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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7년(2007)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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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소개 : 장(張) 별을 관장하는 장궁(藏宮)신명

장(張) 별을 관장하는 장궁(藏宮)신명

 

 

글 교무부

 

  장궁[藏宮:?~58, 자(字)는 군옹(君翁)]은 영천군 겹현(潁川郡縣:현 하남성 중부) 사람으로, 광무제(光武帝)를 도와 후한(後漢: 25~220)01을 세우고 나라의 기반을 다지는데 많은 공적을 남긴 장수이다. 그는 젊어서 현(縣)의 정장(亭長)과 유요(游)02을 지내다가, 광무제를 따라 출전(出戰)하게 되었는데 여러 장수들이 그의 용기를 칭찬하였다. 광무제는 과묵하고 부지런한 장궁의 태도를 보고 그를 거두어 가까이 두었으며, 하북(河北)에 이르러서는 편장군(偏將軍)으로 삼았다. 이때 장궁은 각지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농민 반란집단의 토벌에 전념하였는데, 여러 차례 적들의 진영을 흩뜨려 물리쳤다.

  광무제가 즉위(25년)한 후 장궁은 시중(侍中)03, 기도위(騎都尉)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성안후(成安侯)에 봉해졌다. 29년(건무 5) 군대를 이끌고 강하군(江下郡:현 호북성 무한시)을 순시하였는데, 대향(代鄕) ·종무(鐘武)·죽리(竹里)04을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켰다. 이에 광무제는 태중대부(太中大夫)로 하여금 절(節)05을 지니고 가서 장궁에게 보위장군(輔威將軍)을 제수토록 했다.

  31년(건무7) 장궁은 다시 기사후(期思侯)에 봉해졌으며, 양군(梁郡)과 제음(濟陰)06을 쳐서 모두 평정하였다.

  광무제는 낙양에서 즉위한 후 각처에 흩어져 있던 군웅(群雄)들을 평정해야만 했다. 동쪽의 유영(劉永)을 필두로 하여, 남쪽의 진풍(秦豊)과 등봉(登奉), 북쪽의 팽총(彭寵), 서쪽의 외효(隗囂)에 이르기까지 즉위 후 약 10년에 걸쳐 수많은 군웅들을 평정한 결과, 남은 상대는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촉(蜀)지방에 할거하고 있던 공손술(公孫述)이 되었다. 35년(건무 11) 광무제가 공손술을 치기 위해 친히 장안(長安:현 서안)으로 출진하고, 장궁은 군대를 이끌고 중려(中廬:현 호북성 상번시)에 이르러 낙월(駱越)07에 주둔하고 있을 때이다.

  공손술이 정남대장군 잠팽(岑彭:虛별을 관장)과 형문(荊門:현 호북성 중부)에서 대치하고 있었는데, 잠팽 등이 자꾸 불리해지자 월인(越人)들은 모반하여 촉(蜀:공손술을 말함)을 따르려고 하였다. 장궁도 병력이 적어 힘으로는 제압하지 못하고 있을 때, 마침 속현(屬縣)에서 수레 수백 승(乘)을 보내왔다. 장궁은 병사들을 시켜 밤새도록 수레 구르는 소리를 내게 하였고, 톱으로 성문(城門)의 문지방을 자르도록 했다. 월의 척후병은 밤새 수레 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을 들은 데다 문지방까지 닳아 없어진 것을 보고 대규모의 한나라 병사가 왔음을 상부에 보고하였다. 이에 월인(越人)의 우두머리가 술과 고기를 바치고 장궁의 군영(軍營)을 위문하였고, 월인들은 이 일로 인해 다시 안정을 찾게 되었다.

  장궁과 잠팽 등은 형문(荊門:현 호북성 중부)을 격파하고 다시 파군(巴郡:현 중경시 강북지역)을 함락시켰다. 잠팽은 장궁에게 항복한 병사 5만을 주어 공손술의 장수 연잠과 침수(沈水:현 사천성 사홍현 동남쪽의 강)에서 싸우게 하였다. 이곳에서 장궁은 크게 승리를 거두었고, 연잠이 성도(成都:蜀의 수도)로 달아나자 그 휘하병사들이 모두 투항하였다. 장궁은 연잠 진영의 군마(軍馬)와 보물들도 모두 포획한 후, 이로부터 계속 승승장구하여 북쪽을 휩쓸었으므로 투항한 자가 10여 만이나 되었다.

