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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8년(1998)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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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 신명의 생애 : 잠팽(岑彭) 神明열전

잠팽(岑彭) 神明열전

 

             

             

  건무(建武) 4년 봄에 전융은 신신(辛臣)을 남겨두어 이릉(夷陵)을 지키게 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장강(長江)을 따라 면수(沔水)를 거슬러 올라가 여구(黎丘)에 이르러 기일을 정하여 항복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신신이 뒤에서 전융의 보물들을 훔쳐 가지고는 샛길로 가서 잠팽에게 먼저 항복하고는 편지를 보내서 전융을 불렀다. 전융은 신신이 필시 자신을 팔아넘긴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마침내 감히 항복하지 못하고 반대로 진풍의 군사와 힘을 합했다.
  잠팽이 병사를 출동시켜 수개월 만에 크게 격파하니, 적의 대장군 오공(伍公)은 잠팽에게로 와서 항복하고 전융은 이릉(夷陵)으로 도망갔다. 광무제가 친히 여구(黎丘)에 행차하여 군사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잠팽 휘하의 부하 중 공훈 있는 자 백 여명을 봉(封)해 주었다. 잠팽이 진풍을 공격한지 3년이 되니, 그간 목을 벤 적병의 수가 구만여 명이어서 진풍에게 남은 병사는 천여 명밖에 되지 않았고 성안의 식량 또한 바닥이 나게 되었다.
  광무제는 진풍의 세력이 매우 약해졌다고 판단하고 주우(朱祐)로 하여금 잠팽을 대신해서 진풍을 감시하게 하고는, 잠팽은 부준(傅俊)과 더불어 남쪽으로 전융을 공격하게 하니, 마침내 전융의 군사를 크게 격파하고 이릉(夷陵)을 함락시키고 도망치는 전융을 추격해 자귀에까지 이르렀다. 

  전융은 기병 수십 명과 함께 도망해 촉(蜀)으로 들어갔다. 전융의 처자와 병사 수만 명을 다 포로로 잡았다.

