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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7년(2007)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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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소개 : 정(井) 별을 관장하는 비융(邳肜)신명

정(井) 별을 관장하는 비융(邳肜)신명

 

 

글 교무부

 

  비융[邳肜:?~30, 자(字)는 위군(偉君)]은 신도군(信都郡:현 하북성 기주시) 사람으로 광무제(光武帝)를 도와 후한(後漢:25~220)01을 세우고 나라의 기반을 다지는 데 많은 공적을 남긴 장수이다.

  광무제는 낙양에서 황제로 등극(25년)하기 이전에 갱시제(更始帝) 유현(劉玄)의 휘하에서 장수로 활약하였다. 23년, 갱시제는 전한(前漢)을 멸망시킨 바 있는 왕망(王莽) 정권에 대항하여 최초로 한(漢)왕조의 부흥을 이룩하였고,02 이듬해에는 유수(광무제)를 대사마(大司馬:사령관)로 임명하여 하북지방을 평정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그런데 이 임무로 인하여 광무제는 갱시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일 년 후에는 하북지방을 배경으로 하여 후한 건국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광무제가 이 지역을 처음부터 순조롭게 획득해 나간 것은 아니었다.

  당시 하북 일대는 왕랑(王郞:?~24)03이라는 자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다. 스스로 황제의 지위에 오른 그는 한단(邯鄲:현 하북성 한단)에 세력거점을 구축하였다. 또 점차 주변 고을을 장악하여 호응을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으므로, 24년 광무제가 하북 지방에서 왕랑을 토벌할 사람을 모집할 때 모두들 거기에 응하지 않았고 코웃음만 칠뿐이었다. 오히려 왕랑이 10만 호(戶)라는 막대한 현상금을 걸어 놓고 광무제를 잡으려 하니, 광무제는 처량하게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쫓기던 광무제가 피신한 곳은 하북 일대에서 끝까지 왕랑에게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던 2개 군[화성군과 신도군]중 하나인 신도군(信都郡)이었다. 당시 신도군의 태수였던 임광(任光)을 비롯하여 도위로 있던 이충[李忠:모(昴) 별을 관장]과 현령이었던 만수[萬修:자(觜) 별을 관장] 등은 모두 이때의 만남을 인연으로 해서 광무제에게 기용되었다.

  한편 왕랑에게 항복하지 않았던 화성군(和成郡:신도군의 인근 지역)의 태수 비융(邳肜) 또한 광무제의 피신소식을 듣고 신도군으로 달려왔다. 이때 그는 탁월한 식견으로 광무제의 앞날을 바꿔놓을 만한 중요한 간언(諫言)을 하였다. 왕랑에게 혼쭐이 난 광무제는 신도군의 병력을 사용하여 갱시제가 있는 장안(長安)으로 무사히 귀환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비융은 이런 그를 다음과 같은 말로 설득하였다. “백성들이 한(漢)을 사모(思慕)하여 노래 부른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갱시제[劉玄]가 장안에서 한(漢) 왕조를 회복한다는 기치를 내걸자 천하가 그에게 호응하였고, 장안 근처의 여러 성(城)들도 궁과 길을 청소하고 그를 맞아들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점술가인 왕랑은 왕망이 멸망한 혼란한 틈을 타서 자신을 한(漢)의 후예 유자여(劉子輿)라고 속이고 세력을 잡아 일시적으로 연(燕)·조(趙)의 땅을 진동시키고 있을 뿐이니, 명공(明公)께서 신도군(信都郡)과 화성군(和成郡)의 병력을 이끌고 공격한다면 능히 제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때에 진영(陣營)을 풀고 장안으로 돌아간다면 어찌 하북(河北) 일대만을 잃을 뿐이겠습니까? 하북이 왕랑에게 장악되는 날에는 필시 장안까지 위협받게 되므로 한(漢)나라의 위엄은 크게 떨어질 것입니다. 이는 현명한 자가 취할 계책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또, 왕랑을 토벌하지 않고 장안으로 돌아가게 될 경우 명공께서는 호송 병력도 모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대로 서행(西行)길을 떠난 다음에는 우리 지역에도 한단측(왕랑측)의 세력이 형성될 터인즉, 군사들도 남겨진 부모처자의 안위(安危)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필경 중도에서 뿔뿔이 흩어져 도망해 올 것이 분명합니다.”

  광무제는 비융의 말이 옳다고 여겨 장안으로 귀환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후한건국의 기반이 될 하북지방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한단을 평정한 후 비융은 무의후(無義侯)에 봉해졌다. 25년(건무 원년)에는 다시 영수후(靈壽侯)에 봉해지고, 대사공(大司空:부총리)의 일을 보았다. 광무제가 낙양에 돌아 왔을 때 비융을 태상(太常:종묘나 능묘의 제사및 궁중의례를 관장하던 직책)에 제수하였는데, 비융은 한 달 후 소부(少府:황실재정 관리책임자)로 옮겼다가 그 해에 벼슬을 그만두었다. 얼마 후 다시 좌조시중(左曹侍中:천자를 옆에서 모시던 직책)이 되어 광무제를 따라 정벌을 다니다가, 30년(건무 6) 나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났다.

 

 

 

 


01 기원전 202년에 유방이 건국한 한()나라는 기원후 8년에 왕망에 의해 멸망하였다. 25년에 유방의 9세손인 유수(劉秀:광무제)는 왕망의 신()나라가 망하고 낙양에서 한()나라를 재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를 유방이 장안에 세웠던 전한(前漢)과 구별하기 위하여 후한(後漢) 또는 동한(東漢)이라고 한다.

02 하지만 한()왕조를 회복했다는 안도감에 취해 생활이 방종해지고 국가의 질서가 느슨해지자 자신의 지지기반이었던 농민 반란군 세력이 등을 돌렸고, 불과 2년 후인 25년 장안에서 권력을 잃고 살해되었다.

03 ?~24, 장안의 점술가였는데 자신을 한나라 왕실의 후예인 유자여라고 속여 반란군 세력을 규합한 다음 이를 토대로 하북 일대를 장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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