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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14년(1984)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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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 大巡과 그 役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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巡과 그 役事


上帝의 大巡은 상극을 相生으로
天地公事로 세계는 聖化


張 秉 吉 <서울대 교수>

 

  대순 신앙은 재겁(災劫)에 쌓인 이 세계를 구제하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셔서 두루 세상을 살피시고, 인류에게 재겁으로부터 구원될 길을 열어 놓으신 후에 다시 하늘에로 되돌아가신 상제를 신앙의 대상으로 한다. 하늘에서 하늘세계를 살피시고 성신(聖身)으로서 땅에 오셔서 세게를 살피신 후에 현신으로서 조선국에 이르셨으니, 삼계(천·지·인)를 두루 다니신 것이다. 이것을 대순이라고 일컫는다. 상제께서 대순하셨다는 신앙은 일찍이 인류가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이 대순신앙은 사회의 현실성과 종교신앙의 대상세계의 현실성을 낱낱이 들추면서 인류가 간절히 갈망하는 이상과 현실생활에서 필요한 식별의 척도, 선악의 척도, 정사(正邪)의 척도를 인류에게 제공했다. 대순신앙에서는 신명이나 성현들은 신앙상의 자리에서 그다지 높은 자리에 오르지 않는다. 한 예를 전경에서 인용하면 「상제께서 어느날 종도들에게 내가 이 공사를 맡고자 함이 아니니라. 천지신명이 모여 상제가 아니면 천지를 바로 잡을 수 없다 하므로 괴롭기 한량 없으나 어찌 할 수 없이 맡게 되였노라」(전경·공사 제1장9)라고 되어 있는데 천지신명들도 상제의 힘을 빌지 않고는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 바로 그 실증이다.

  또 성인이나 현인(賢人)으로 존경을 받는 분들도 「원시의 모든 신·성과 불과 보살이 회집하여 인류와 신명계의 겁액을 구천에 하소연하므로…」(전경·교운 제1장9)라고 전경이 기록하고 있듯이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신명계나 선현들의 요청에 따라서 인간을 구원할 전단계로 대순(大巡)이라는 상제의 삼계대순에는 시간상의 제 시점이 있다.

① 구천에 머물고 계셨던 때,

② 신명계를 대순하신 때,

③ 인간계를 대순하신 때, 

④ 성신(聖身)을 나타내셔서

조선국을 주유하신 때로 분간할 수가 있다. 이 네 기간중 주유하신 기간외에는 상제께서 몸을 감추시고 대순하셨기에 인간들은 상제를 직접 볼 수가 없었다. 구천에서 신명계를 거쳐 다시 인간 세계에로 하강하셔서 은신으로 대순하신 기간이 있고 동토에서 30년간 체류하신 기간이었다. 그리고 현신하시고 조선국에 39년간 머무신 기간이 있다. 그런데 몸을 나타내셔서 39년간 동토 조선국에 체류하시게 된 것은 ① 서양에서의 대순과 ② 동토에서의 대순에서 사람을 택하여 세상인류를 구원할 제세대도(濟世大道)를 맡기셨다.

  그러나 그 선택된 사람들이 대도의 참뜻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고, 몸을 감추신 대순은 신명 보살들의 요청을 받고, 신명계와 인간계를 살피시는데에 그 뜻이 있었다. 그 뜻은 제세대도의 「기획」을 세우시기 위함이다.
  이 같은 신앙은 단군신화속에 담긴 이야기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한인이 땅을 내려다 보고 인간을 구제할만한 때가 되었음을 알고 아들 한웅을 땅으로 내려보냈다. 이 설화구조를 거꾸로 뒤집어 생각하면 요청에 따라 하강하는 구조가 된다. 그런데 단군 신앙에서는 어디까지나 하늘에 있는 한인이 직접 내려오지 않고 아들이란 대지라를 내려보내는데 반해서 대순신앙에 있어서는 구천의 자리에 계시는 상제가 「직접」내려오셨고, 성신(聖身)을 현신(顯身)하셔서 어디까지나 하늘의 권능을 쓰신 것이 다르다.

