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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4년(1994)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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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 신명의 생애 : 마성(馬成)神明 열전

亢 별을 관장하는

 

마성(馬成)神明 열전

 

왕명을 받아 정벌의 공을 세움, 변방을 수호 민생보호

     

                       

  마성(馬成)은 자(字)가 군천(君遷)이고 남양군(南陽郡) 극양현(棘陽懸) 사람이다. 젊어서 현리(懸吏)를 지냈다. 세조(世祖)가 영천(潁川)을 순행(洵行)할 때 마성을 안집연(安集椽)으로 삼았다가 다시 겹의 현령으로 다스리게 하였다. 세조가 하북(河北)을 토벌할 때 마성은 곧 관직을 버리고 포졸로 따라 나서서 포양(蒲陽)까지 쫓아갔는데 왕은 마성을 기문(期門)으로 삼아 정벌에 따라다니게 하였다.
  건무(建武) 4년 양무장군(揚武將軍)으로 배수하고 주로장군(誅擄將軍) 유륭(劉隆), 진위장군(振威將軍) 송등(宋登), 사성교위(射聲校尉) 왕상 등을 이끌고 회계 단양(丹陽), 구강(九江), 육안(六安)의 4개 군의 병사들을 징발하여 이헌(李憲)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때는 왕이 수춘(壽春)에 행차 하여 제단을 쌓고 예(禮)에 따라 그에게 장군을 배수하고 파견한 것이었다. 나아가 서(舒)에서 이헌을 포위하고 각 군대로 하여금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도록 하였다. 이헌이 여러 번 도전하였으나 마성은 멱을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았다. 1년여를 지키다가 건무 6년 봄, 성중에 식량이 떨어진 때를 이용해 그곳을 공격하여 마침내 서(舒)를 평정하고 이헌의 목을 베고 그 나머지 무리들을 추격하여 강회(江淮) 땅을 모두 평정시켰다.
  건무 7년 여름에 왕은 마성을 평서후로 봉했다.

  건무 8년, 왕을 따라 정벌 나가 외효를 깨뜨린 공으로 천수(天水) 태수로 정해지고 전처럼 군대를 거느리게 되었다. 겨울에 부름을 받고 장안(長安)으로 돌아왔다.

  건무 9년, 래합을 대신하여 중랑장(中郞將)이 되어 무위장군(武威將軍) 유상(劉尙) 등을 인솔하고 정벌 가서 하지(河池)를 깨뜨리고 무도(武都)를 평정하였다. 그 다음해 대사공(大司空)이 이통(李通)이 파면 당하여 마성이 대사공의 일을 하였는데 훌륭하게 그 일을 맡아보아서 정말 대사공 같았다. 몇 개월 후에 다시 양무장군(揚武將軍)으로 배수받았다.
  건무 14년 성산(常山), 중산(中山)에 주둔하여 북쪽 변방을 지켰다. 아울러 마성은 건의대장군(建義大將軍) 주우를 거느리고 주둔하였다. 또한 표기대장군 두무(杜茂)를 대신하여 장벽과 요새를 보수하였으며 서하(西河)에서 위교(渭橋)까지, 태원(太原)에서 천경까지, 중산(中山)에서 업까지 모두 보루와 성벽을 쌓고 봉화대를 세웠으며 십리에 하나씩 정찰소를 두었다. 일을 맡아 본지 5∼6년이 되어 왕은 마성의 수고로움을 헤아려서 경사로 불러서 돌아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많은 변방 사람들이 다시 마성을 파견해서 주둔케 해주십사고 요구하는 서를 올렸다. 남쪽으로 홀로 내려가 요새(要塞)를 막아 지켜서 북방(北方)에는 사고가 없었다. 왕은 마성(馬成)을 중산의 태수로 배수하여 장군 인수(印綬)는 올리게 하였다. 여전히 병사를 이끌고 주둔케 하였다.

  건무 24년 남쪽으로 무계만(武谿蠻)의 적을 공격하였으나 공을 세우지 못하여 태수의 인수(印綬)를 바쳤다.

  건무 27년 마성을 전초후(全椒侯)로 정하여 봉하여 주니 자신의 식읍으로 나아갔다. 건무 32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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