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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6년(2016)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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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광장 : 수저(匙箸)를 놓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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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저(匙箸)를 놓아보자!
 
 

연구위원 백경언

 
 
 
  “천천히 먹어야 소화가 잘 된다.”, “잘 씹어 넘겨야 속이 편하다.”, “빨리 먹으면 위암에 걸릴 위험이 있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먹는 문제를 말하기 시작했다. ‘무엇을 먹느냐’가 아닌 ‘어떻게 먹느냐’의 문제를 말이다. 먹을 것이 없어서 허연 버짐을 얼굴에 달고 다니던 시절에 없었던 이런 현상은, 우리 민족의 애환과 환희, 그리고 오늘날의 염려를 담고 있어 역사적이며 사회적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음식을 한입 넣은 다음 수저를 놓고 천천히 씹어보자는 이 글은 어쩌면 도를 닦는 도인들에게 참으로 우스운 단편일 것이다. 하지만 작은 것에도 도(道)가 있는 법,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이 글을 작성하게 되었다. 
  먹는 것을 생각하면 몇 년 전 경험이 떠올라 지금도 웃음이 나는 일이 하나 있다. 어떤 공사를 끝내고 저녁식사를 위해 먼 식당을 찾아갔던 일이다. 솔잎국수를 하는 집이라는데 두 시간 동안 차를 타고 산으로 들어가야 했다. 가다보니 대포를 숨겨둔 군부대도 어둠 속에 나타났다. 우리는 농담으로 “이거 북한으로 넘어가는 길 아니냐?”며 웃었다. 목욕을 한 터라 몸은 노곤했지만 진미(珍味)를 맛보게 해준다는 인솔자의 말에 차에 올랐던 것이다. 겨우 도착한 일행은 차에서 내려 지친 몸을 이끌고 숲속 식당으로 걸어 들어갔다. 언제 도착할지 몰라 이제야 준비한다는 국수는 그 후 30분이 지나서야 허연 김을 뿜으며 상에 놓여졌다. 허기진 우리가 솔잎향기를 음미할 시간도 없이 두 그릇을 먹어치우는 데는 2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지금도 생각해보면 그 특별한 음식과의 만남에 대한 기억은 없고 어두운 저녁과 숲속의 위장막, 그리고 대포만이 떠오를 뿐이다.
  데리고 간 사람의 성의는 고맙지만 돌아오는 2시간은 또 참으로 긴 시간이었다. 실상 먹는 일만으로 보자면 4시간의 이동, 숲속의 분위기 있는 식당, 친절한 주인까지도 모두 부수적인 사항이다. 이들은 음식이 내 입으로 들어오기까지 도움을 주는 조건들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조건들을 마련하기 위해 참으로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한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런 조건들이 아니라 음식과 나와의 만남이다. 아무리 좋은 중매쟁이와 혼사조건이라도 결국 혼인은 남녀 당사자의 만남에 방점(傍點)이 있는 일이 아닌가? 
  글을 쓰다 보니 “식불언(食不言) 침불언(寢不言)”이라 하셨는데 먹는 것에 대해 말이 길어지는 느낌이다. 그러나 공자(孔子)가 말한 식불어(食不語)는 밥 먹을 때 대답을 하노라면 딴 데 마음을 두다가 음식이 기도(氣道)로 들어갈 수 있으니 삼가라는 것이었고,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식불언(食不言)은 밥을 먹는 자리가 남의 누행(陋行)을 말하는 시간이 되기 쉬우니 삼가라는 의미였다고 본다. 밥 먹는 것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먹는 일은 삶과 관계된 어쩌면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다. 게다가 ‘어떤 음식’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먹느냐’의 문제라면 이는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일이다. 음식의 종류가 아니고 먹는 방법이라는 차원에서 어쩌면 우리는 지상에서 공평한 삶의 기회를 가지고 말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음식을 대면하는 것은 시각(視覺)이 아니다. 혹자는 가장 먼저 음식에 다가가는 시각과 대상물의 관계를 중히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에 들어온다고 뷔페식당에 놓인 음식물이 모두 나와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다. 나와 음식물과의 진정한 관계 맺음은 입속에서 일어나는 저작과정을 통해서이다. 그런데 우리는 ‘꼭꼭 씹어 먹기’라는 진정한 관계 맺음보다 ‘음식물 집어넣기’라는 절차만을 무의식적으로 계속하는 경우가 많다.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든 경우는 더할 것도 없지만 숟가락과 젓가락을 번갈아 잡아 손에서 놓지 않고 있을 때도 역시 그렇다. 