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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이야기 : 김형렬가문과 정집전

김형렬가문과 정집전

 

 

교무부 김현진

 


  김 형렬이 어느 날 상제를 모시고 있을 때 “정(鄭) 집전이라 하는 사람은 지식이 신기한 사람이외다. 저의 증조가 계실 때에 저의 집에 오랫동안 머물렀나이다. 동리 사람들이 보릿고개를 앞에 두고 걱정하였는데 이 걱정을 알고 금광을 가리켜 주어서 고생을 면케 하였으며 많은 영삼(靈蔘)을 캐어 병든 사람을 구제하였고 지난 임술(壬戌)년에 경상도에서 일어난 민란을 미리 말하였나이다. 저의 증조께서 그의 지식을 빌어 명당 하나라도 얻어서 그 여음을 후세에 끼치지 못하였나이다. 이것이 오늘날 저의 한이 되는 일이로소이다”고 여쭈는지라. 듣고만 계시던 상제께서 가라사대 “그런 훌륭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 어찌 남인 너의 집의 밥을 헛되게 먹으리오. 천리의 극진함이 털끝만한 인욕의 사가 없나니라” 하셨도다.(행록 2장 17절)

 

  위 성구는 종도 김형렬이 1860년대에 자기 집에 머물렀던 정집전이란 인물과 관련하여 상제님께 말씀드리면서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다. 상제님께서는 정집전의 활동에 대하여 김형렬에게 들으시고 ‘훌륭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 칭찬하기도 하셨다. 그리고 김형렬이 평범하지 않았던 정집전에게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을 하소연하자 상제님께서는 정집전이 어떻게 너의 집 밥을 헛되이 먹으리오. “천리의 극진함이 털끝만한 인욕의 사가 없나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상제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어떤 의미로 보아야 할까? 이 글에서는 정집전이 살았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그가 행한 일들을 살펴보고, 상제님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정집전이라는 인물은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없어서 ‘집전’이 본명인지 호인지 명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조선 시대 때 ‘집전(執典)’의 직위는 제례나 행사 등에서 의식을 주관하던 사람을 가리켰기 때문에 아마도 그가 그러한 직위에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김형렬의 말에 따르면 정집전이 증조부의 손님이었다. 이 점은 그가 증조부와 같은 세대였음을 추정케 한다. 안동김씨 족보에서 김형렬의 증조부는 1803(계해)년 생으로 기록되어 있다.01 예부터 청도리 마을은 안동김씨들이 터를 잡고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는 내력이 있는데 김형렬 부친의 본적지가 청도리로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볼 때 아마도 증조부의 집도 청도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02
  정집전이 김형렬 증조부의 집에 머물 수 있었던 것은 오늘날과 달리 당시에는 손님을 정성스럽게 대접하는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님으로는 모르는 사람뿐만 아니라 친척, 스승, 제자, 학식 있는 사람 등이 있었는데, 특히 학문적으로 교류하는 경우는 최소 몇 달씩 지내기도 하였다.03 좋은 음식과 잠자리를 대접받은 손님은 여러 집안을 오가며 정보를 전달하고 인맥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거나 그 집의 문화적 품격을 높이는 역할을 하였다. 정집전도 김형렬에 따르면 1862(임술)년 보릿고개와 민란이 있었던 시기를 전후로 청도리에 오랫동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집전의 신분은 그가 한 일과 김형렬 증조와의 관계를 본다면 양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김형렬의 증조는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04에 해당하는 벼슬을 했던 사람이었다. 가선대부는 지금의 도지사에 해당하는 관찰사, 조선 시대 언론 및 감찰 기관인 사헌부의 최고 책임자인 대사헌 등의 관직 품계에 해당한다. 다만 이 시기는 세도정치 시기였기에 실제 이러한 관직을 수행했는지 아니면 명예직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렇게 정집전은 고위 관직을 지낸 김형렬 증조의 손님으로 있었기 때문에 고위 관료 집안과 교류할 수 있는 사회적 지위를 가졌거나 그것에 준하는 높은 학식을 갖추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형렬의 말에 따르면 정집전은 손님으로 있으면서 병든 사람을 고쳐주기 위해 효험이 좋은 약재인 영삼을 캐고, 보릿고개 때 굶어 죽는 일이 없도록 금광을 알려주거나 마을 사람들이 1862(임술)년 민란으로 인해 피해를 보지 않도록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활동에 관한 이야기가 정말 사실이었을까? 자료를 조사해 보니 영삼에 관해서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임술 민란과 금광에 관해서는 충분히 사실적 근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2가지의 내용을 좀 더 확인하기에 앞서 먼저 영삼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겠다.
  정집전은 영삼을 캐서 병든 사람들을 구제했다고 하였는데 그가 영삼을 어떻게 캘 수 있었을까? 병을 치료하는 데 사용하는 약재인 영삼은 대개 깊은 산에 있다. 정집전이 머물렀던 곳으로 추정되는 청도리는 구성산과 모악산 사이의 계곡에 있는 마을이다. 구성산은 높이가 487.6m에 불과하지만, 해발이 낮은 김제평야(金堤平野)와 맞닿아 있어서, 산간 지역으로 치면 700~800m에 육박하는 산이다. 모악산은 예로부터 ‘큰 뫼’라고 불려 왔는데 이는 큰 산을 뜻하며 해발 793m의 높이를 자랑한다. 특히 구성산은 앉은뱅이가 아홉 번 오르면서 소원을 빌어 병이 나았으며, 산에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전해지는 영험한 산이다.05 이렇게 청도리 주변은 깊고 큰 산이 있어서 약재로 쓸 영삼을 구할 만한 곳으로 추정된다.