  이에 대해서 단군신앙에서는 하늘의 아들이 한웅이 사람으로 변신하고 인간의 여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 그 아들(단군)이 세상을 구원하는 길을 열어 놓는다. 두 신앙은 구원이란 대도(大道)를 바라면서 비슷하나 차이를 보여준다. 즉 단군신앙에서는 「대순」이란 전제가 없음은 물론이고, 상제와 같이 홀로 계시지 않고 부-자-손이란 세 사람의 체계가 있다.
  대순은 일반종교에서 보여주는 수도상의 순례(巡禮)나, 수도자의 주유(周遊) 같은 의미가 아니고, 일반적으로 말하면 하느님(여기에서는 상제)의 구원섭리의 일부인 것이다. 여기서 그 특징을 밝히고자 한다. 대순은 새로운 시간을 마련하였다. 즉 후천이란 시간이다. 대순이 있기 전의 시간과 대순이 시작된 시간은 시간상으로 세계를 둘로 갈라 세웠다.

  전자의 시간은 하늘적인 질서와 조화가 깨어진 시간이고, 멸망에 이르는 시간이며, 인간들이 제멋대로 물건들을 만들어 삶을 지속하는 역사가 시작한 시간이다. 이에 대해서 후자의 시간은 우주적 질서가 유지된 세계를 세운 때이다. 그러나 이 두 시간은 인간의 눈에는 하나의 시간의 연속으로 생각되어지고 있다. 이것을 비유하면 우리들에게는 어제의 태양이 오늘의 태양과 같이 보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지하실에서 갑자기 밖에 나왔을때나 혹은 오랫동안 투병생활로부터 해방되어, 병실에서 한 발짝 밖에 나오자 대낮의 태양의 빛을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이와 같이 대순은 이 세상의 시간을 새롭게 하였다.
  대순이 있기 전의 병실의 실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선천시대의 인간계는 사람들이 일대혼란에 부딪히고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써든지 극복하려고 계속하는 동안에 괴로운 투쟁과 혼란의 극복을 되풀이 하면서 본래의 밝은 세계의 회복을 번갈아 겪었으며, 또 겪고 있다. 그런데 그 극복에서 본 궤도와는 다른 계통과 관계하므로써 세계의 회복은 이룩되는데, 예를 들자면 환경이 나쁘고 먹을 것을 얻기 쉽지 않은 집단은, 환경이 좋아 식물을 얻기가 쉽고 많은 사람을 부양할 수 있는 집단과 결합하여 자신을 극복하고 회복한다. 이래서 큰 집단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결합으로써 사회가 형성되었고 또 형성되는데 그 형성에서 상호의존의 욕망이 절대로 필요하게 된다. 상호의존하려는 서로의 욕망은 자연스러운 가족사회를 극복하고 집단사회를 형성하는 원리가 된다.

  그 집단사회가 형성되는데에 선천적으로 풍족한 환경과 자유로운 경험, 그리고 후천적으로 나쁜 환경에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힘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풍족한 환경의 사회와 나쁜 환경의 사회가 충돌하여 결합하므로써 보다 큰 집단사회가 이룩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가족이건 집단이건간에 그 형성에는 보존과 지배의 두 관계가 전제된다. 가족사회에서 자식들이 양친에 의존하면서 결합하는 것은 자신들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고, 한 집단의 다른 집단과의 결합에서는 지배관계가 형성된다. 이 지배관계는 사람과 사람의 옆의 관계를 종(縱)으로 세운 관계이다. 이 지배관계의 사회는 다른 계통의 집단과의 관계이나 거기에는 대립 충돌 합일(合一)이란 과정을 더듬어 나가게 된다.

