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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6년(2016)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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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광장 : 다산 정약용의 신독(愼獨)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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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신독(愼獨) 공부
 
 
연구위원 최정락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실학(實學)을 집대성한 조선 후기의 학자로서 다양한 분야에 걸쳐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다. 그의 사상체계를 일관하는 것은 ‘지극한 하나여서 둘이 아니며 지극히 존귀하여 짝이 없는’01 상제(上帝)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초월적 존재에 대한 다산의 인식은 그의 세계관을 재구축하는 기반이 되고 있다. 그는 천(天)을 리(理)로 규정하는 성리학(性理學)의 인식을 벗어나 천(天)의 인격신적(人格神的) 성격을 발견함으로써 경전의 천관(天觀)을 재확인하고 있다. 그의 관심은 리를 대신해 세계를 규제하고 질서와 조화를 부여하는 상제님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산의 상제사상(上帝思想)은 천주교의 천주사상(天主思想)을 흡수함으로써 유학 사상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선진유학(先秦儒學)의 천 관념에 그대로 회귀한 것이 아니라 서학(西學)을 수용해서 상제사상을 재발견하여 더욱 풍부하게 하고, 그것을 현실 사회에서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하기 위한 근거로 삼았다.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선진유학과 퇴계학파의 상제 관념에 마테오리치의 천주사상 영향을 받아 전개되고 있다.02
 
 
 

  다산은 상제님에 대한 인간의 기본자세로 두려움인 신독(愼獨)을 강조하고, 또 신독을 수양의 필수조건으로 요구하고 있다. 그는 신독 공부가 상제님을 섬기고 신명(神明)을 두려워함으로써 마음을 공평하고 바르게 지켜가는 길임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상제님은 초월적 신명으로서 인간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알고 있으며 속속들이 감시하는 존재로 확인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제님을 마주 대하는 인간의 감정은 가장 먼저 두려움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 『대학』과 『중용』의 양쪽에 언급되고 있는 ‘신독’의 ‘독(獨)’을 다산은 “군자가 어두운 방 가운데 있을 때도 두려워하여 감히 악(惡)을 행하지 못하는 것은 상제님께서 임하여 계심을 알기 때문이다.”03라고 하여, 홀로 있을 때조차도 상제님께서 내려와 감시하여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자리임을 지적한다.
 
 
하늘의 경고는 형체가 있는 귀와 눈을 통하여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형체가 없이 오묘하게 작용하는 도심(道心)을 통하여 인도하고 가르친다. 이것이 이른바 하늘이 마음을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 인도함을 따르면 천명(天命)을 받드는 것이고, 인도함을 무시하고 어기면 천명(天命)을 어기는 것이다. 어찌 계신(戒愼)하지 않으며 어찌 공구(恐懼)하지 않겠는가?04
 
 
하늘의 영명(靈明)함은 사람의 마음에 바로 통한다. 아무리 은미한 일도 살피고 비추지 않음이 없다. 방안에 임하여 날마다 여기서 감독한다. 사람이 이것을 알기만 한다면 아무리 담대한 사람이라도 계신(戒愼)하고 공구(恐懼)하지 않을 수 없다.05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는 154권 76책으로 다산 정약용의 저술을 총정리한 문집이다.
 
 
  보지 못하는 것을 계신(戒愼)하고, 듣지 못하는 것을 공구(恐懼)한다는 것은 상제님께 대한 계신·공부이다. ‘보지 못하는 것’과 ‘듣지 못하는 것’이 상제님을 가리킬 뿐 아니라 ‘숨어 있는 것’과 ‘은미한 것’도 ‘상제님께서 하시는 일’을 가리킨다.
  다산은 계신·공구와 신독이 동일한 수양의 양면을 지칭하는 것으로 말한다. 계신·공구의 공부와 신독 공부는 동일하게 상제님의 감독과 명령을 두려워하며 삼가는 것이다. 그는 이 두 가지를 동일시하며 상제님에 대한 계신·공구를 신독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옛사람은 진실한 마음으로 하늘을 섬기고 진실한 마음으로 귀신(鬼神)을 섬겨서 하나의 동정(動靜)과 한 생각의 싹틈에도 진실한가 거짓인가 선(善)한가 악(惡)한가를 경계하여 “나날이 이곳을 굽어보시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계신·공구·신독의 공부가 진정으로 절실하고 독실하여 천덕(天德)에 이를 수 있었다. 요즈음 사람들은 하늘을 리(理)라 하고 귀신(鬼神)을 공용(功用)·조화(造化)의 자취·이기(二氣)의 양능(良能)이라고 하여 그들 마음의 앎이 어두워서 귀신(鬼神)이 마치 전혀 지각이 없는 존재처럼 된다. 그러므로 어두운 방에선 마음을 속이고 방자함에 거리낌이 없으니 평생토록 도(道)를 배우더라도 요순(堯舜)의 경지에 함께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모두 귀신(鬼神)의 설(說)에 어두운 점이 있기 때문이다.06
 
