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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6년(1996)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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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 신명의 생애 : 경감(耿弇) 神明열전

경감(耿弇) 神明열전

 

          

              

  경감(耿弇)의 말에 광무가 크게 기뻐하며 이에 그를 대장군으로 삼아 오한(吳漢)과 함께 유주 산하 10군(郡)의 병력을 징발토록 하였다. 경감이 상곡(上谷)에 당도하여 위순과 채충의 목을 베고, 오한은 묘증의 목을 쳤다. 이리하여 유주의 병력을 모두 징발하였다. 징발된 병력을 이끌고 남으로 내려가서 광무를 도와 동마적(銅馬賊), 고호적(高湖賊), 적미적(赤尾賊), 청독적(靑犢賊)을 격파하고 또 우래적(尤來賊), 대창적(大槍賊), 오번적(五幡賊)을 원씨(元氏)에서 추격하였다. 이때 경감은 늘 날랜 기병들을 거느리고 군(軍)의 선봉이 되어 적들을 퇴각시키곤 했다. 광무가 승승장구의 여세를 몰아 순수(順水) 근처에서 싸움을 시작했다. 추격당하던 적들이 다급해지자 죽기 살기로 싸웠다. 그 무렵 광무의 병사들이 매우 지쳐있었으므로 마침내 대패하였다. 되쫓겨 오다가 범양(范陽)에 보루를 쌓고 피해있었다. 며칠이 지나 군대의 사기가 진작되었는데 도적들이 때마침 퇴각하고 있어 다시 추격하였다. 용성(容城), 소광양(小廣陽), 안차(安次)에 이르러 연일(連日) 싸운 끝에 마침내 물리쳤다.
  광무가 계로 돌아온 후에 다시 경감과 오한, 경단(景丹), 합연(蓋延), 주우(朱祐), 비융, 경순(耿純), 유식(劉植), 잠팽(岑彭), 제준(祭遵), 견담, 왕패(王覇), 진준(陣俊), 마무(馬武) 등 13장군을 보내 적들을 노(潞)의 동쪽까지 추격하도록 했는데 평곡(平谷)에 이르러 두 번 싸워 1만 3천여급(級)을 참수(斬首) 시켰다. 마침내 우북평군(右北平郡)의 무종현(無終縣)과 토은현(土垠縣) 사이에 이르러 추격을 거의 끝내고 도적들은 흩어져 요서(遼西), 요동(遼東)으로 들어가고 혹은 오환적(烏桓賊)이나 맥(貊)의 사람들에게 공격당하여 거의 잔멸되었다.
  광무가 즉위하여 경감을 건위대장군(建威大將軍)으로 배수(拜授)했다.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경단(景丹), 강노장군(强弩將軍) 진군과 함께 오창(敖倉)에서 염신적(厭新賊)을 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건무(建武) 2년에 경감은 다시 호치후(好佩侯)에 봉해져 호치, 미양(美陽) 두 현(縣)에서 식읍하게 되었다. 건무 3년에 연잠(延岑)이 무관(武關)으로부터 나와 남양(南陽)을 공격하여 몇 개의 성을 함락시켰는데 양(穰) 사람 두홍(杜弘)이 그 무리를 이끌고 연잠에게 동조했다. 경감은 연잠 등과 양에서 교전하여 크게 이기고 3천여급(級)의 목을 베었다. 이때 반군(反軍)의 장수와 사졸(士卒) 5천여 명을 생포했으며 인수(印綬) 3백여 개를 획득했다. 두홍은 항복하고 연잠은 부하 몇 명과 함께 동양(東陽)으로 도주했다.
  경감이 광무를 따라 용릉에 순시를 갔다가 이것저것 살펴본 후에 자청하기를, 북쪽으로 가 상곡병(上谷兵)으로 아직 징발되지 않은 군대를 거두고, 어양의 팽총(彭寵)과 탁군의 장풍(張豊)을 평정시키며, 돌아오는 길에 부평(富平), 획삭(獲索)을 수습하고 동쪽으로 장보(張步)를 공격하여 제(薺)의 땅을 완전히 평정하겠노라고 하였다. 광무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허락하셨다. 건무 4년에 마침내 조서를 내려 경감으로 하여금 어양으로 진공(進攻)케 하였다. 그러나 경감은 자기의 아버지가 상곡에 있고 자기의 아버지와 팽총과는 함께 일했던 처지이며, 자기의 형제로 경사(京師)에 머물고 있는 자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머뭇거리며 감히 혼자서 진격해 들어갈 수 없었다. 이에 상서(上書)하여 낙양으로 갈 것을 청했다.

