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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6년(2006)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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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소개 : 규(奎) 별을 관장하는 주우(朱祐)신명

규(奎) 별을 관장하는 주우(朱祐)신명

글 교무부

  주우(朱祐 : ?~48, 字는 仲先)는 광무제(光武帝)를 도와 후한(後漢 : 25~220)1)을 세우고 나라의 기반을 다지는 데 많은 공적을 남긴 장수이다. 남양군 완현(현 호남성 당하의 서남쪽 부근)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에 복양현에 있는 외조부의 집에서 자랐다. 이때 용릉현을 왕래하면서 훗날 후한을 건국하게 될 유수(劉秀 : 광무제)와 그의 형 유연(劉演)을 사귀게 되었다.

  전한(前漢)을 멸망시킨 왕망(王莽)정권에 대항하여 한나라를 재건하려는 시도는 유수(劉秀)가 처음이 아니었다. 23년에 유현(劉玄)은 수도를 낙양에 정하고 연호를 갱시(更始)로 하면서 한나라를 계승하였고(하지만 지지기반이던 농민군 세력이 그에게 등을 돌림으로써 불과 2년 뒤인 25년에 권력을 잃고 살해당하였으며, 이로써 한나라의 부활도 실패로 돌아갔다), 유수와 그의 형 유연을 각각 편장군(偏將軍)과 대사도(大司徒)에 임명하였다. 이때 주우는 먼저 유연의 호군(護軍)이 되었다가 뒤에 유현(갱시제)이 유수를 황하(黃河) 이북 지방의 평정을 위해 파견하였을 때는 유수의 호군(護軍)이 되어 늘 곁을 지켰으며 숙식을 함께 하였다. 이러한 세월이 있었기 때문인지 유수(劉秀)는 광무제가 된 이후에도 주우를 매우 총애하였고 훗날 패전의 잘못이 있거나 황제의 명을 어겨 주변으로부터 탄핵을 받을 상황에서도 한결같이 주우를 보호해 주곤 하였다.

  유수가 후한(後漢)의 초대황제[光武帝]로 즉위한 다음 해인 26년(건무)에 주우는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도양후(堵陽侯)에 봉해졌다. 이해 겨울 주우는 육양현(현 하남성 남양시 부근)에서 등봉(鄧奉)을 공격하였으나 패하여 도리어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에 광무제는 친히 병사를 이끌고 주우를 구출하였으며, 패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묻는 대신 후한 상(賞)을 내려 그를 위로하였다. 주우는 곧 힘을 얻어 신야(新野)·수(隋)를 공격하여 모두 평정하였다.

  이 당시, 광무제가 낙양에 도읍을 정하고 황제로 즉위하기는 하였으나 아직 각지에는 농민반란세력과 천자를 자처하던 군웅(群雄)들이 할거(割據)하고 있었다. 이들을 모두 진압하지 못한다면 황제라는 명칭은 껍데기일 뿐이었으니, 광무제가 처한 상황은 아직도 많은 장수들의 힘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27년(건무 3) 주우는 좨준(祭遵 : 胃 별을 관장)과 힘을 합하여 또 다른 군웅 연잠(延岑)을 격파하고 그가 훔쳐 갔던 인수(印綬 : 관직을 표시하는 도장을 매는 끈)2) 97개를 거두어들였고 또, 황우(黃郵)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내었다. 광무제는 이 일로 주우에게 황금 3천근을 하사하였다.

  28년(건무 4)에 주우는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잠팽(岑彭 : 虛 별을 관장)을 대신하여 파간장군 후진(侯進)과 보위장군 경식(耿植)을 거느리고 여구(黎丘 : 현 호북성 선성현 근처)로 쳐들어가 진풍(秦豊)을 포위하였다. 광무제가 몸소 여구에 와서 사신을 시켜 진풍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진풍은 욕을 해대면서 광무제를 비웃었다. 화가 난 광무제는 주우에게 절대로 항복을 받지 말고 끝까지 섬멸하라고 지시하고 낙양으로 돌아갔다. 이듬해(건무 5) 여름 결국 식량이 떨어진 진풍은 모친과 처자식 등 식솔 9명과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항복하였다. 주우는 항복을 받아들이고 진풍만을 수레에 태워 낙양으로 압송시켰다. 대사마(大司馬) 오한(吳漢 :  氐 별을 관장)은 광무제의 명을 어긴 주우에 대한 탄핵을 상주하였으나 이번에도 역시 광무제는 주우를 벌하지 않았다.

  주우는 사람됨이 질박하고 솔직하였으며 유학(儒學)을 숭상하였다고 한다. 전쟁에 임해서는 대개 항복만을 받았을 뿐이고 적의 목을 많이 베었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았다. 또 성읍(城邑)을 안정시키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병사들이 백성을 노략질하는 것을 엄금하였는데, 이로 인해 그를 원망하는 병사들이 많았다고 한다. 광무제의 병사들은 군대의 규율이 완전히 잡히지 않았을 초기에는  백성들을 노략질하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주우가 병사들에게는 원망의 대상이었을지언정 광무제에게는 규율을 세워 왕조의 기반을 튼튼하게 다져주는 둘도 없는 신하였음에 틀림없는 것이다.

  이후 주우는 33년(건무 9)에 남행당(南行唐)에 주둔하면서 흉노를 막았다. 37년(건무 13)에는 격후(鬲侯)에 봉해지고 식읍이 7,300호에 이르게 되었으며, 48년(건무 24)에 세상을 떠났다.

 

 


1) 기원전 202년에 유방이 건국한 한()나라는 기원후 8년에 왕망에 의해 멸망하였다. 25년에 유방의 9세손인 유수(劉秀 : 광무제)는 왕망이 세운 신()나라를 무너뜨리고 낙양에서 한()나라를 재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를 유방이 장안에 세웠던 전한(前漢)과 구별하기 위하여 후한(後漢) 또는 동한(東漢)이라고 한다.

2) 관인이란 천자(天子) 이하, 여러 관리의 관직이나 작위를 표시하는 인()이며, ()는 그 인의 고리에 맨 30cm 정도의 끈이다. 관직에 취임하면 그에 해당하는 관인과 끈이 주어지는데, 그것을 항상 몸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인수를 허리에 찬다라는 말은 임관한다는 뜻이고, ‘인수를 풀다라는 말은 퇴관(退官면관을 의미하였다. 관직과 작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관인의 형태·재질 등이 뚜렷하게 구별되었던 것처럼 끈에도 그 빛깔에 엄격한 구별이 있었다. 인수의 출현은 전국시대라고 추정되는데 제도로서 갖추어진 시기는 진(() 시대이다. 그 후 남북조시대 이후는 관인의 제도가 바뀌고, 그에 따라 끈은 인()을 허리에 차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허리띠에 매는 장식용 매듭 끈이 되었다.(EnCyber 두산세계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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