  잠팽이 촉한(蜀漢)을 정벌하려 하였으나, 지형이 물을 끼고 있고 식량이 부족하며 물이 거세어서 식량을 운반하기도 어려운지라, 위로장군(威虜將軍) 풍준(馮駿)을 보내어 강주(江州)에 주둔시키고 도위(都尉)장군 전홍(田鴻)은 이릉(夷陵)에 주둔시키고 이현(李玄)은 이도(夷道)에 주둔시키고서, 스스로는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와 진향(津鄕)에 주둔하면서 형주(刑州)의 요로(要路)를 막고는 만이(蠻夷)족에게 알려 항복해 오는 자는 그 대장을 광무제께 아뢰어 제후로 봉해 주리라고 했다.
  애초에 잠팽은 교지의 목(牧)인 등양(鄧讓)과 친분이 두터웠었다. 그리하여 등양에게 편지를 보내 광무제 통치하의 국가의 위엄과 덕을 설명하고는 또 편장군(偏將軍) 굴충(屈充)을 보내 강남(江南) 지역에 격문을 돌려 차례대로 임금의 명령을 전달했다. 그리하여 등양이 강하태수(江夏太守) 후등(候登), 무릉태수(武陵太守) 왕당(王堂), 장사(長沙)의 승상 한복(韓福) 계양태수(桂陽太守) 전합(田翕), 창오태수(蒼梧太守) 두목(杜穆), 교지태수 석광(錫光) 등과 더불어 관리를 파견하여 공물을 헌납하니, 이들을 모두 제후로 봉해 주었다. 이들 중에 혹자는 아들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잠팽의 정벌하는 일을 돕게 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비로소 강남의 보배들이 유통되게 되었다.
  건무(建武) 6년 겨울에 광무제는 잠팽을 서울로 불러들여 수차례 연회를 열어 잠팽을 맞이하고 또 상을 후하게 내려 주었다. 잠팽이 다시 남쪽 진향(津鄕)으로 돌아가는데, 광무제가 명령을 내려 집에 들러 조상의 묘에 참배케 하고 관리 대장추(大長秋)로 하여금 초하루 보름으로 잠팽의 어머니의 안부를 묻게 했다.
  건무(建武) 8년에 잠팽은 병사를 이끌고 광무제를 좇아 천수(天水) 지역을 격파하고, 장군 오한(吳漢)과 함께 서성(西城)에서 외효를 포위했다. 이때에 공손술(公孫述)의 장군인 이육(李育)이 군사를 거느리고 외효를 구하러 와서 상규지역에 머무니 광무제가 개연(蓋延)과 경감을 보내어 그를 포위케 하고는 스스로는 동쪽으로 돌아왔다. 잠팽에게 칙서를 내려 말하였다. 『두 성을 함락시키고 나면 곧바로 군대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가서 촉(蜀)의 오랑캐를 공격하시오. 짐의 성품이 만족할 줄을 몰라 이미 농 땅을 평정하고서 또 다시 촉지역을 평정하기를 바라고 있소. 매번 군대를 출정 시킬 때마다 근심으로 머리가 하얗게 세오.』 잠팽이 마침내 계곡의 물을 막아 서성으로 들이대니 서성이 거의 물에 잠길 즈음, 외효의 장군 행순(行巡)과 주종(周宗)의 구원병이 도착하여 외효는 성을 빠져나가 기(冀) 땅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고 한(漢)나라의 부대는 식량이 다 떨어져서 짐수레를 불태우고 병사를 이끌고 농 땅을 빠져나갔으며, 개연(蓋延)과 경감도 좇아서 퇴각했다. 외효가 군사를 내어 후미에서 진영을 공격해 오니 잠팽이 맨 뒤에서 이를 막아낸 고로 다른 장군들이 군사를 온전히 하여 동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잠팽은 진향(津鄕)으로 돌아왔다.
  건무(建武) 9년에 공손술(公孫述)이 휘하의 장군 임만(任滿)·전융(田戎)·정범(程汎) 등을 보내어 수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뗏목을 타고 강관(江關)으로 내려와 풍준(馮駿)과 전홍(田鴻)과 이현(李玄) 등을 격파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도(夷道)와 이릉(夷陵)을 함락시키고 형문(刑門)과 호아(虎牙)를 점거했다. 또한 강수(江水)를 가로질러 구름다리와 전투용 누각을 설치하고 나무판을 모아 세워 물길을 막고 산 위에 진영을 설치하고서 한(漢)의 군사에 대항했다. 잠팽이 수차례 이들을 공격했으나 불리하게 되자, 이에 직진할 수 있도록 전투용 누각을 설치한 배와 모험을 무릅쓰고 돌격할 수 있는 노를 저어 가는 배 수천 척을 구비하였다.
  건무(建武) 11년 봄, 잠팽은 오한(吳漢) 및 주로장군(誅虜將軍) 유융(劉隆)·보위장군(輔威將軍) 장궁(藏宮)·효기장군(驍騎將軍) 유흠(劉歆)과 더불어서 남양(南陽)·무릉(武陵)·남군(南郡) 지역의 군사와 계양(桂陽)·영릉(零陵)·장사(長沙) 지역의 짐을 지고 노를 젓는 군졸들을 출병 시키니, 무릇 육만 여명의 병사와 오천 필에 달하는 기마가 모두 형문(刑門)에 모이게 되었다. 오한이 계양·영릉·장사 세개 군(郡)의 노젓는 군졸들에게 소비되는 양식이 너무 많다고 여겨 이들을 돌려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잠팽은 촉의 군대가 강한 것을 고려하여 이들을 돌려보내지 아니하고 글을 올려 이러한 상황을 보고했다. 광무제가 잠팽에게 알려 말하였다. 『대사마(大司馬)는 보병과 기병 사용에만 익숙하고 물에서의 싸움은 잘 알지 못하니, 형문(刑門)의 일은 남쪽 정벌의 임무를 맡은 그대가 알아서 일괄 처리토록 하시오.』 잠팽이 이에 군중에 명령을 내려 적의 구름다리를 공격하고 적의 진영에 먼저 오르는 자에게 으뜸상을 주겠노라 하면서 지원자를 모집했다. 그리하여 편장군(偏將軍) 노기(魯奇)가 이에 응하여 선봉에 나섰다. 이때에 날씨는 바람이 몹시 세차게 불고 있었다.
  노기의 배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 곧바로 적군의 구름다리로 돌격했는데 적군의 물을 막아 놓은 버팀목들이 바람에 쓸려 갈고리처럼 되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노기 등이 여세를 몰아 죽을힘을 다해 싸웠고 이어서 횃불을 날려 적진을 불태우니 바람이 거센 덕에 불이 더욱 잘 붙어서 적군의 다리와 누각 등이 다 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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