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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 신명의 생애 : 왕패(王覇) 神明
壁 별을 관장하는
왕패(王覇) 神明
<연구소제공>
그러나 시중의 사람들이 크게 웃고는 손짓하며 야유하였다. 왕패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되돌아오자 광무는 곧바로 남쪽 하곡양(下曲陽)으로 말을 달렸다. 왕랑의 병사들이 뒤를 따르고 있다는 전문(轉聞)이 있자 광무를 따르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진군하여 호타하에 이르렀을 때 척후병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강이 풀려 얼음이 떠다니는데다 배가 없어 건널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관속(官屬)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는데 광무가 왕패더러 가서 살펴보라고 했다. 왕패는 사실을 말하자니 뭇사람들이 두려워할 것 같고 앞으로 나가자니 강이 막고 있는지라 돌아와서 거짓으로 아뢰기를, 『얼음이 두터워 건널 수 있겠습니다.』라 하였다. 이 말에 관속들이 모두 기뻐했다. 이에 광무가 웃으면서 이르길,『척후병이 헛소리를 했구먼.』이라 하고는 드디어 앞으로 나아갔다. 광무가 관속들에게 이르기를『왕패의 기지(機智)로 무사히 도강한 일은 하늘이 내린 상서로움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라 하며 왕패를 군정(軍正)으로 삼고 관내후(關內侯)라는 작위(爵位)를 주어 그 공을 치하했다. 신도(信都)에 이르러 군대를 풀어 한단(邯鄲)을 함락시켰다. 왕패는 왕랑을 추격하여 마침내는 그의 목을 베고 그의 새수(璽綬)를 빼앗았다. 왕패는 다시 그 공으로 왕향후(王鄕侯)에 봉해졌다. 죽은 병사의 옷을 벗긴 후 염을 하는가 하면 다친 병사들을 몸소 돌보기도 했다. 광무가 즉위하여 왕패가 병사(兵事)에 밝고 사졸들을 잘 돌본다는 것을 알고 독자적인 직책을 주어도 되리라고 여겨 그를 편장군(偏將軍)으로 삼았다. 아울러 장궁과 부준의 병사들도 거느릴 수 있게 했는데 이 때 장궁과 부준의 직책은 기도위(騎都尉)였다. 건무(建武) 2년에 왕패는 다시 부파후(富波侯)에 봉해졌다. 이때 소무(蘇茂)가 오교적(五校賊)의 사졸 4천여 명을 거느리고 주건을 구원하고자 하여 우선 날랜 기병들을 보내어 숨어 있다가 마무의 군량(軍糧)을 약탈하도록 했다. 이에 마무는 사고가 발생한 곳으로 가 구원하였다. 주건이 성안으로부터 군대를 내보내 마무를 협공(挾攻)했으나 마무는 왕패의 구원병이 오리라는 것을 믿고 그다지 애써 싸우지 않았다. 마침내 마무의 군대가 소무와 주건에게 패하여 도주하게 되었는데 왕패의 병영을 지나면서 큰소리로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에 왕패가 말하길 『적(賊)의 병사들이 너무 많아 나가서 싸워 봤자 양쪽이 패(敗)할 것이 뻔하니 모쪼록 잘 싸워 주시오』라 하고는 병영의 문을 닫고 수비를 철저히 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군리(軍吏)들이 모두 나가서 싸우자고 했다. 6년에는 신안(新安)에서 둔전(屯田)하도록 하고 8년에는 함곡관(函谷關)에서 둔전하도록 했다. 또 왕패는 형양(滎陽), 중모(中牟)의 도적들을 공격하여 모두 평정시켰다. 건무 9년에 왕패는 오한(吳漢) 및 횡야대장군(橫野大將軍) 왕상(王常), 건의대장군(建義大將軍) 주우(朱祐), 파간장군(破姦將軍) 후진(侯進) 등이 거느리는 병사 5만여 명과 함께 노방(盧芳) 휘하의 장수 가람(賈覽), 민감(閔堪)을 고류(高柳)에서 공격하였다. 흉노(匈奴)들이 기병을 보내 노방을 돕고 한군(漢軍)이 비(雨)를 만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대장군 오한(吳漢)이 낙양(洛陽)으로 돌아가며 주우에게는 상산(常山)에 주둔케 하고 왕상과 후진에게는 각각 탁군과 어양(漁陽)에 머물도록 시켰다. 광무는 새서(璽書)를 보내 왕패에게 상곡태수(上谷太守)를 제수하고 둔병(屯兵)은 전과 같이 거느릴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군(郡)의 경계에 상관없이 흉노의 포로들을 포격(砲擊)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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