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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5년(1995)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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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 신명의 생애 : 오한(吳漢)神明 열전

오한(吳漢)神明 열전

 

한마음으로 힘을 모으면 큰공을 이룬다

             

            

  11년 봄에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잠팽(岑彭) 등을 이끌고 공손술을 치러 떠났다. 잠팽이 형문(荊門)을 격파하고 계속해서 강관으로 진격해 들어갈 즈음에 오한은 이릉(裏陵)에 머물며 노요선(露橈船)을 감춘 뒤 남양의 병사들과 감형(減刑) 모사(募士) 3만 명을 거느리고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잠팽이 자객에 의해 피살되자 오한은 잠팽의 병사들을 병합하여 거느렸다. 12년 봄에 공손술이 거느리는 위당(魏黨), 공손영(公孫永)과 어부진에서 접전하여 크게 격파하고 마침내 무양(無陽)을 포위했다. 오한은 사흥을 맞아 그 무리를 모두 베고 건위로 들어가 경계로 삼았다. 여러 현(縣)이 모두 성을 굳게 지키자 오한은 진군하여 광도(廣都)를 태우게 했다. 이후에 무양 동쪽의 여러 작은 성들이 모두 항복을 했다.
  광무가 오한에게 경계하여 이르기를『성도(成都)의 10여만 중(衆)을 가벼이 대해서는 안 된다. 광도를 굳게 지키면서 그들이 와서 공격해 오기를 기다릴 일이지 그들과 더불어 싸우지 말라. 만일 그들이 감히 오지 못하면 공(公)이 병영을 옮기면서 뒤를 쫓으라. 모름지기 그들의 힘이 피폐되었을 즈음에 격파시켜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오한은 전세의 유리함을 틈타 마침내 스스로가 보병·기병 2만여 명을 거느리고 성도로 진격해 들어갔다. 성에서 10여리 떨어진 곳에 강의 북쪽을 의지하여 병영을 짓고 부교(浮橋)를 만들었다. 부장(副將)인 무위장군(武威將軍) 유상(劉尙)으로 하여 만여 명을 거느리고 강남 쪽에 주둔케 했는데 서로의 거리가 20리 남짓 되었다. 광무가 이를 듣고 크게 놀라고는 오한을 꾸짖으며 이르길『자주 그대에게 천조만단(千條萬端)으로 칙서를 보내나니 무슨 생각으로 일에 임함이 그리 혼란한가? 이미 적을 가벼이 여기고 적진 깊숙이 들었는데다 유상과 병영을 달리 하고 있다. 일에는 완급(緩急)이 있을 터, 다시는 서로 도움이 되지 못하게 되었다. 적들이 군대를 내어 그대를 에워싸고 많은 병사들로 유상을 공격할 경우 유상이 무너지면 그대도 패하게 되리라. 다행이 아직 아무 일이 없으니 서둘러 군대를 이끌고 광도로 돌아가라!』라고 했다. 조서가 도착하기도 전에 공손술이 과연 그 휘하의 장수 사풍 원길(袁吉)로 하여 10여만의 병사를 거느리게 하고는 20여 진영으로 나누어 함께 오한을 공격토록 했다. 또 별장(別將)에게는 만여 명을 거느리고 유상을 치게 하여 서로 구원하지 못하도록 했다. 오한이 그들과 더불어 하룻동안 대전을 치렀으나 패하여 나성으로 들어가고 사풍은 오한의 군대를 포위하였다. 오한이 이에 휘하의 장수들을 불러 독려하면서 말하기를『나는 그대들과 더불어 험한 고비를 넘기면서 이리저리 천리를 떠돌며 전쟁을 치러왔다. 머무는 곳에서 마다 승리를 거두었으니, 마침내는 적진에 깊이 들어와 그 섬 아래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유상과 더불어 두 곳에서 포위를 당하고 있으니 서로의 세(勢)가 이미 접하지 않고 그 화(禍)는 이루 헤아리기 어렵다. 이에 병사들을 잠수시켜 강 남쪽에 있는 유상에게로 가 합군하여 적들을 막을 생각이다. 한 마음으로 힘을 모아 사람마다 스스로를 위해 싸운다면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패하여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성패(成敗)의 길이 이 일전(一戰)에 있다.』라고 하자 장수들이 모두 오한의 뜻을 따르겠노라고 했다. 이에 병사들과 말을 배불리 먹이고 군영을 닫고는 3일 동안 나가지를 않았다. 그리고 깃발을 많이 세우고 연기를 끊이지 않게 했다. 밤에 재갈을 물리고 병사들을 인솔해 유상과 합군했다. 사풍 등은 이를 눈치 채지 못하고 그 뒷날 군대를 나누어 강 북쪽을 공격케 하고 자신은 남쪽을 공격했다.
  오한의 병사들이 모두 그들을 맞아 싸우기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했는데 마침내 크게 격파하여 사풍과 원길의 목을 쳤으니 무기를 노획하고 5천여 명의 병사를 베었다. 이에 군대를 이끌고 광도로 돌아가 유상으로 하여 광도에 머물며 공손술을 막게 했다. 한편으로 상황을 소상히 적어 광무에게 글을 올렸는데 스스로를 심히 책망하였다. 광무가 답하여 말하기를『그대가 광도로 돌아간 것은 매우 잘한 것이다. 공손술은 유상을 공략하려고 대들지 않고 그대를 치려고 들 것이다. 만일 그들이 먼저 유상을 공격할 경우 광도로부터 50리 떨어진 곳에서 보병·기병을 모두 이끌고 광도로 가 때맞추어 위기를 구원하면서 반드시 쳐부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로부터 오한은 광도와 성도 사이를 여덟 번이나 오가며 공손술과 싸워서 이기고 마침내 그 성곽 가운데다 진을 치게 되었다. 공손술이 직접 수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성문을 나와 큰 싸움을 벌였는데 오한은 호군(護軍) 고오(高午) 당감(唐邯)으로 하여 수만 명의 예졸(銳卒)을 거느리고 공격하게 하였다. 공손술의 병사들이 패하여 도주하자 고오가 공손술의 진영을 흩트리고 공손술을 잡아 죽였다. 이에 관한 기록은 공손술전(公孫述傳)에 보인다.