 
  다산은 “나날이 이곳을 굽어보시네.”라는 구절을 선악(善惡)의 문제로 귀결시키고 있다. 하나의 생각이 싹터도 그것이 나만 알고 다른 사람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조화(造化)의 주재자(主宰者)도 함께 아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경계하여 “나날이 이곳을 굽어보시네.”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초월적 절대자의 도덕적 감시로 인해 인간이 자기성찰의 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자신을 경계하는 태도다. 여기서 ‘이곳’은 자신의 내면을 말한다. 곧 자신의 삶을 이상적 인격으로 변화시키려는 수양 주체가 의식적으로 내면을 성찰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자기 경계의 자세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신독(愼獨)이란 자신이 혼자 아는 일에 삼가길 다한다는 뜻이지 혼자 처한 곳에서 삼가길 다한다는 말이 아니다. 사람이 매번 자기 방안에 고요히 앉아 묵묵히 자신이 한 일을 생각하면 양심(良心)이 발현된다. 이것이 그 옥루(屋漏)07를 보면서 부끄럽고 후회하는 마음을 내는 까닭이니, 옥루가 임한 곳에서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 요즈음 사람은 신독이란 두 글자를 인식하는 것이 원래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그는 암실(暗室)에서 혹 옷깃을 여미고 조심스레 앉아 있다가도, 매번 다른 사람과 접촉하는 곳에 이르러서는 속임수와 거짓된 행위를 하면서도 “남들은 모른다.”거나 “하늘은 듣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신독이 어찌 이와 같겠는가?08
 
 
  다산에게 신독은 홀로 거처하는 은밀한 공간에서 삼감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 아는 내면 공간 곧 마음에서 삼감을 다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 마음에 대한 수양 주체의 자기반성이다. 집안의 가장 외진 곳[屋漏]을 보기만 해도 부끄럽고 후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자기반성의 과정에서 양심(良心)이 저절로 발현되기 때문이다. 원래 옥루는 신과 소통하는 신성하고 내밀한 공간인데, 그는 그런 공간적 상징을 내면의 양심으로 전환해서 이해하고 있다. 하늘이 어떤 인격신의 형상으로 인간 앞에 현현해서 감시하고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특히 인간의 악(惡)을 행하는 것이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자리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그러한 일상의 관계가 일어나는 구체적인 자리에 더욱 신독이 강조되고 있다.09
 
 
군자는 삼가고 두려워하면서 항상 신독의 공부를 한다. 그래서 마음을 두는 데 감히 중정(中正)하지 않을 수 없고 일을 처리하는 데 감히 화평(和平)하지 않을 수 없으며, 때에 따라 중(中)을 얻어 중(中)하지 않은 때가 없다. 소인(小人)은 천명(天命)을 알지 못하기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을 두는 것은 치우치거나 막히고, 일을 처리하는 것은 지나치거나 어그러지며, 방자해서 하지 않는 짓이 없다. 이것을 일러 “거리낌이 없다.”고 한다.10
 
 
  계신·공구의 신독 수양은 마음을 두거나 일을 할 때도 천명에 비추어 어긋남이 없도록 하는 힘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일상의 모든 자리에서 유지되어야 한다. 소인(小人)은 천명(天命)을 알지 못해서 두려워하지 않는다. 인간의 근원적 가치인 천명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이탈하여 마음과 일에서 어긋나면서도 거리낌이 없다.
  다산은 항상 신독함으로써 하늘을 알고 섬기는 자세를 갖는다. 하늘을 안다는 것은 이 세상에 상제님의 윤리적 감시와 평가가 존재함을 아는 것이다. 신독 공부 역시 상제님께서 인간 곁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그래서 다산은 상제님께서 계신다는 것을 앎으로써 신독의 공경스러운 자세를 취할 수 있고, 신독함으로써 지극히 정성스러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11 다산에게는 하늘을 섬기는 삶과 인간의 삶이 분리될 수 없다.12 하늘을 섬긴다는 것은 현실 생활에서 선(善)을 실천하며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늘을 섬기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늘이 사람의 삶을 내려다보는 마음자리에서의 삼감, 즉 신독을 통해 가능하며, 이러한 신독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정성[誠]이다.13
  다산에게는 천에 대한 인식이 윤리의 전제가 되어, 윤리의 실천을 통하여 하늘을 섬기는 삶이 완성된다고 하겠다. 곧 다산에게 있어서는 현실 세계에서의 인륜의 진정한 실천이 곧 하늘을 섬기는 삶이 된다. 신독은 상제님을 섬기고 마음을 바르게 지켜가는 것으로 상제님 전에 홀로 서 있는 인간 존재의 상황을 각성하게 한다. 다산에게 있어서는 현실 세계에서의 인륜의 진정한 실천이 곧 종교적 의미를 지닌 삶이 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정약용, 『여유당전서』, 『한국문집총간』, 서울: 민족문화추진회, 2002.
·금장태, 『귀신과 제사: 유교의 종교적 세계』, 서울: 제이앤씨, 2009.
·김영일, 『정약용의 상제사상』, 서울: 경인문화사, 2003.
·금장태, 「다산의 사천학과 서학수용」, 『철학사상』 16, 2003.
·백민정, 「정약용 수양론의 내적 일관성에 관한 연구: 愼獨, 至誠, 執中, 忠恕, 人心道心論을 중심으로」,
             『퇴계학논집』 122, 2007.
·이광호, 「동서 융합의 측면에서 본 정약용의 사상」, 예문동양사상연구원·박홍식 편저, 『다산 정약용』,
             서울: 예문서원, 2005.
·임부연, 「정약용의 수양론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4.
 