  이에 답하는 조서에 이르길,『장군의 집안은 전체가 나라를 위해 일해 왔고 가는 곳마다 적들을 물리쳐 그 공적이 매우 현저하거늘 이 차제에 무엇을 마다하고 무엇을 망서린단 말이오? 이곳으로 오겠다니 징사(徵士)가 되겠다는 뜻이오? 왕상(王常)과 함께 탁군에 주둔하면서 계책이나 생각해 보시오.』라고 하였다. 경감의 아버지 경황이 경감 자신이 징사로 가 있길 바란다는 소식을 듣고 심기가 편하질 못했다. 이에 경서(耿舒)의 동생 경국(耿國)을 낙양으로 보내 광무를 모시게 했다. 광무가 이 사실을 기뻐하며 경황을 진급시켜 유미후에 봉했다. 이런 후에 경감에게 명하기를 한충장군(漢忠將軍) 주우(朱祐)와 한충장군(漢忠將軍) 왕상 등과 함께 망도(望都), 고안(故安)에 있는 서산적(西山賊) 10여영(營)을 치게 하였는데 모두 격파하였다.
  이때 정노장군(征虜將軍) 제준(祭遵)은 양향(良鄕)에 머물고 효기장군(驍騎將軍) 유희(劉喜)는 양향(陽鄕)에 머물면서 팽총과 대치하고 있었다. 팽총이 그의 아우 팽순(彭純)을 시켜 흉노병(匈奴兵) 2천여 기(騎)를 거느리게 하고 자신은 수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두 길로 나누어 제준과 유기를 공격하였다. 오랑캐의 기병이 군도(軍都)를 지날 때 경서가 그 무리들을 격파하고 흉노의 두 왕(王)을 베어버리자 팽총은 퇴주(退走)했다. 경황이 다시 경서와 함께 팽총을 공격하여 군도를 탈환했다.

  건무 5년에 팽총이 죽자 광무가 경황의 공을 치하하고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시켜 부절(符節)을 가지고 가 경황을 맞아들이도록 했다.
  갑제(甲第)를 하사하고 입조(入朝)토록 하는 한편 경서를 봉(封)하여 모평후(牟平侯)로 삼았다. 경감으로 하여금 오한과 함께 평원(平原)에서 부평, 획삭적을 치게 하였는데 크게 이겼고 항복한 자가 4만여 명이나 되었다. 

  조서가 내려져 경감은 장보의 토벌에 나서게 되었다. 떠나기 전에 항복한 병사들을 모두 모아 부곡(部曲)을 만들고 장리(將吏)를 두었다. 장보를 치기 위해 허남에 기도위(騎都尉) 유흠(劉歆)과 태산태수(太山太守) 진준(陳俊)을 통솔하여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갔다. 조양(朝陽)으로부터 제하(濟河)까지 다리를 놓아 하수(河水)를 건넜다.
  장보가 이를 듣고 그의 대장군 비읍(費邑)에게 역하(歷下)에 진을 치게 하고 분병(分兵)하여 축아(祝阿)에도 주둔케 하는 한편, 별도로 태산(太山)의 종성(鍾城)에 수십 개의 병영을 만들어 경감을 기다리고 있도록 하였다.

  경감이 하수를 건넌 뒤 먼저 축아를 공격하였는데 새벽부터 성을 공략하기 시작하여 한낮이 덜되어 함락시켰다. 고의로 포위망의 한 귀퉁이를 터 병사들을 종성으로 달아나게 하였다. 종성의 사람들이 축아가 이미 궤멸된 것을 알고 크게 놀라 모두 병영을 비워놓고 도망가버렸다.
  비읍이 그의 아우 비감(費敢)에게 분병하여 주면서 거리(巨里)를 지키게 했다. 경감이 진격하여 우선 거리를 위협했는데 나무를 많이 베게하여 갱참을 막아버리겠다고 장담했다.

  며칠 지나서 투항해 온 사람이 말하길『비읍이 경감장군이 거리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모의(謨議)하여 구원하러 오게 되었다 합디다.』라고 하자 경감이 군중(軍中)에 엄령을 내려 장비들을 손질하게 하고 제부(蹄部)에 칙서를 내려 3일 후에 거리성(巨里城)을 총공격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은밀히 이 말이 새어나가도록 하고자 사로잡은 포로를 느슨하게 감시하여 도망가게 했다. 공격하기로 예정된 날이 되자 과연 비읍이 직접 3만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왔다. 경감이 기뻐하며 장수들에게 이르길 『내가 전쟁장비들을 손질케 한 것은 비읍을 이곳에 오게 하려는 작전이었소. 이제 올 것이 왔으니 하고자 하는 바에 딱 들어맞게 되었소.』라고 하였다. 3천여 명의 병사들을 남게 하여 거리성을 지키도록 하는 한편 경감 자신은 정병들을 이끌고 언덕으로 올라갔다. 언덕을 오르면서 서로 교전하여 크게 이기고 적들의 진영에 이르러 비읍을 베었다. 비읍의 잘린 머리를 거리성에 보이자 비감이 무리를 이끌고 장보에게로 달아났다.
  경감은 그 적취를 수습하고 아직 항복 받지 못한 병영을 마저 공격하여 40여영(營)을 평정시켰다. 이리하여 마침내 제남(濟南)이 모두 평정되었다. 이때 장보는 극(劇)을 도읍지로 삼고 그의 아우 장람(張藍)을 시켜 그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서안(西安)을 지키게 하는 한편 제군(諸郡)의 태수들이 보낸 병사 1만여 명을 모아 임치(臨淄)를 지키게 했는데 서로 40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경감은 획중(劃中)으로 진군하여 두 성(城) 사이에 머물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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