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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7년(2007)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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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소개 : 위(胃) 별을 관장하는 좨준(祭遵)신명

위(胃) 별을 관장하는 좨준(祭遵)신명

 

 

글 교무부

 

  좨준[祭遵 : ?~33, 자(字)는 제손(第孫)]은 영천(穎川) 영양(穎陽)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경서(經書) 읽기를 좋아하였고,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났지만 거만하지 않고 겸손하였으며 화려한 의복을 싫어하였다. 현(縣)의 관리로 있던 23년에 왕심(王尋) 등을 격파하고 돌아가다가 영양(穎陽)에 잠시 들른 광무제(光武帝)와 첫 만남을 갖게 되었고, 광무제는 이때 그의 용모와 태도를 아껴 문하사(門下史)로 임명하였다. 이후 편장군(偏將軍)이 되어 광무제를 따라 하북지방 평정에 나섰으며, 그 공으로 영양후(穎陽侯)에 봉해지게 되었다.

  26년(건무 2) 봄에는 정로장군(征虜將軍)을 제수 받고 기관(箕關 : 현 왕옥현 동쪽) 지방의 오랑캐를 공격하였다. 적군이 쏜 화살이 좨준의 입에 맞아 피가 흘렀는데, 그래도 뒤로 피신하지 않고 앞에서 계속 독려하였으므로 군사들의 전의(戰意)가 배가(倍加)되어 적을 대파할 수 있었다. 또 만중(蠻中)의 산적 장만(張滿)이라는 자가 험난한 지역에 주둔하면서 사람들을 해치므로 좨준은 식량 보급로를 끊어 이를 소탕하였다.

  28년(건무 4)에는 탁군(涿郡 : 현 하북성 북단)의 태수 장풍(張豊)이 광무제의 사신(使臣)을 잡아 가두고 병사를 일으켜 모반을 일으켰는데, 그는 스스로를 무상대장군(無上大將軍)이라 칭하고 팽총(彭寵)과 연합하여 탁군 일대를 점령하였다. 여러 명의 장수가 같이 출정했으나 좨준의 군대가 가장 먼저 도착하여 장풍을 진압하였고, 다른 장수들은 귀환했지만 광무제의 명(命)을 받은 좨준은 끝까지 남아 팽총까지 섬멸하고 이 지역을 평정하였다.

  30년(건무 6) 봄, 좨준은 건위대장군 경감, 호아대장군 합연, 포로장군 마무, 한충장군 왕상, 효기장군 유흠, 무위장군 유상 등과 함께 촉(蜀) 지방에서 천자(天子)를 자처하던 공손술(公孫述)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이동하였다. 중간 지점인 장안(長安)에 도달하였을 때의 일이다. 공손술이 통치하는 촉(蜀)의 바로 북쪽에 위치한 농서(西 : 현 감숙성 서쪽)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외효()라는 자가 찾아와 광무제에게 화해를 청하였다. 본래 외효는 26년(건무 2)부터 광무제와 우호관계에 있었지만, 29년(건무 5) 공손술을 치라는 광무제의 요청에 갖은 핑계를 다 대면서 이를 회피한데다가 도리어 광무제의 병사들까지 공격하였으므로 적대관계로 돌변하였던 것이다. 외효는 나름대로 가까이 있는 공손술을 택하는 편이 유리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리하였을 테지만, 이제 광무제의 병사가 자신의 근거지인 농서로 쳐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광무제의 노기를 누그러뜨려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광무제는 여러 장군들을 불러 의향을 물었는데 모두들 화해를 받아들이자고 했으나, 좨준만은 “외효는 간사한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 병사의 사기(士氣)를 억누르고 그에게 시간을 벌어 준다면, 사기(詐欺)와 모략(謀略)은 더욱 깊어지고 촉(蜀)의 경비도 더욱 갖추어질 것이니 지금 진격하느니만 못합니다.”라고 광무제를 설득하여 선봉에 서서 여러 차례 외효를 꺾었다.

  32년(건무 8) 가을, 좨준은 농서(隴西)로 진격하여 외효를 깨뜨렸으며 광무제는 좨준의 진영에 들러 병사들을 위로하여 잔치를 베푸니, 춤추고 노래하며 노는 것이 심야(深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이 무렵 좨준이 병에 걸렸는데, 광무제는 옥새가 찍힌 두터운 요를 하사하였다. 33년(건무 9) 봄, 좨준은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좨준은 사람됨이 검소하고 신중하였으며, 사사로움을 이기고 공공(公共)에 봉사하여 하사받은 물건은 매번 사졸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집안에는 사재(私財)가 없었고, 자신은 가죽바지와 베옷을, 부인은 테두리도 없는 치마를 입고 다녔으므로 광무제가 그를 귀중하게 여겼다. 광무제는 좨준이 죽자 몹시 애통해 하였는데, 그의 상여가 하남현(河南縣)에 이르자 백관(百官)을 파견하여 모두 모이게 하였고 자신은 소복을 입고 몸소 임하여 곡(哭)하였다. 돌아와 성문으로 가는데, 좨준이 생시(生時)에 타던 수레와 말이 지나가자 이를 본 광무제는 눈물을 흘리며 그칠 줄 몰랐다고 한다. 또 박사 범승(范升)이 지어 올린 좨준을 기리는 추도문을 공경(公卿)들에게 읽게 하였으며, 장례가 끝나자 그 무덤에 다시 가 보고 부인과 가족들을 위문하였다. 이후 조회 때마다 광무제는 탄식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어떻게 좨정로(祭征虜 : 좨준)같이 우국(憂國) 봉공(奉公)하는 신하를 얻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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