스, 2000, p.146 참조. 
12 왕기(王畿)를 중심으로 주위를 순서대로 나눈 다섯 구역을 말한다. 오복은 전복(甸服)ㆍ후복(侯服)ㆍ수복(綏服)ㆍ요복(要服)ㆍ황복(荒服)을 가리키며 한 복(服)은 각각 500리이다. 이러한 구역 역시 일종의 상상의 구역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인호는 “구주(九州)나 오복(五服)의 설정으로부터 천자와 제후국의 관계, 중국과 이민족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느낄 수 있다.” 이 때 ‘복(服)’자는 복종(服從)의 의미이다.
13 임금이 남(南)쪽을 향(向)하고 앉아서 여러 신하(臣下)의 조례(朝禮)를 받는 모습을 이른다.
14 영(英), 육(六), 허(許)는 지명이다.
15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소흥현(紹興縣) 동남쪽에 위치해 있다.
16 사계절과 절기를 기록한 책으로 사마천은 『사기』 「태자공자서」에서 “역법(曆法)은 양(陽)에 입각하여 음(陰)을 다스린다. 율력과 역법이 서로 다스리므로 그 사이의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황제력ㆍ전욱력ㆍ하력(夏曆)ㆍ은력(殷曆)ㆍ주력(周歷)은 각기 서로 다르다.
17 하(夏)왕조의 뛰어난 역법서를 말한다.
18 군주의 지위를 세습이 아니라 명망과 덕을 갖춘 제 3자에게 양위하는 왕위 계승제도로서 역성혁명(易姓革命)과 구분되며, 요가 순에게 순이 또 우에게 군주의 자리를 넘긴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후세 유학자들은 선양을 가장 이상적인 왕위계승방식이라 여겼으며 이는 요순 시대 내지는 요순우의 시대를 가장 이상적인 정치시대로 평가하는 한가지 근거로도 작용했을 것이다. 신성곤ㆍ윤혜영,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울: 서해문집, 2004, p.24 참조.
 
 

관련글 더보기 인쇄

Copyright (C) 2009 DAESOONJINRIHOE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강천로 882 대순진리회 교무부 tel : 031-887-9301 mail : gyomubu@daeso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