  장궁의 군대가 평양향(平陽鄕:현 사천성 삼태현 서북)에 이르자 촉장(蜀將) 왕원(王元)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투항하였다. 계속 진격하여 금죽(錦竹)과 부성(城)을 차례로 격파하고 공손술의 동생 공손회를 베었으며 다시 번(繁), 비(郫)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때까지 대장군의08절(節)5개, 인수(印綬)09 1,800개를 빼앗았다.

  이즈음 대사마(大司馬) 오한(吳漢:별을 관장) 또한 승승장구하여 성도(成都)로 진격하고 있었다. 장궁은 큰 성(城)을 연달아 깨부수며 성도에 도착하여 오한과 합류하였다. 술을 마시며 즐거운 회합을 가지던 중, 오한이 장궁에게 “장군이 적들의 성(城) 아래를 지나며 위세를 떨침에 풍행(風行)이 번뜩였소. 그러나 도적의 무리를 헤아리기 어려우니 돌아가는 길엔 다른 길을 취하는 편이 좋을 듯하오.”라고 하였다. 하지만 장궁은 오한의 지적을 따르지 않고 오던 길을 되돌아갔는데 도적들 또한 감히 접근하지를 못했다. 장궁은 오한과 함께 함문(咸門:성도 북쪽의 성문)으로 진격하여 공손술을 멸했다.

  촉(蜀) 지방이 평정된 후 장궁은 광무제로부터 광한태수(廣漢太守) 직을 제수 받았다. 37년(건무 13)에는 식읍을 늘려 다시 찬후(侯)에 봉해졌다. 39년(건무 15) 부름을 받고 입조(入朝)하여 낭릉후(朗陵侯)에 봉해졌으며, 42년(건무 18)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제수되었다. 58년(영평 원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諡號)를 민후(愍侯)라 했다.

 

 

 

 


01 기원전 202년에 유방이 건국한 한()나라는 기원후 8년에 왕망에 의해 멸망하였다. 25년에 유방의 9세손인 유수(劉秀:광무제)는 왕망이 세운 신()나라를 무너뜨리고 낙양에서 한()나라를 재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를 유방이 장안에 세웠던 전한(前漢)과 구별하기 위하여 후한(後漢) 또는 동한(東漢)이라고 한다.

02 유요()는 현()의 하부 행정구역인 향() 내의 도적을 단속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직책이었다. ()은 다시 리()로 나누어졌는데 이는 지방행정의 최말단 단위로 대개 백호(百戶)로 구성되었다. 이 리()가 열 개 모여 정()이 되기도 하였는데, 정장(亭長)이 있었고 도적을 단속하는 일을 하였다.

03 ()의 벼슬. 천자의 좌우에서 여러 가지 일을 받들고 고문(顧問)에 응하였다.

04 강하군(江河郡)내 현()들의 명칭.

05 부절(符節): 예전에, 돌이나 대나무·옥 따위로 만들어 신표로 삼던 물건. 주로 사신들이 가지고 다녔으며 둘로 갈라서 하나는 조정에 보관하고 하나는 본인이 가지고 다니면서 신분의 증거로 사용하였다.

06 현재 산동성 정도현 서북쪽

07 낙월인(駱越人)의 유배지였으므로 낙월인이 모여 살게 되었고 또 지명(地名)이 되었다. 중국 양쯔강 이남의 절강성(浙江省) 부근에서 베트남까지의 지방에 살던 여러 민족을 통틀어 백월(百越)이라 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낙월(駱越)이었다.

08 각주 5참조

09 관인이란 천자(天子) 이하, 여러 관리의 관직이나 작위를 표시하는 인()이며, ()는 그 인의 고리에 맨 30cm 정도의 끈이다. 관직에 취임하면 그에 해당하는 관인과 끈이 주어지는데, 그것을 항상 몸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인수를 허리에 찬다는 말은 임관한다는 뜻이고, ‘인수를 풀다라는 말은 퇴관(退官면관을 의미하였다. 관직과 작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관인의 형태·재질 등이 뚜렷하게 구별되었던 것처럼 끈에도 그 빛깔에 엄격한 구별이 있었다. 인수의 출현은 전국시대라고 추정되는데 제도로서 갖추어진 시기는 진(() 시대이다. 그 후 남북조시대 이후는 관인의 제도가 바뀌고, 그에 따라 끈은 인()을 허리에 차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허리띠에 매는 장식용 매듭 끈이 되었다.(EnCyber 두산세계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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