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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9년(1999)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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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 신명의 생애 : 왕패(王覇) 神明

壁 별을 관장하는

 

왕패(王覇) 神明

 

             

<연구소제공>

 

  그러나 시중의 사람들이 크게 웃고는 손짓하며 야유하였다.

  왕패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되돌아오자 광무는 곧바로 남쪽 하곡양(下曲陽)으로 말을 달렸다. 왕랑의 병사들이 뒤를 따르고 있다는 전문(轉聞)이 있자 광무를 따르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진군하여 호타하에 이르렀을 때 척후병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강이 풀려 얼음이 떠다니는데다 배가 없어 건널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관속(官屬)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는데 광무가 왕패더러 가서 살펴보라고 했다.

  왕패는 사실을 말하자니 뭇사람들이 두려워할 것 같고 앞으로 나가자니 강이 막고 있는지라 돌아와서 거짓으로 아뢰기를, 『얼음이 두터워 건널 수 있겠습니다.』라 하였다. 이 말에 관속들이 모두 기뻐했다. 이에 광무가 웃으면서 이르길,『척후병이 헛소리를 했구먼.』이라 하고는 드디어 앞으로 나아갔다.
  강가에 이르자 이상하게도 얼음들이 서로 붙어 있었다. 광무가 왕패에게 도강(渡江)을 감독하도록 시켰는데 몇 기(騎)를 남겨놓고 얼음이 풀렸다. 광무가 왕패에게 이르길, 『우리 군대를 편안히 건너게 하여 죽음을 면하게 한 것은 경(卿)의 힘이었소.』라 하자 왕패가 사양하며 말하길『이는 명철하신 공(公)의 지극한 덕(德)과 신기하고 영묘한 하늘의 도움으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무왕(武王)을 도왔다는 백어(白魚)의 얘기도 이보다 더 신묘하지는 않았을 겁니다.』라고 하였다.

  광무가 관속들에게 이르기를『왕패의 기지(機智)로 무사히 도강한 일은 하늘이 내린 상서로움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라 하며 왕패를 군정(軍正)으로 삼고 관내후(關內侯)라는 작위(爵位)를 주어 그 공을 치하했다.

  신도(信都)에 이르러 군대를 풀어 한단(邯鄲)을 함락시켰다. 

  왕패는 왕랑을 추격하여 마침내는 그의 목을 베고 그의 새수(璽綬)를 빼앗았다. 왕패는 다시 그 공으로 왕향후(王鄕侯)에 봉해졌다.
  광무를 따라 하북(河北)을 평정할 때 항상 장궁(藏宮), 부준(傅俊)과 함께 병영을 썼는데 유독 왕패만이 사졸(士卒)들을 잘 돌봐 주었다.

  죽은 병사의 옷을 벗긴 후 염을 하는가 하면 다친 병사들을 몸소 돌보기도 했다. 광무가 즉위하여 왕패가 병사(兵事)에 밝고 사졸들을 잘 돌본다는 것을 알고 독자적인 직책을 주어도 되리라고 여겨 그를 편장군(偏將軍)으로 삼았다. 아울러 장궁과 부준의 병사들도 거느릴 수 있게 했는데 이 때 장궁과 부준의 직책은 기도위(騎都尉)였다. 건무(建武) 2년에 왕패는 다시 부파후(富波侯)에 봉해졌다.
  건무 4년 가을에 광무는 초로 순시를 떠났는데 왕패와 포로장군(捕虜將軍) 마무(馬武)를 시켜 동쪽으로가 수혜(垂惠)에서 주건(周建)을 토벌토록 하였다.

