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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6년(1996)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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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 신명의 생애 : 가복(賈復)神明 열전

가복(賈復)神明 열전 

 

 

소시에 큰인물로 명망높아

절개와 희생정신으로 뭇장수들의 귀감돼

 

 

  가복(賈復)은 자가 군문(君文)이고 남양(南陽) 관군(冠軍) 사람이다.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였고, 상서(尙書)를 배웠다.

  무음(舞陰) 땅의 이생(李生)을 섬겼는데, 이생이 그를 비상하게 여겨 문인들에게 말하기를『가군(賈君)의 용모와 기상이 이와 같고 또 배움에도 부지런하니 장군·재상이 될만한 그릇이오.』라고 하였다. 왕망(王莽)의 신(新)나라 말엽에 현(縣)의 관리가 되어 하동(河東)지역에 가서 소금을 가져오다가 도적떼를 만났는데, 동료 십여 인은 모두 소금을 내버려두고 도망갔거늘 가복만이 홀로 소금을 온전히 지켜 현으로 가지고 돌아오니, 현의 사람들이 모두 그의 신실함을 칭찬하였다.
  이때에 하강(下江)과 신시(新市)에서 군사가 일어나니, 가복 또한 우산(羽山)에서 군사 수백 명을 모아 스스로를 장군이라 칭했다. 갱시(更始)가 즉위하자 곧 자기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한중왕(漢中王) 유가(劉嘉)에게 귀의하여, 그의 교위(校尉) 장군이 되었다. 가복은 갱시의 다스림이 문란하고 그의 장수들이 방종한 것을 보고는 이에 유가에게 유세하여 말하였다.『신이 듣건대 요순(堯舜)의 일을 도모하다가 미치지 못한 자는 탕왕(湯王)·무왕(武王)이요, 탕무(湯武)의 일을 도모하다가 미치지 못한 자는 환공(桓公)·문공(文公)이요, 환공·문공의 일을 도모하다가 미치지 못한 자는 한(韓)·조(趙)·위(魏)·연(燕)·제(齊)·초(楚) 여섯 나라요, 여섯 나라의 법률을 정하여 편안히 잘 지키고자 하였으나 하지 못한 자는 망한 여섯 나라들입니다. 지금 한(漢)의 왕실이 중흥하려 함에, 대왕께서는 친척들을 병방 제후로 삼으시고 천하가 채 평정되기도 전에 보존하시고 있는 것만을 잘 지키려 드시니, 현재 보존하신 바를 앞으로도 보존하실 수 있겠습니까?』 유가가 답하였다.『경의 말은 너무 커서 내가 감당할 것이 못되오. 대사마(大司馬) 유공(劉公)이 하북에 있는데 필히 시행할 수 있을 터이니, 나의 편지만을 가지고 가보도록 하시오.』 가복이 마침내 유가에게 작별을 고하고, 편지를 받아 지니고 북으로 하수(河水)를 건너 박인에 있는 광무에게 이르러 등우를 통하여 알현하였다.
  광무가 그를 비상하게 여기고 등우 또한 그가 장수의 절개를 지녔다고 칭찬하여, 이에 가복을 파로장군(破虜將軍)으로 임명하여 도적들을 감시하게 하였다. 가복의 말이 수척하니 광무가 왼쪽의 참마를 풀어 그에게 주었다. 벼슬아치들은 가복이 뒤늦게 와서 동료들을 잘 능멸한다고 여겨, 가복을 호땅의 위(尉)로 옮기고자 하였다.