그런데 이것이 뭔가를 쥐고 있어야 하는 현대인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참으로 부지런한 모습이다. 대부분의 경우, 식사하는 모습들을 보면 수저를 한시도 놓지 않고 항상 둘 중 하나를 들고 있다. 수저를 모두 놓고 음식물을 씹고 있는 사람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밥 먹는 중에 수저를 계속 잡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날 “10분 내에 식사하는 사람은 90% 정도가 위암 발병 가능성이 있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밥을 빨리 먹는 이유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천천히 먹으려고 해도 결국은 10분 안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유가 손에 계속 들고 있는 수저 때문이라는 발견은 중요한 것이 될 수 있다.
  이왕 수저 이야기가 나왔으니 좀 더 나가보겠다. 먹는 자리에서 술병을 잡고 “병권(兵權)을 잡았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묘(妙)하지만 정치판이 그려지는 용어이다. “금수저 은수저를 입에 물고 나왔다.”란 말도 있다. 재산 있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을 말한다. 여기에 최근에는 흙수저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른바 수저계급론이다. 그러니 수저를 잡았다는 것은, 어느덧 삶의 현장이고 긴장된 사회의 축소판이다. 이러한 이유로 식사시간은 자신의 몸을 위해 음식을 보충하는 자리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먹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웃고 떠드는 자리에서 남들 다 쥐어 보는 병권도 못 쥐어 본 손에, 놓을 수 없고, 놓칠 수 없는 소시민의 권리가 식권(食權)이다. 이것이 꼭 쥔 수저이지 않을까?
  수저란 숟가락과 젓가락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이 수저를 꼭 쥐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쥐고 있는 경우를 포함해서 자신을 더 초라하게 하고, 마침내는 죽음으로까지 이끈다면 어쩔 것인가? 우리는 수저를 들고 있는 한 음식을 집어 들게 되어있다. 관조(觀照)의 시간은 없고 선택하고 포착하는 동작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입속에서 음식물이 저작되는 도중에도 다시 뭔가를 집어넣는다. 반쯤 씹혔을까 입속 음식물은 수저가 날라 온 다른 음식물과 같이 또 반쯤 씹히다가 넘어간다. 밀어 넣으니 다만 넘어가는 것이다. 나머지 소화의 몫은 단지 연동운동만 하는 장(腸)과 소화액에게 넘겨진다. 운동량이 적은 현대인들이 이러한 식사 후에 겪을 일은 더부룩함과 소화불량이다. 이러한 보편적 현상은 제약회사에게 무한한 시장을 제공한다.
  ‘개구리 왕눈이’와 ‘스폰지 밥’이라는 아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에서 욕심 많은 존재들은 대부분 게나 가제 등으로 커다란 집게발을 소유한 자이다. 이때 집게는 현대인의 끊임없는 탐욕의 상징으로 돈과 권력을 챙기는 도구이다. 우리에게 수저는 먹고사는 문제와 관련하여 이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잡고 있으면 뭔가를 계속 집어 든다는 면에서 양자는 비슷한 속성을 지닌다. 그런데 이러한 멈추지 않는 수저질은 단지 손에서 수저를 놓음으로써 바꿀 수 있는 습관이다. 이제, 음식물을 한입 넣었으면 모두 잘 씹혀 넘어가기 전까지 수저를 식기에 가만히 놓아보자. 단지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것만으로 나와 음식은 편안히 조우(遭遇)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본래의 빈손으로 사랑하는 자식의 등도 만져보자. 조용한 호흡으로 음식과 만나는 시간은 무엇보다 소중한 삶의 의미를 느끼게 한다.
  이로써 자연의 인간으로 돌아가서 온전히 천지의 은혜를 흠향하며 기운을 모시는 것이다. 식사를 통해 매순간 소중한 자신을 재충전한다는 의미에서 이는 개인의 성(聖)스러운 시간이 된다. 어쩌면 한술의 음식을 입에 넣고 수저를 식기에 올려 멈추는 것은 나를 위한 의례(儀禮)가 될 수 있다. 생명의 보존과 지속을 위해 천지가 주신 사랑을 구체적인 음식물을 통해 받는 경이로운 시간이기 때문이다. 습관의 변화로 찾을 수 있는 것은 병상에서 보내야 될 시간만이 아니다. 음식에 대한 소중함, 음식을 만든 사람의 정성,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에 대한 감사함, 음식을 길러준 천지의 은혜도 새삼 느낄 수 있게 된다. 이로써 음식이 곡기(穀氣)를 제공하면, 이 또한 음양합덕(陰陽合德)의 덕이 아닐 수 없다. 천지가 준 기운을 헛되이 잃지 않고 내 몸에 모시니, 한 낱곡식도 기억하시는 하늘도 좋아하실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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