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별 보기
   daesoon.org  
대순127년(1997) 1월

이전호 다음호

 

회보 1면 대순지침 상제님의 일대기 정축년 신년사 수기 청계탑 28수 신명의 생애 24절후 신명의 생애 금강산 이야기 종단소식 대순칼럼 신선ㆍ도인 이야기 전경속 지명을 찾아서 전경속 역사인물 소개 고사 한마디 알립니다

28수 신명의 생애 : 두무(杜茂) 神明열전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두무(杜茂) 神明열전

              

 

                   

  두무(杜茂)는 자(字)가 제공(諸公)이고 남양군(南陽郡) 관군현(冠軍縣) 사람이다. 애초에는 하북(河北)에서 광무제(光武帝)에게 귀의하여 중견장군(中堅將軍)이 되어 항상 왕을 따라 정벌 다녔다. 세조가 즉위한 후 대장군(大將軍)을 배수받고 낙향후(樂鄕候)로 봉해졌다. 북쪽으로 오교(五校)를 진정(眞定)에서 공격하고 나아가 광평(廣平)을 평정하였다.
  건무(建武) 2년, 다시 고경후(苦陘侯)로 봉해졌다. 중랑장(中朗將) 왕량(王梁)과 함께 오교의 적들을 위군(魏郡)·청하(淸河)·동군(東郡)에서 공격하여 여러 군영과 보루를 함락하고 지절대장(持節大將) 30여명을 항복시키니 세 개 군이 고요해져서 길이 소통되었다. 그 다음해, 사신을 보내 두무를 표기대장군으로 배수하여 패군(沛郡)을 공격케 하니 망현(芒縣)을 점령하였다. 그 때 서방에서 반란이 일어나 교강(佼彊)을 맞아들였다. 건무 5년 봄, 두무는 포로장군(捕虜將軍) 마무(馬武)를 이끌고 서방을 진공(進攻)하여 수개월 만에 그곳을 함락시키니 교강이 동헌(董憲)에게로 도망갔다.
  동쪽이 평정되자 왕은 건무 7년 두무를 불러 병사를 이끌고 진양(晋陽), 광무(廣武)로 가서 주둔하면서 호(胡)의 도적들을 막으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건무 9년 두무는 안문(鴈門)의 태수인 곽량(郭凉)과 함께 노방(盧芳)의 장수 윤유(尹由)를 번치(繁畤)에서 공격하였는데 노방의 장수 가람(賈覽)이 호(胡)의 기병 만여 명을 이끌고 윤유를 구원하러 왔다. 두무가 나와 싸웠으나 패하여 병사를 이끌고 루번성(褸煩城)으로 후퇴하였다. 당시에 노방은 고루(高柳)를 근거지로 삼아 흉노(匈奴)의 병사와 연합하여 변방의 백성들을 여러 차례 노략질하니 왕이 그것을 근심하였다. 건무 12년 왕은 알자(謁者) 단충(段忠)을 보내 여러 군의 죄수들을 이끌고 가서 두무에게 배속케 하여 북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두무는 변방의 사졸을 징발하여 초소를 짓고 봉화(烽火)를 만들었으며 재화·비단·솜옷 등을 모아서 군사들에게 공급하고 병방의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니 감사하는 인파가 끊이질 않았다. 두무는 또한 둔전(屯田)을 세워 수레로 식량을 운반, 공급하였다.
  그보다 앞서 안문(鴈門) 사람인 가단(賈丹)·곽광(藿匡)·해승(解勝) 등이 윤유에게 침략 당했었는데 윤유는 그들을 장수로 삼아 함께 평성(平城)을 수비하였다. 가단 등은 윤유의 왕인 노방(蘆芳)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함께 윤유를 죽여서 곽량(郭凉)에게 나아갔다. 곽량이 그 사실을 상주하자 왕은 그들을 모두 열후로 봉해주고 군수물자, 비단, 옷감을 두무와 곽량의 군대 및 평성(平城)의 항복한 백성에게 하사토록 명령하였다. 이로부터 노방의 성읍들이 점점 항복해 오고 곽량이 순씨(郇氏)에게 아부했던 족속들을 주살하여 힘없는 백성들을「위로한지」한 달여 만에 안문은 평화로워지고 노방은 드디어 흉노(匈奴)에게 도망갔다. 왕은 곽량의 아들을 발탁하여 중랑(中郞)으로 삼고 자신의 곁에서 보위(保衛)토록 하였다.

  건무 13년 왕은 두무의 식읍을 늘려주고 수후(修侯)로 다시 봉해 주었다. 건무 15년 두무는 참거향후(參遽鄕侯)로 정하여 봉해졌다. 건무 19년에 죽었다. <끝>

 

 

 

관련글 더보기 인쇄 다음페이지

Copyright (C) 2009 DAESOONJINRIHOE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강천로 882 대순진리회 교무부 tel : 031-887-9301 mail : gyomubu@daeso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