  이때 소무(蘇茂)가 오교적(五校賊)의 사졸 4천여 명을 거느리고 주건을 구원하고자 하여 우선 날랜 기병들을 보내어 숨어 있다가 마무의 군량(軍糧)을 약탈하도록 했다. 이에 마무는 사고가 발생한 곳으로 가 구원하였다. 주건이 성안으로부터 군대를 내보내 마무를 협공(挾攻)했으나 마무는 왕패의 구원병이 오리라는 것을 믿고 그다지 애써 싸우지 않았다. 마침내 마무의 군대가 소무와 주건에게 패하여 도주하게 되었는데 왕패의 병영을 지나면서 큰소리로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에 왕패가 말하길 『적(賊)의 병사들이 너무 많아 나가서 싸워 봤자 양쪽이 패(敗)할 것이 뻔하니 모쪼록 잘 싸워 주시오』라 하고는 병영의 문을 닫고 수비를 철저히 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군리(軍吏)들이 모두 나가서 싸우자고 했다.
  왕패가 이르길, 『소무의 병사들이 날쌔고 또 그 수효가 많아 우리 병사들이 속으로 두려워하고 있소. 포로장군 마무와 내가 서로 의지하며 양군(兩軍)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하지 않는다면 패할 수밖에 없는 일이오. 지금 병영을 닫고 굳게 지켜 우리가 서로 구원하지 않는 것을 보여주게 되면 도적들은 반드시 기세를 펴고 가벼이 들어오게 될 것이고, 또 포로장군은 구원이 없음을 섭하게 여겨 배전(倍前)의 노력으로 싸우게 될 것이오. 이렇게 되면 소무의 병사들이 지치게 될 것인 즉 우리가 그 틈을 타 치게 되면 이길 것은 뻔한 이치요.』라고 하였다. 과연 소무와 주건이 총력전을 펴 마무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싸우기 시작한 지가 꽤 되었을 때 왕패 군영의 장사(壯士) 노윤(路潤) 등 수십 명이 머리칼을 자르고 싸우기를 청했다. 왕패가 장사들의 심지(心志)를 읽은 터라 병영의 뒤를 터 날랜 기병을 내보내 도적들의 후미를 치게 했다. 소무와 주건이 앞뒤로 공격을 받게 되자 혼비백산하여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에 마무와 왕패는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각기 자기의 진영으로 되돌아갔다. 도적들이 다시 무리를 지어 싸움을 걸어왔으나 왕패는 꿋꿋하게 누워 나가지도 않고 사졸들을 실컷 먹이고는 놀게 했다. 소무가 왕패의 병영으로 활을 퍼붓듯이 쏘아 왕패 앞의 술동이에도 꽂혔으나 왕패는 편안하게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군리(軍吏)들이 한결같이 이르기를 『소무의 군대가 오전에 패했으니 지금 쉽게 쳐부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패가 이에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소무의 사졸들은 객병(客兵)들로 먼 곳에서 왔는데다 양식이 부족하다. 그래서 자주 공격하여 한번에 이길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제 병영을 닫고 병사들을 쉬게 하는 것이 이른바 싸움을 하지 않고도 상대방의 군대를 굴복시킨다는 것이니 선(善) 중의 선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무와 주건은 싸울래도 싸울 수 없어 군대를 끌고 병영으로 되돌아갔다. 그날 밤에 주건의 조카 주송(周誦)이 반란을 일으켜 성문을 닫고 항거하자 소무와 주건은 도주하였다. 주송은 수혜성(垂惠城)을 왕패에게 바치고 투항하였다.
  건무 5년 봄에 광무는 태중대부(太中大夫)에게 부신(符信)을 가져가게 하여 왕패에게 토로장군(討虜將軍)을 제수했다.

  6년에는 신안(新安)에서 둔전(屯田)하도록 하고 8년에는 함곡관(函谷關)에서 둔전하도록 했다. 또 왕패는 형양(滎陽), 중모(中牟)의 도적들을 공격하여 모두 평정시켰다.

  건무 9년에 왕패는 오한(吳漢) 및 횡야대장군(橫野大將軍) 왕상(王常), 건의대장군(建義大將軍) 주우(朱祐), 파간장군(破姦將軍) 후진(侯進) 등이 거느리는 병사 5만여 명과 함께 노방(盧芳) 휘하의 장수 가람(賈覽), 민감(閔堪)을 고류(高柳)에서 공격하였다. 흉노(匈奴)들이 기병을 보내 노방을 돕고 한군(漢軍)이 비(雨)를 만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대장군 오한(吳漢)이 낙양(洛陽)으로 돌아가며 주우에게는 상산(常山)에 주둔케 하고 왕상과 후진에게는 각각 탁군과 어양(漁陽)에 머물도록 시켰다. 광무는 새서(璽書)를 보내 왕패에게 상곡태수(上谷太守)를 제수하고 둔병(屯兵)은 전과 같이 거느릴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군(郡)의 경계에 상관없이 흉노의 포로들을 포격(砲擊)케 했다.
  건무 10년에 왕패는 다시 오한 등 네 장군이 거느리는 병사 6만여 명과 함께 고류에서 나와 가람을 공격하였는데 이때 조서가 내려져 왕패와 어양태수(漁陽太守) 진흔은 휘하 병사들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게 되었다. 흉노의 좌남장군(左南將軍)이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가람을 구원하러 왔을 때, 왕패 등이 평성(平城)아래에서 연달아 싸워 이기고 변새 바깥까지 추격하여 수백 급(級)의 목을 베었다. 왕패 및 여러 장수들은 안문(雁門)으로 들어가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두무(杜茂)와 만나 노방의 휘하 장수 윤유(尹由)를 곽과 번치에서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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