  광무가 말하였다.『가독(賈督)은 천리에 떨치는 위엄을 지녀 직책을 맡긴 것이니, 제멋대로 그를 옮기지 말라.』
  광무가 신도(信都)에 이르러 가복을 편장군으로 삼았고, 한단(邯鄲)을 함락시킴에 이르러 도호장군(都護將軍)으로 옮겨주었다. 광무를 좇아 야견에서 청독(靑犢)을 공격하는데, 대전투가 해가 중천에 뜨도록 계속 되었고 적의 진영은 견고하여 퇴각치 않으니, 광무가 명령을 전달해 복을 불러들여 말하기를『관리나 병사나 모두 굶주렸으니 아침밥을 먹여도 괜찮으리라.』가복이 답하였다.『먼저 격파시킨 연후에 먹이십시오.』 그리고는 가복이 깃발을 등에 지고 선봉에 서니, 가는 곳마다 적군이 모두 쓰러져 마침내 적군은 패주했다. 뭇 장수들이 그의 용맹에 탄복했다.
  또 북쪽으로는 진정(眞定)에서 오교(五校)와 싸워 크게 격파했다. 가복의 부상이 매우 심하자 광무가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내가 가복을 별장군(別將軍)으로 삼지 않은 것은 그가 적을 가벼이 여기기 때문이었다. 그러더니 과연 염려한 대로 나의 명장군을 잃게 되었구나. 듣건대 그의 아내가 임신을 하였다 하니, 만일 딸을 낳으면 며느리로 삼고 아들을 낳으면 사위로 삼아 가복으로 하여금 처자를 염려치 않아도 되도록 하리라.』 얼마 지나지 않아 가복이 완쾌되어 계땅으로 광무를 따라 미치니, 서로 상봉하고 매우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어 병사들을 크게 먹이고, 가복으로 하여금 앞장서도록 하여 업땅의 적군을 격파했다.
  광무가 즉위한 후 가복에게 집금오(執金吾)를 배수하고 관군후(冠軍侯)로 봉하였다. 이에 앞서 하수(河水)를 건너 낙양(洛陽)에서 주유(朱有)를 공격하고 백호공(白虎公) 진교(陣僑)와 싸워 연달아 격파하고 항복시켰다.

  건무 2년에 양(穰)과 조양(朝陽) 두 현이 추가로 봉해졌다. 갱시의 언왕(彦王) 윤준 및 남방에 있는 여러 대장군들 중에 아직 항복하지 않은 자가 많자, 임금이 장수들을 불러 군사 일을 의논케 하였는데 아무도 말을 않고 침묵이 계속되었다.
  이에 임금이 격문으로 땅바닥을 두드리며『언(彦)이 가장 강력하고 완(宛)이 그 다음이니, 누가 이들을 격파할 수 있으리?』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가복이 서슴없이 답하였다.『신이 언땅을 격파하겠습니다.』 임금이 웃으며 말하였다.『집금오가 언땅을 공격한다면 짐이 다시 무엇을 근심하리요! 완땅은 대사마가 공격하도록 하라.』 마침내 가복과 기도위(騎都尉) 음식(陰識)·요기장군 유식(劉植) 등을 파견하니, 남쪽으로 오사진(五社津)을 건너 언땅을 공격하여 잇달아 격파하였다.
  한달 남짓 만에 윤준이 항복하였고, 언땅을 모두 평정하였다.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갱시의 회양태수(淮陽太守)인 폭사를 공격하니, 폭사가 항복하고 회양현이 모두 평정되었다. 그해 가을에 남쪽으로 소릉(召陵)과 신식(新息)을 공격하여 평정했다. 이듬해 봄에 좌장군(左將軍)으로 옮겨졌고, 별도로 신성(新聖)과 면지(面池)의 사이에서 적미(赤眉)를 공격하여 연달아 그를 격파했다. 의양(宜陽)에서 임금을 만나 적미를 항복시켰다.
  가복은 임금을 좇아 정벌하러 다니면서 일찍이 패배한 적이 없었고, 여러 차례 뭇 장수들이 포위당한 것을 풀어주고 위급함을 구해 주느라 몸에 열 두 번이나 부상을 당하였다. 건무 13년에 교동후(膠東侯)로 완전히 봉해졌고, 욱질(郁秩)·장무(壯武)·하밀(下密)·즉묵(卽墨)·관양(觀陽)·정호 등 여섯 현을 식읍으로 받았다.
  가복은 임금이 전쟁을 억누르고 문덕(文德)을 닦고자 하며 공신들이 서울을 옹위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곧 고밀후(高密侯) 등우와 함께 병사를 줄이고 유학(儒學)을 돈독히 하였다. 임금이 매우 잘한 일이라고 여겨 자신도 마침내 좌·우장군을 없애버렸다. 가복은 열후(列侯)의 신분으로 하야하였고 특진(特進)이 가해졌다.
  가복은 사람됨이 강직하였으며 절개가 곧았다. 사가(私家)로 돌아온 후에는 문을 닫고 위의와 명망을 쌓았다. 주우(朱祐) 등이 가복은 마땅히 재상이 되어야 한다고 천거했으나, 임금이 바야흐로 관직의 일로써 삼공(三公)을 문책하였던 까닭에 공신(功臣)들을 등용하지 않았다.

  이때에 열후로는 오직 고밀후(高密侯)·고시후(固始侯)·교동후(膠東侯) 셋만이 공경(公卿)과 더불어 국가의 대사에 참여하여 의논했으며, 은혜를 입음이 매우 두터웠다.
  건무 31년에 죽으니 시호를 강후(剛候)라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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