 

01 『상서고훈(尙書古訓)』 권6, “皇天上帝, 至一而無二, 至尊而無匹.” 다산이 설명하는 상제는 절대의 주재자이다. 이 글에서는 상제를 상제님으로 표기한다.
02 김영일, 『정약용의 상제사상』(서울: 경인문화사, 2003), p.8 참조.
03 『중용자잠(中庸自箴)』 권1, “君子處暗室之中, 戰戰栗栗, 不敢爲惡, 知其有上帝臨女也.”
04 『중용자잠』 권1, “天之儆告, 亦不由有形之耳目. 而每從無形妙用之道心, 誘之誨之. 此所謂天誘其衷也. 順其誘而從之, 奉天命者也, 慢其誘而違之, 逆天命者也. 曷不戒愼, 曷不恐懼?”
05 『중용자잠』 권1, “天之靈明, 直通人心. 無隱不察, 無微不燭. 照臨此室, 日監在茲. 人苟知此, 雖有大膽者, 不能不戒愼·恐懼矣.”
06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 권1, “古人實心事天, 實心事神, 一動一靜, 一念之萌, 或誠或僞, 或善或惡, 戒之曰: ‘日監在茲.’ 故其戒愼·恐懼愼獨之功, 眞切篤實, 以達天德. 今人以天爲理, 以鬼神爲功用, 爲造化之跡, 爲二氣之良能, 心之知之杳杳冥冥, 一似無知覺者然. 暗室欺心, 肆無忌憚, 終身學道, 而不可與入堯舜之域, 皆於鬼神之說, 有所不明故也.”
07 옥루는 집안에서 가장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을 뜻한다.
08 『심경밀험(心經密驗)』, “原來愼獨云者, 謂致愼乎己所獨知之事, 非謂致愼乎己所獨處之地也. 人每靜坐其室, 默念自己所爲, 油然良心發見. 此所以瞻其屋漏, 而發其愧悔, 非謂屋漏所臨之地, 毋敢行惡也. … 今人, 認愼獨二字, 原不淸楚. 故其在暗室, 或能整襟危坐, 而每到與人相接之處, 施之以鄙詐險詖, 謂人罔覺, 謂天罔聞, 所謂愼獨, 豈如是乎?”
09 임부연, 「정약용의 수양론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4), pp.102~104 참조.
10 『중용자잠』 권1, “君子戒愼·恐懼, 常行愼獨之工. 故處心不敢不中正, 處事不敢不和平, 隨時得中, 無時不中. 小人不知天命而不畏也. 故處心或偏或陂, 處事或過或差, 橫恣放肆, 無所不爲. 斯之謂‘無忌憚’也.”
11 백민정, 「정약용 수양론의 내적 일관성에 관한 연구: 愼獨, 至誠, 執中, 忠恕, 人心道心論을 중심으로」, 『퇴계학논집』 122 (2007), pp.220~221 참조.
12 이러한 내용은 퇴계에서도 찾을 수 있다. 『퇴계집(退溪集)』 권6,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君之於天, 猶子之於親. … 伏願殿下推事親之心, 以盡事天之道, 無事而不修省, 無時而不恐懼(임금이 하늘을 대함은 자식이 부모를 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 원컨대 임금께서는 부모를 섬기는 마음을 미루어 하늘을 섬기는 도리를 다하여, 무슨 일에나 수양하고 성찰하지 않음이 없으며, 어느 때에나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어야 합니다).” 퇴계는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의 가족적 관계로 인식하고, 부모를 섬기는 사친(事親)의 마음을 미루어 하늘을 섬기는 사천(事天)의 도리를 행할 수 있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13 이광호, 「동서 융합의 측면에서 본 정약용의 사상」, 예문동양사상연구원·박홍식 편저, 『다산 정약용』 (서울: 예문서원, 2005), pp.195~19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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