  이듬해(건무12년) 정월에 오한은 군대를 내려갔다. 원에 이르렀을 때 광무가 조서를 내려 접에 들러 선영도 찾아보게 하고는 곡식 2만곡(斛)을 하사하였다.
  15년에 다시 양무장군(陽武將軍) 마성(馬成)과 포로장군(捕虜將軍) 마무(馬武)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가 흉노(匈奴)를 격파했다.

  18년에 촉군(蜀郡)의 군수가 사흠(史歆)을 거느리고 성도에서 반란을 일으키고는 대사마(大司馬)라고 스스로 칭하면서 태수 장목(張穆)을 공격하였다. 장목이 성을 넘어 광도로 도망하자 사흠이 각 군현에 격문을 띄웠는데 탕거(宕渠)의 양위(楊偉), 구인의 서용(徐容) 등이 각기 수천 명의 병사를 일으켜 이에 응했다. 광무가 옛적에 사흠으로 하여금 잠팽의 호군(護軍)으로 삼고 병사(兵事)를 익히게 했던 까닭에 오한으로 하여 유상과 태중대부(太中大夫) 장궁(臧宮)을 거느리고 만여 명의 병사로 그를 토벌토록 시켰다. 오한이 무도(武都)로 들어가 광한(廣漢)·파(巴)·촉(蜀)의 세 군(郡) 병사를 징발하여 성도를 포위하였다. 백여 일 만에 성을 함락시키고 사흠 등을 베었다. 오한이 이에 뗏목을 타고 강을 내려가 파군(巴郡)에 이르자 양위와 서용 등이 두려워하여 흩어졌다. 오한은 그 거수격인 2백여 명을 베고 그 잔당과 수백의 여염집을 남군(南郡) 및 장사(長沙)로 이사시키고 돌아왔다.

  오한은 천성적으로 일을 애써 했는데 매번 징벌에 나설 때마다 광무가 미안해하며 그를 조심스럽게 대했다. 다른 장수들은 전진(戰陣)이 불리해지면 대개는 두려워하여 상도(常度)를 잃었으나 오한은 위기에 태연자약했고 전쟁장비들을 돌보면서 병사들을 고무시켰다.
  매번 군대를 이끌고 나갈 때마다 아침에 조서를 받으면 저녁이면 군대를 끌고 길로 나아가 애초부터 장비를 갖추는 날은 별도로 없었다. 그리하여 늘 직분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이고 공명(功名)으로 끝낼 수 있었던 것이다. 조정에 있을 때는 밝게 살피고 신중하게 질의를 했는데 그러한 것들이 그의 풍모(風貌)에 그대로 드러났다.
  일찍이 오한이 출정을 떠났을 때 그 처자들이 뒤에 남아 밭장사를 했다. 오한이 돌아와서는 이를 꾸짖어 말하기를『병사들이 밖에 있어 그러지 않아도 남정(南丁)들이 부족한 판국에 무슨 일로 그리 많은 전택(田宅)을 사 모으느냐?』하고는 모두 형제들과 외가에 주었다.

  20년에 오한의 병이 심하였다. 어가(御駕)가 친히 와서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오한이 대답하여 말하기를『신(臣)이 어리석어 아는 바가 없으니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용서하여 주십시오.』라 했다. 오한이 죽자 조서를 내려 애도의 뜻을 표하고 시호를 충후(忠候)라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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