  그러나 같은 한가닥 집단 안에서의 관계는 위·아래의 관계일지라도 대립이 아니라 주족(主從)이 떨어질 수 없는 밀착한 관계이다.

  그래서 문제는 두개의 다른계통의 집단사이에서 대립하는 양자의 충돌로부터 양자의 동거(同居)에 옮겨가는 것과 옆의 관계에서 생기는 충돌이 종적관계에서의 보존에로 옮겨가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 두 이행(移行)에서의 합일(合一)이 문제이다. 이 문제는 대순신앙에 있어서 상생(相生)이다. 상생이 이룩되기 위해서 대순이란 행적이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대순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하느님이 없는 악한 사회상태속에 하느님의 내림(來臨) 즉 상제(上帝)의 강림을 말한다. 그 강림에서 사람은 나쁜환경의 사회상태로부터 해방되고, 그 이전의 판단을 중단한다. 선천의 현 체제속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사회는 악화한다.
  그 상황에 강림하므로써 악화는 극복되고 극복된 사회상태의 극치가 바로 선경(仙境)이다. 그런데 그 선경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개인의 구원만이 아니다. 사회전체의 광구(廣救)된 사회를 말한다. 말하자면 대순은 먼 곳에서의 상제의 강림이니, 상제께서는 먼곳에서 오셔서 상제가 계시지 않는 상태에서의 노예성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사람들을 괴롭혀 온 신명들의 조롱성을 풀어 없애버리고 자유롭게 하셨다. 그러므로 상제께서의 대순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으로 사념(思念)한 것이 아니라 구제론적(救濟論的) 으로 대망된 것이다. 만일에 이 상제께서 행하신 구제적(救濟的)인 대순이 없었다면 사람들의 자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 자유야 말로 세계를 상생화(相生化)하고 역사화한 것이다. 역사적 세계관은 최초부터 사람들을 광구하는 의식이며, 역사는 본래 인간들을 구제하는 역사로서 성립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상제의 대순을 주축으로 인류와 세계의 구조는 크게 전환되었다. 사람들은 자유를 자각하고 세계를 창조 즉 역사화하게 된다. 그래서 세계의 역사는 상제께서 활동(公事)하시는 무대가 된다. 사람은 진실로 상제와 상관하므로써 자유롭게 되고, 영원불변의 세계의 일부분으로서 땅속에 묻히지 않고 거기서 빠져서(存한다) 세계를 등에 지고 상제와 직면한다.

  인간이 「자유」이고 세계가 상제의 활동장 즉 「역사」라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인식이다. 우리는 오늘날 자유화와 역사화에 휘말려 있다고 전제하고 그 만큼 상제에로 접근하고 있다고 믿는다.
  상제의 대순은 인간의 자유와 세계의 역사가 이루워 지려면 인간이나 세계의 내부에서는 불가능하고 오로지 외부로부터 설득당하므로써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것은 앞에서 인용된 바 있는 전경의 구절, 「모든 신 성과 불과 보살이 회집하여 인류와 신명계의 겁액을 구천에 하소연하므로…」와 같이 알려주듯이 지상의 성현인(聖賢人)들의 지혜로써는 자유와 역사가 불가능함을 말해준다. 오늘날 지상에서 부르짖고 있는 자유니 역사니 하는 것은 상징적으로 말해서 대순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역사적 세계관의 근거에서 대순의 공사(公事)를 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인류의 일(思想)의 시초에 대순의 의도, 즉 세계재건(世界再建)이란 기획(企劃)을 찾아야 하는 것이니 그 발견없이는 인간해방이 있을 수가 없다. 거기에는 다만 기계문명에 억눌린 또는 강자(强者)에 억압된 눌린자로서의 인간이 있을 뿐이다. 상제께서 구천(九天)의 자리를 떠나서 대순하고 공사(公事)하셨다는 그것 자체가 세계를 역사화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 공사가 중요하며, 그 공사로 인해서 세계는 성화(聖化)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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