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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7년(2017)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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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종 : 남조선 뱃길

남조선 뱃길
 
 
연구위원 김주우
 
상제께서 화천하시기 전해 섣달 어느 날 백지에 二十四방위를 돌려쓰고 복판에 혈식천추 도덕군자(血食千秋道德君子)를 쓰시고 “천지가 간방(艮方)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나 二十四방위에서 한꺼번에 이루워졌느니라”고 하시고 “이것이 남조선 뱃길이니라. 혈식천추 도덕군자가 배를 몰고 전명숙(全明淑)이 도사공이 되니라. 그 군자신(君子神)이 천추 혈식하여 만인의 추앙을 받음은 모두 일심에 있나니라. 그러므로 일심을 가진 자가 아니면 이 배를 타지 못하리라”고 이르셨도다.(예시 50절)
 
 
  오늘날 남조선(南朝鮮)이라는 지형적 모습은 한반도 이남을 지칭하는 실재의 영토이다. 6·25동란(1950년 6월 25일 - 1953년 7월 27일) 때 휴전한 군사 분기점을 중심으로 남한과 북한을 양분하여 구분한 지형에서 비롯된다. 남조선이라는 용어는 주로 조선(朝鮮)을 자칭(自稱)하는 북한이 남한을 부르는 데 사용한다. 그렇다면 1871년 조선에 강세하신 상제님께서 말씀한 ‘남조선’과 ‘남조선 뱃길’은 무엇을 의미하고 그 실체는 어떤 것인가? 
  남조선에 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01이다. 여기에서 남조선은 “조선 민족의 현실고(現實苦)에 대한 정신적 반발력에서 만들어 낸 이상사회의 표상이며 이것의 의미는 조선어에 남쪽을 ‘앏’ 곧 앞쪽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남조선이라 함은 곧 전방에 있는 조선, 앞으로 다가올 조선을 나타낸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남조선을 오랫동안의 역사적 요구가 민족 전체의 심중(心中)에 점점 표상화된” 것으로 파악하고 “남조선사상” 또는 “남조선신앙”으로 설명한다.02 이처럼 최남선은 남조선을 조선의 남쪽 땅으로 보지 않고 미래의 조선이라는 민중의 신앙 혹은 사상이라는 관념적 표상으로 정의한다.
  문헌상으로 남조선신앙의 증후로 간주되는 말로서 남(南), 혹은 남해(南海)라는 문구가 인조(仁祖) 연간 이후로는 각종 반란음모사건과 연관하여 자주 등장한다.03 이는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1637)을 겪은 이후에 사회경제의 파탄과 더불어 현실의 고통을 탈피하려는 민중의 희망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조선 후기는 유난히 기근과 전염병이 창궐하였고 삼정[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의 문란으로 관리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가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그러므로 남조선신앙의 기원은 현실사회의 불합리성을 극복하기 위한 민중들의 노력과 일정 부분 연관이 있을 것이다.
  남조선신앙이 언제부터 유래되었는지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후기에 『정감록』과 같은 도참 예언서들이 형성될 때 파생된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정감록』에서 피난처로 언급되는 십승지(十勝地)가 남쪽에 있다는 점과 남해[남(南), 남도(南島), 남해도(南海島)]에서 진인(眞人)이 출현한다는 비결을 통해 남조선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질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그러나 『정감록』에는 남조선이라는 용어가 나오지 않고 이보다 후대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격암유록』의 「가사총론」에 “남문복기남조선(南門復起南朝鮮)”이라는 말이 나온다.04 이러한 사실을 정리하면 예언이 담긴 도참비기가 생산, 유포되는 과정에서 유추된 여러 믿음이 복합되어 하나의 남조선신앙 또는 남조선사상을 형성한 것으로 이해된다.
  남조선신앙이 실제로 확인되는 것은 수운 최제우(崔濟愚, 1824-1864)가 제창한 동학(東學)과 관련된 사건이다. 당시 천주교 신부인 뮈텔(Mutel)05 주교가 수집한 동학 관계 사료에는 1893년 무장, 영광, 정읍에서 거주하는 동학도들이 계룡산에 개국(開國)할 천명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독자적인 관직을 임명하여 무장봉기를 준비했다는 「동학도 개국음모건(東學徒開國陰謀件)」의 문서가 있다. 이 문서에 뮈텔 주교는 그들이 “남조선 정씨를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했다.06 이 사건은 남조선신앙이 구체적인 흥기로 추진된 사례이다. 또 동학군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김개남(金開南)은 원래 이름이 김기범이었으나 꿈에 신인(神人)이 써준 ‘개남(開南)’으로 자신의 이름을 바꾼다. 여기서 개남은 ‘남조선을 개벽(開闢)한다.’는 뜻으로 그가 남조선신앙에 돈독했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이 밖에도 1894년 동학군을 신문한 공초(供招)의 기록에는 “동도대장군 이씨가 남조선에서 나왔다”는 내용이 보인다.07 또 1900년 소백산맥 동쪽 지역에서 체포된 동학도들은 남조선이라고 쓴 대장기(大將旗)를 소유했다는 신문보도가 있었다.08