 

 

보릿고개와 금광


  김형렬 증조의 집이 있던 청도리와 주변 금산ㆍ금구 일대는 전통적으로 금이 나오는 지역이었다. 대체로 이곳 지명에서 금(金) 자가 붙으면 금 생산과 연관 있는 곳이었다. 금산사(金山寺)가 있는 금산면(金山面), 금구면(金溝面)도 일찍이 금이 생산되었다. 청도리에도 금광과 사금(沙金)을 채취할 수 있는 금광지구가 있으며 청도리 주변 일대로 금광이 9곳이 있었다. 1930년대 이후로 집중적으로 개발되어 국내 생산량의 30%를 차지할 만큼 많은 금이 나왔던 곳이다.06


▲ 사금 채굴(placer gold-mining), 『The Passing of Korea(대한제국멸망사)』 1906년, 호머 헐버트 저, p.274, 출처 : 위키미디어



  금산, 금구는 신라시대부터 사금 채취가 많이 이루어졌었는데 채굴되지 않고 있다가 1869년쯤에 다시 시작되었다. 이후 일제에 의해 금 생산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하면서 모두 37건의 사금광이 허가되었고 1980년까지 사금을 채취할 정도로 금이 많이 나왔다.07
  이렇게 정집전이 머물던 청도리 주변에 9곳의 금광이 있었다는 점, 특히 그가 머물렀던 것으로 짐작되는 시기와 근사한 1869년부터 사금이 다시 채취된 것을 보면, 정집전이 금광 위치를 알려주었다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보릿고개는 음력 4월에서 5월 사이의 봄철로 지난해 가을에 수확한 식량이 떨어지고 올해 5~6월에 수확할 보리가 아직 여물지를 않아서 식량 사정이 어려운 때를 말한다. 이렇게 곡식이 귀해지는 보릿고개가 되면 먹을 것이 없어 나무껍질을 벗겨 먹기도 하고 그것마저 없으면 굶어 죽게 되는 상황이 된다. 이러한 시기에 정집전이 금이 많이 나오는 금광의 위치를 알려주었다는 것은 캐낸 금을 식량으로 바꾸어 많은 사람이 굶주림을 이겨낼 수 있는 방책을 마련하였다는 것이 된다.