  이처럼 남조선신앙은 동학도와 관련되어 전승되어 왔다. 그들은 ‘진인이 나타나 고통에 빠진 민중을 이상세계로 인도할 것’이라는 남조선신앙을 유포하여 민중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특히 동학의 후천개벽사상(後天開闢思想)은 이상세계의 남조선신앙을 연상시키는 모티브로 작용했을 것이다. 후천개벽사상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폐정개혁(悖政改革)의 기치가 되어 갑오년(1894) 동학혁명의 실질적인 무장활동으로 연결된다.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 1844-1911)과 같은 탐관오리의 학정(虐政)에 분노한 민중들의 기세는 걷잡을 수 없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농민들이 주축이 된 운동으로 지배계층에 대한 조선 시대의 최대 항쟁이었다. 항쟁의 기저에는 이상세계를 동경하는 민중들의 염원과 남조선신앙 간의 긴밀한 연관 관계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본래 동학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장하였지만 수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외세[청(淸), 일본(日本)]의 개입과 내부조직의 혼란으로 혁명을 완수하지 못했다.09 상제님께서는 동학혁명의 실패로 실의와 공황 상태에 빠진 무명의 약소민족을 위해 참동학을 천명하셨다. 또 동학신자들이 대선생[大先生, 최제우]이 갱생하리라는 믿음에 대해 ‘대선생(大先生)’은 ‘대선생(代先生)’이라 하시며 대선생(代先生)을 자임하셨다. 그리고 암울한 질곡에 빠진 조선의 민중들에게 희망과 활로(活路)를 열어주고자 하셨다. 그것은 다름 아닌 민중들이 간절하게 희구했던 이상세계로 바로 남조선이다. 이 남조선은 만국(萬國)이 살 수 있는 계책이 나오는 곳이기도 하다[萬國活計南朝鮮]. 상제님께서는 이상세계로 떠나는 배를 남조선배라고 지칭하고 이상세계에 가는 과정을 남조선 뱃길로 말씀하신다. 이처럼 후천(後天) 선경세계(仙境世界)인 남조선은 오로지 배와 뱃길을 통해 바다를 건너야 도달할 수 있는 여정이다. 바다란 모든 강물이 도달하여 만선의 배를 띄울 수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바다는 넓고 많은 것을 상징하지만,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특색을 갖는다. 또 풍요로운 바다는 때로 삶의 고해(苦海)로 비유되어 그곳을 건너야만 도(道)가 실현된 이상향으로 갈 수 있다.
  어느 날 상제님께서는 종도들에게 “이것이 남조선 뱃길이니라. 혈식천추도덕군자가 배를 몰고 전명숙이 도사공이 되니라. 그 군자신(君子神)이 천추 혈식하여 만인의 추앙을 받음은 모두 일심(一心)에 있나니라. 그러므로 일심을 가진 자가 아니면 이 배를 타지 못하리라.”(예시 50절)는 가르침을 주셨다. 남조선으로 향하는 배는 동학혁명의 지도자였던 전봉준(全琫準, 1854-1895)이 도사공이 되고 일심의 표상으로 만인의 추앙을 받아온 혈식천추 도덕군자(血食千秋 道德君子)가 몰고 뱃길을 헤쳐 나간다. 이 배를 타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일정한 조건이 있다. 혈식천추 도덕군자처럼 만인의 추앙을 받을 수 있는 ‘일심’을 가진 사람만이 승선의 기준을 통과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남조선은 영웅적 메시아의 도움만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고 민중 스스로가 심신 수양을 통해 도덕적 인품과 일심을 가졌을 때만 갈 수 있는 곳이다. 이것은 종래의 남조선신앙에서 보여 주었던 무장투쟁이라는 정치적 경향과도 다를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마음 수양의 결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따라서 남조선 뱃길은 사회변혁의 주체인 인간의 마음을 먼저 수양하는 데서 그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남조선이 이상세계라면 오늘날 남한이라는 특정한 지역에 한정시키기에는 그 의미가 너무 협소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수도를 통해 완성해 나가야 할 이상향, 즉 삼계(三界)가 개벽(開闢)되어 이루어지는 후천세계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01 이 책은 1937년 1월 30일부터 9월 22일까지 160회에 걸쳐서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던 글을 1946년 6월 20일에 동명사(東明社)에서 펴낸 것이다.
02 최남선 지음, 최상진 해제, 『조선의 상식』(서울: 두리미디어, 2007), p.183.
03 『조선왕조실록』과 조선 시대 각종 중요사건을 판결한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에서 변란, 역모 사건은 남(南) 쪽과 관련된 유언비어[해도기병설, 진인출현설]가 자주 등장한다.
04 이 『격암유록』은 충남 서산에 거주한 이도은(1907-1998)의 필사본이다.
05 프랑스인 뮈텔[Mutel, 한국명 민덕효(閔德孝)] 주교가 조선교구장이 되어 자신에게 접수된 모든 문서를 정리 보관하였다. 『Mutel 문서』로 명명되는데 이 자료 중 동학과 관련된 문서는 대략 45건이다. 조광, 「동학농민혁명 관계사료 습유- 뮈텔의 자료를 중심으로」, 『史叢』 29(고려대학교사학회, 1985) pp.205-208.
06 김탁, 『정감록』(경기: 산림출판사, 2005), p.211.
07 김용덕, 「동학사상연구」, 『중앙대 논문집』 9(1964), pp.201-202.
08 《황성신문》 광무 4년(1900, 4, 16)의 「잡보(雜報)」.  대장기는 조선 시대 각 군영의 대장들이 신호용으로 지참했던 것으로 지휘권을 상징한다.
09 최제우 사후에 동학은 최시형 계열과 서장옥 계열로 분열된다. 다시 최시형, 손병희 직계인 북접과 전봉준, 김개남을 지도자로 하는 남접으로 나뉘게 된다. 정권 전복을 원치 않는 북접의 반발과 왕실을 부정하는 남접 내 급진파의 존재 역시 농민군의 내분을 불러왔다. 이에 동학군 남접이 2차 봉기를 준비하자, 북접은 남접 농민군을 공격하려고까지 했다. 또 남접의 김개남은 전봉준과 노선을 달리하여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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