 
임술민란 예언


  정집전이 예고한 임술(1862)년에 일어난 경상도 민란은 역사적으로는 ‘임술농민봉기’라고 한다. 이 봉기는 삼남 지역(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을 중심으로 제주를 포함한 전국 70여 개 고을에서 대규모로 일어난 농민 항쟁이었다. 시작된 곳은 경상도였다. 1862년 2월 경상도 진주의 작은 고을 단성에서 촉발되어 경상도 전체로 퍼지고, 4월에는 전라도, 5월에는 충청도까지 확산되었다.08 이 민란은 토지세(전정)와 군역의 부과(군정) 및 쌀, 잡곡 대여와 환수(환곡)에 대한 세금이 농민의 생존을 위협할 지경이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삼남 지역 중 전라도에서는 전체 54개 군현 중에서 38개 군현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 민란의 규모가 제일 컸다. 청도리 인근 지역에도 봉기가 일어났는데 금구, 김제, 고산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가장 가까운 금구에서는 1862년 5월 11일 백성들이 토지세의 인하와 죽은 사람에게 군역세를 걷지 말 것 등을 요구하며 봉기하였다.09 김제 농민도 과도한 군역세의 시정을 요구하며 봉기하였고, 고산의 경우 5월 4일에 백성들이 지방 관청인 동헌에 난입하며 봉기하였다.10 이들 봉기는 여러 폐단 중에서 군역세와 관련된 문제가 컸다. 고을마다 군역이 할당제로 지정되어 납부해야 할 군포가 정해져 있었으나 양반, 아전들은 여러 이유로 군역에서 빠져나갔고 이를 힘없는 농민이 감당하며 많은 세금을 내야 했다.11
  탐관오리의 억압과 착취에 농민들은 살기 위해 민란을 일으켰고 조선 조정에서는 빠른 진압을 위해 주동자를 색출하여 모두 효수(梟首: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닮)하고 봉기에 가담한 자들에 대해서도 단호히 처벌하였다.12 이 과정에서 민란에 가담했던 많은 농민이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했다. 또 민란에 휘말린 일반 백성은 생존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민란으로 관군과 무장 충돌이 일어나면 백성들은 전투에 휘말리거나 식량을 확보하려는 민란군과 진압군의 약탈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민란으로 농사를 준비하거나 짓지 못하는 상황에 몰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민란으로 백성들이 피해를 볼 수 있는 상황이 많았기 때문에 정집전은 이를 미리 알려주어 무고한 생명이 희생당하거나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조심하게 해준 것으로 보인다.
  정집전은 금광의 위치를 알고, 귀한 영삼이 있는 곳을 찾으며, 민란 발생을 예측할 만큼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이런 능력을 출세를 위해 쓰거나 금을 독차지하는 데 쓰지 않았다. 그의 능력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민생 구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정집전의 이러한 능력에 대해 김형렬은 조부께서 ‘그의 지식을 빌어 명당 하나라도 얻어서’ 후대에 물려주지 못했음을 상제님께 하소연했다. 위 성구의 일은 1904년경으로 추정되는데, 김형렬은 금구 환평에서 여유 있게 살다가 가세가 점점 기울게 되어 하운동 안동김씨 가문의 재실에 의탁하다가 1903년에 다시 동곡으로 이사를 하여 살고 있었다.13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던 김형렬은 정집전의 뛰어난 능력을 자신의 집안을 위해 활용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워했던 것이다.
  김형렬의 하소연에 상제님께서는 “천리의 극진함이 털끝만한 인욕의 사가 없나니라.”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천리의 극진함이 사사로움이 없어 편벽되지 않고 공정하다는 뜻이다. 정집전은 마을 사람들의 어려움을 구제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하였고 김형렬의 집안에서는 그를 손님으로서 아무런 어려움이 없도록 지원하였다. 이런 김형렬의 집안에 아무런 대가가 없다면 이는 하늘이 편벽된 처사를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에 상제님께서는 “천리의 극진함이 털끝만한 인욕의 사가 없나니라.”라고 하시며 김형렬의 집안에도 반드시 보답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된다. 어떤 보답을 말씀하신 것일까. 그 보답은 여러 형태가 있을 수 있지만 김형렬이 상제님의 공사를 받드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 답이 아닐까 한다.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김형렬은 전라도 지방에서 임술농민봉기가 한창 일어나던 시기였던 1862년 5월 5일에 태어나 상제님의 첫 번째 종도가 되었다.
  창생을 구제하기 위해 상제님께서 내놓으신 해원상생의 대도를 받들기 위해 우리는 수도에 정진하고 있다. 수도의 길에 들어서면 여러 어려움과 시련에 직면하게 된다. 이럴 때 “천리의 극진함이 털끝만한 인욕의 사가 없나니라.”라는 말씀을 되새기며 상제님의 뜻을 정성껏 받들어 나가면 반드시 그에 따른 보답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꾸준히 정진해 나가는 것이 어떨까 한다.

 

 

 


 01 『안동김씨 대동보』, 1958, p.5 참고.
02 낡아서 1952년에 다시 제작한 김형렬 제적등본 참고.
03 「벼락닫이창으로 시작하는 접빈객의 법도」, 《디지털안동문화대전》 참고.
04 『안동김씨 대동보』, 1958, p.5 참고.
05 김정길, 『전북의 백대명산을 가다』, (전주: 신아출판사, 2001), pp.406-407 참고.
06 「청도 금광지구」, 「선암리 폐금광」, 「오봉 금광지구」, 「사금」, 《디지털김제문화대전》 참고.
07 「청도 금광지구」, 《디지털김제문화대전》 참고.
08 김경란, 「임술민란 전후 전라도의 군정 운영과 식리문제」, 『한국사학보』 49 (2012), p.92 참고.
09 12개 조의 내용을 “① 이서(吏胥)의 포흠(逋欠)을 농민에게 징수하지 말라. ② 결가(結價)는 매결당 7냥 5전씩 하라. ③ 그간 도망했거나 죽은 군정(軍丁) 천여 명을 장부에서 제외하라. ④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군보(軍保)를 1인당 2냥씩 하라.”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임술민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
10 고성훈, 『민란의 시대: 조선 시대의 민란과 변란들』 (서울: 가람기획, 2000), pp.203-206, 참고.
11 같은 책, p.182 참고.
12 같은 책, pp.216-217 참고.
13 이정만, 「전경 지명 답사기: ‘하운동’을 찾아서」, 《대순회보》 226호 (2019),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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